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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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나와 함께 갑시다."
그러자 퀭한 눈으로 해란이 윤수를 쏘아보았다. 눈가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결국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나도 갈 데가 없어서 하는 말이오."
"그래봐야, 냄새 나는 여관이나 싸구려 모텔 따위겠죠. 지겨워."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갑시다. 편히 재워주고 아침밥도 해드리리다."
"왜 그러는 건데요?"
"언젠가 누가 내게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니까요."-93쪽

"존재가 원래 혼자라는 뜻이라는 건 알겠는데, 저 들판의 비석 없는 무덤처럼 말이다, 그게 가끔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 것이다. 네가 뭘 알겠냐만."-129쪽

"저 여자냐? 근데...좀 연로한 것 같다."
"다섯 살짜리 딸도 있다네요."
"딸?"
그로부터 맥주 두 병을 마실 동안 삼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 꼭 또래를 사귀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모쪼록 상처에 대비하거라. 상처라는 건 대개 스스로 받는 거니까."-136쪽

"오늘도 저랑 같이 자고 싶지 않은 거죠?"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
"그리고 어쩌면 내가 연미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덧없이 웃었다.
"아뇨, 사실은 내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나란 존재는 단지 환절기에 잠시 필요할 뿐인 거예요."
"..."
"삼촌은 언니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글쎄, 그럴까?"
"삼촌이 다른 여자들에게서 구하는 것은 사소한 것들이에요. 말하자면 호텔 여직원의 훈련된 미소나 서비스 같은 거. 그런 건 원래 집에 없는 거니까요."
연미가 위스키를 더블로 한 잔 주문했다.
"나에게 바라는 게 없다는 것 잘 알아요. 단지 삼촌은 가끔 베풀어주고 싶은 어떤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언니한테는 그럴수가 없으니까요."-191쪽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시는 여자와 같은 것이더군."
"왜죠?"
"한 번 배신당하면 두 번 다시 울어주지 않더군. 시는 또 물질적으로 눈물과 성분이 같거든. 그것이 굳어 고요한 새벽에 푸르른 돌로 변하게 되지."-229쪽

스물아홉에 천둥 같은 사랑이 찾아왔다가 서른에 떠나갔죠. 그후 마음을 놓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강구항에 오게 됐어요. 그날 서른 마리나 되는 고래가 바닷가로 떠밀려왔죠. 그런데 죽은 고래들을 보면서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관에서 잠이 깼는데 마음이 숲처럼 고요한 거예요. 마치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온 것처럼 말예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이 고향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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