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 상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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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옆에 앉아서 책이라도 읽어드릴까요? 미즈무라 씨가 잠들때까지.

저도, 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에 빗대서 하는 말이다.

-정말 재미있는 말을 하네, 이 도련님은.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마음껏 이야기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가 젊은 덕분인지 밤을 새웠는데도 오히려 피곤이 사라진, 속이 비칠 듯한 피부를 지닌 얼굴이 밝아오는 아침공기 속에 보인다. 그 투명한 얼굴이 다가와, 낯선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거기에 예상치 못했던 다정함이 깃들어 있는 것은 이대로 덜컥 자버리면 남자로서 실례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고마워,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잠을 못 자. 라고 유스케의 배려를 맥없이 웃어넘긴 나는 몸을 휙 돌려 식당 끝에 있는 침실로 도망치듯 철수했다.

샐러리맨 같지도 않았다. 샐러리맨은 최소한의 훌련된 사교성이라는 것을 몸에 익히고 있는 법이다. 남자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

외할머니 역시 아침식사로 빵을 들지만, 그 아침식사는 이 세 자매의 아침식사와는 달랐다. 비록 유스케의 할머니들이 이 세 자매와 물리적으로 같은 것을 입고 먹는다 해도,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같아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별장하고 몇 년 차이 안 나는데, 우리 엄마는 당신은 몇십 년 전부터 별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은근히 형수네 가족을 깔본다니까. 그쪽이 훨씬 더 부잔데 말이야."
"부자야?"
"...거품이 터져서 지금은 꽤 빚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샐러리맨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부자야."
"응"
"하기야 빚도 격이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런 내가 기지에서 영어를 조금 배운 뒤, 바로 미국인 중위네 집에 메이드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건축자재는 물론이고 창도 커튼도 가구도 통째로 미국에서 직수입해온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채광은 너무 밝다고 느껴질 정도고, 게다가 토스터, 오븐, 냉장고, 세탁기 등- 그런 좋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것이 반짝반짝 빛나며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달세계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별로 놀라움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놀라는 데에도 지식과 경험 교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여자는 참 어려워. 네 어머니는 얼굴도 머리도 보통이라 그저 그런 인생으로 만족하니까 편한데 말이야. 그런데 한쪽은 좋은데 한쪽이 나쁘면 불행하지. 머리보다 얼굴이 괜찮으면 자만해져서 못 올라갈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실패해버려. 얼굴보다 머리가 좋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은 갖지 않지만, 자기 머리에 걸맞은 인생이 못 될 테니까 역시 재미없지. 너는 못생긴 건 아니지만 옛날부터 똑똑해서 머리 쪽이 몇 단 위니까, 그게 곤란하단 말이야. 어지간한 집에 태어났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말이지...

- 남자는 달라?

- 그야 다르지. 남자는 말이야, 머리만 좋으면 돼. 거기에다 나처럼 잘생겼으면 무서운 게 없지.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난 뒤에 퇴근하고 돌아온 겐지 아저씨가 다음 일요일에 내가 가정부로 일할 곳을 찾아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PX에서 가져온 듯한 미국제 나일론 스타킹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때 내 일생이 결정되었던 것이겠죠. 아직 젊고, 좋고 나쁘든 무엇이나 마음에 크게 그림자를 드리울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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