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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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아이를 낳자고 의기투합했던 시절이 있었다.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금방 아이가 생길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네 번의 인공수정이 줄줄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의 불임에 횟수 부족보다 좀더 심각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굳이 원인을 찾지 않고 깨끗이 포기했다. 아이를 그렇게까지 간절히 원하는 건 아니었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로는 하나도 아쉽지 않게 되었다. 음주를 위해서는 임신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도 하고.-15쪽

나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삼사십대 남녀가 단둘이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당황함과 송구함을 담아 온갖 변명과 헛소리를 쏟아내면서도, 나는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 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었다. 세상이 떠내려가도록, 엄마와 아빠와 오빠들과 성민이 다 떠내려가도록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오래전에 죽은 신들까지 깨워 일으킬 만큼 발버둥치고 싶었다. 쓰나미보다 거센 내 눈물에 온 세상이 떠내려간 다음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정욱연, 그 바위처럼 고요하고 놀라운 남자와 단둘이 마주하고 싶었다. -203쪽

나는 네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고 네 아빠도 그랬단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312쪽

사랑은 비명보다도, 운명보다도 빨리 달린다. -312쪽

난 분명히 키스에서 멈추려고 했는데, 정욱연은 왜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거지? 나는 분명 오창에 가려고 했는데, 정욱연은 왜 가지 말라고 한 거지? 그날 새벽 원장실 앞에서, 작은오빠는 왜 나에게 문자질을 해댄 거지? 정욱연은 왜 문을 열어준 거지? 그런 부분들은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부분들을 탐욕스럽게 더 많이 찾아내고 싶었다. 지금 당당하게 성민에게 내세울 수 있는, 내 잘못이 아닌 부분들. 내가 어쩔 수 없었던 부분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운명의 부스러기들을 아무리 긁어모아보아도 겨우 콩알만한 크기였다. 그 작은 콩알이 울산바위만한 내 사랑의 옆구리를 살짝 떠밀었을 뿐이었다. 콩알이 살짝 떠밀자 바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산비탈을 내달렸다. 굉음조차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커다란 바위는 믿을 수 없이 빨랐다. 발뺌은 불가능했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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