거꾸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 거꾸로 읽는 책 22
유시주 지음 / 푸른나무 / 1999년 8월
구판절판


조셉 캠벨은 실락원의 인간적 의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로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의 삶을 일군 것입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꿈같은 낙원 에덴 동산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습니다.-45쪽

<국화와 칼>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도 니체가 세워 놓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대립적 정식을 문화분석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

겉으로 보기엔 서로 비슷한 여러 인디언 부족의 문화 안에서도 사실은 완전히 판이한 문화유형이 존재한다는 것인데,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아메리카 평원에 사는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디오니소스형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격렬한 경험, 즉 인간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궤도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단식이나 고행, 약물, 알콜을 통해서 환상 상태에 이르려 하고, 환상 속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자 한다. 그들에겐 무엇에든지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며 그런 덕목을 갖춘 전투적인 사람을 존경한다.
반면에 뉴멕시코주의 고원지대에 사는 주니 족은 그와 대단히 상반되는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사에 중용을 중시하며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과도한 것은 불신하고 경멸한다. 용감하고 정열적인 사람은 비난받고, 붙임성 있고 온화하며 남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존경받는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인 흥분이라든가 화를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사랑이든 증오이든 질투이든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도 역시 혐오의 대상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주니 족의 문화를 전형적인 아폴론 형의 문화라고 설명하였다. -67쪽

신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해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롬은 아이들이 유달리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이에겐 세계의 전부이다. 아이는 어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일부로 자라나, 출생한 뒤에도 역시 어머니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다. 어머니야말로 아이에겐 생명을 주고,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애저오가 의존심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한 집착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낙원, 즉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던 행복한 상황에 대한 동경심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행복한 낙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곧 신경증으로 이어진다. 그집착을 끊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단순히 성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부친에 대한 적대감 역시 프롬은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다.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게 아니라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부자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며 그의 운명은 아버지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굴복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은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낳고, 억압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들며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이러한 갈등 역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성의 대결로 왜곡시켜 버렸다고 프롬은 비판했다.-94쪽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칭찬을 받는 데 성공하면 더 없이 행복해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면 즉 나르시시즘에 구멍이 뚫리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위축되고 만다. 또 제어할 길 없는 격분에 사로잡힌다.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받으면 우울증이나 증오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프롬은 특히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했다. 어떤 한 개인이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유능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당장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가 '내가 속한 단체, 집단, 지역, 종교,국가, 민족' 으로 대치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우리들만이 진리의 소유자'이고 '우리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문화적이며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재능이 뛰어난 민족'이라는 주장이 실제로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집단적 나르시시즘 앞에서는 아무도 한 우스꽝스런 개인 앞에서 했던 것처럼 쉽사리 웃지 않는다. 섣불리 비판했다간 되려 큰 봉변을 당할 수 도 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가장 위력을 떨칠 때는 전쟁 때- 열전이건 냉전이건-이다.
'우리 국민은 선량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도적인데 적군은 사악하고 이중적이며 잔혹하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인데 적군은 악의 화신들이다.'는 식이다. 정치가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선동되지 일쑤인 이런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극단적인 배타와 광신, 증오를 낳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말살하려는 광증을 낳는다. 그래서 프롬은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을 '이성을 잠재우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갈파했다.-194쪽

카뮈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 신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200쪽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들은 불행하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행복한가? 아니다. 불행하기로 말하자면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고 편애하는 가부장제의 속성은 남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남성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볼린은 가부장제의 이런 속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악한이었다. 아테네로 가고자 하는 나그네는 예외없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졌다. 키가 작은 사람은 침대에 맞게 늘여졌고 키가 큰 사람은 침대에 맞게 잘려졌다.

성공하려는 남성들은 예외없이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침대에 눕혀진다. 지배욕, 강건함, 능수능란한 사교술, 경쟁의식은 잡아늘여지고 섬세함, 자상함, 연약함, 눈물, 동정심, 너그러움은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은 마침내 아테네로 가지만 순응치 못한 사람은 낙오한다. 아테네로 입성한 남성들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느 날 문득 삶이 고달프고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렇게 위기를 알리는 신호가 와도 남성들은 선뜻 자신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거나 외도를 하거나 과도하게 일에 열중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등 생각을 마비시키는 일로 자신을 가장한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는 걸핏하면 화를 낸다. 남의 운전습관에서부터 아이들이 징징대는 데 이르기까지 매사에 지나친 적개심과 분노를 드러낸다. 마치 상처입은 맹수와도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심장마비를 일으킴으로써 남성들의 평균 수명을 단축시킨다. 이러할진대 가부장제 아래에서 어찌 여성만 마음 편히 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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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06-08-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진짜 재미있는 것만 골라놨잖아요.

LAYLA 2006-08-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타이핑한것은 아니지만 얼룩말님이 재미있게 보셨다니 뿌듯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