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코, 연애하다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7월
절판


"새로 고쳐 지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래된 것이 더 값어치가 있거든. 이래 봬도 독특한 건축이라꼬 대학 교수들도 조사하러 온 적이 있다 아니가."
고는 또박또박 귀에 박히게 말했다. 그것은 콘크리트나 새 건축자재로 지금이라도 당장 최신식 별장을 지을 재력은 충분하지만, 일부러 오래된 그대로 놔두었다, 이것이 훨신 부자다운 처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간히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리하다는 걸 굳이 알려줄 의리 따위는 없으니까. 그걸 아는 것은 남자의 책임이니까.-36쪽

창밖에 소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 비석이 두 개 서 있었다. 뭘까 궁금한 생각에 수은등 불빛에 들여다보니, 하나에는 '@@궁 비전하가 손수 심으신 소나무' 또 하나에는 '@@궁 @@자 공주께서 손수 심으신 소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비석은 아직 새것이었다.
...
"손수 심으신 소나무라는 발상이 역시 다르네요, 윗분들과 아랫것들 차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내가 세운 것도 아닌데."
"그럼 나는 손수 데려온 여자, 뭐 그런 건가?"
"그렇게 놀리지 마라니까!"-48쪽

나는 고로의 성품과 마음만이 아니라 육체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좋은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단단해 보이면서 매끈한 몸매. 나카야 고의 도발적이면서 조각처럼 훌륭한 나체-그마저도 부자의 교만과 에고이즘을 상징하고 있다. 돈 들이고 자만심 들이고 시간 들여서 만든 육체미-와 달라서, 고로의 그것은 솔직하고 어딘지 쓸쓸한 육체다.
그런 무심한 육체가 나는 좋다. -69쪽

남자란 대개 가족의 냄새가 나는 곳에 있으면, 그 냄새에 전염되어 단순한 '가족의 일원'이 될 뿐 한 '남자'가 되는 일은 별로 없는데...-117쪽

"아름다워. 젊기도 하고...몇 번을 봐도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렇게 '처음이에요'하는 사람이 많겠죠?"
"아니. 나 정도 나이가 되면 당신처럼 젊은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지. 간혹 사귀는 친구도 있지만... 노는 건 마흔서넛까지면 충분하다는 친구들이 많아.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신적인 요소가 많아져서 젊은 사람은 안 돼. 처음이에요, 보다는 다녀왔어요, 하는 여자를 더 좋아하지."-159쪽

...단지 이렇게라도 해서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안달하는 나의 지금 모습이 좋았다. 나는 아직 남자를 좋아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울 수 있다는, 그런 풍요로운 느낌이 좋았다.-174쪽

고로는 그래도 나와 둘이만 있게 된 것이 편했는지 그제야 웃옷을 벗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한잔하까?"
얼마나 기쁘던지! 만일 내가 개라면 꼬리라도 흔들었을 것이다.-197쪽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유혹할 수 있는 사람과 유혹할 수 없는 사람. 나에게 고로는 '유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짜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한한다. 실패해도 어차피 본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이일 때만 가능하다.
...
술을 먹여 떨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고로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술이 세다. 또 섹스어필을 해보려 해도 사정이 만만치 않다. 금방 시계를 들여다보고 '막차 시간이다!'라고 벌떡 일어서는 남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한단 말인가! 맨살을 힐끔힐끔 보여줘도 '감기 들라'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를 어디서부터 잡아먹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내가 고로를 넘어트릴 수 없는 가장 큰 원인은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 정말 좋아하면 무엇보다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생각하게 되니까. 고로는 나를 여자로서 사랑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내가 유혹하면 더 싫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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