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 제6회 무명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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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가슴은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쿨하게.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가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인연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졌고, 생의 흔적은 먹고 내버린 파리 껍질처럼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 마리 호랑거미처럼 조심조심 발 디딜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내가 살아가는 이 덥고 끈적끈적한 세상을 한없이 쿨하게 냉소하는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본인이 썼는지 한국인이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몇몇 쿨한 소설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일말의 모욕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넘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 해도.

내가 가진 것 중 여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잘생긴 얼굴과 할아버지의 재산, 두 가지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음울하고 좁아터진 속아지. 나를 경멸하는 할아버지 나의 배우자에게 나 이상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할 17대 종손의 위치. 하룻밤도 사내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천하의 바람둥이 생모와 그녀에게 몸과 정신을 모두 흡입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의 기억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철 효계당에 드리워진 회화나무 그늘처럼 어둡고 음침한 것들뿐이었다. 그런 실상을 마주했을 때 두 뺨을 감싸쥐고 경학할 여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연애를 향한 나의 욕망은 안채 뒤편에서 고요히 일렁이고 있는 깊은 우물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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