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구판절판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나는 그를 진심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쩌면 내 생애에 단 하나의 '타인을 위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반해 있다. 그가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분연히 버리고 그와 함께 남도로 떠나는 밤기차의 창가에 청승맞으나 희망찬 포즈로 앉아서 그를 위해 삶은 달걀 껍질을 벗길 것이다, 얼마든지!

하지만 돌이켜보면 불과 몇 달 전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남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나의 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11쪽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68쪽

금지된 것만 하고 싶고, 강요된 것만 하기 싫고.-105쪽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224쪽

주위의 것이 다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 어둠 속에서는 그렇게 자기 자신만 남기 때문에 이기적이 될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닐까.-225쪽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241쪽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245쪽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304쪽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선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수라거나 충동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통제로부터 이탈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달아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위대하고 진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서정적 인간임에 틀림없다.-311쪽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325쪽

내게는 허석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삶이 그 기회를 나 아닌 이모에게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어제 이후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해졌다.-332쪽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다행인 것은 우연 중에는 나쁜 우연이 더 많지만 간혹 좋은 우연도 있다는 것이다. -372쪽

자기가 눈물을 훔칠 생각조차 못하고 검은 산처럼 사라져준 뒤 이모가 허석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갖고 그리고 그 중절수술을 하느라 얻은 고통이란 것을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그것을 알았다면 이모를 다시 저 눈밭으로 내쫓아버릴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이모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꽤 희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 바로 순정이었다.-376쪽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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