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를 주장한 니체는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영민한가? 우리는 자신이 과거 10만 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앞으로 10만 년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모른다. 단지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실행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10만 년 전에도 반복되었고, 그리고 10만 년 뒤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만을 안다.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5쪽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제어록
..이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 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당연히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50쪽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겸허하게 그 결과를 초월자에게 내맡긴다면, 종교적 정신은 충분히 인문적 정신과 양립 가능하다. 그렇지만 종교적 정신은 치열한 성찰과 불굴의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나약한 정신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차피 최종결과는 초월자가 결정한다고 믿기 쉽기 때문이다.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기 전, 옛사람들은 진인사대철명이란 선비 정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초월자에게 기대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비범한 인문적 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대천명이란 말 그대로 초연했다.
... 동학은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서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서학, 즉 기독교가 인간 외부의 초월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초월종교였다면, 동학은 인간 내부에서 신성을 찾았던 내재종교였기 때문이다. -70쪽
20세기 이후 현대 인문학의 고뇌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두가지이다. 타자와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왜 20세기에 들어서야 타자와 차이라는 개념이 부각되었을까? 이것은 20세기의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 혹은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과거 사람들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금욕이나 절욕이 성숙함의 척도처럼 기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들이 과거 사람들이 우리보다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과 욕망에 상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때에만 그는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다.
과거 사람들은 가정에서든 국가에서든 조화를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발생할 수 없다. -126쪽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하낟. -155쪽
좀바르트는 사치란 특정 시대만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가가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치가 인간이 가진 허영,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원초적인 욕망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며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려고 한다. 비록 내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치가 진정한 의미의 사치가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 다시 말해 에로티즘과 관련된 관능적 활기를 수반해야 한다는 좀바르트의 지적이다. ....마침내 좀바르트는 19세기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원인들에 대해 베버와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생계 수단을 넘어서는 부가 축적되어야 한다.','성생활이 과거보다 자유로워야 한다','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계급적 구별 의식이 탄생해야 한다.'.'향락과 구별 의식이 기능할 수 있는 대두시가 충분히 발달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되면서 산업자본주의로 표방되는 '거대한 사치'의 세계가 서양에서 열렸다는 것, 이것이 좀바르트의 진단이다. -239쪽
한비자는 "덕은 득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얻는 대상은 사람이다. ...덕은 무력이나 재력과는 다른 능력이다. 무력이나 재력으로는 몸을 잡아둘 수 있을 뿐, 마음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지만 덕은 마음가지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덕이란 글자는 얻는다는 뜻의 득이란 글자오 ㅏ마음이란 뜻의 심이란 글자가 합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비는 도대체 어디에서 덕이 가진 놀라운 힘을 배웠던 것일까?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268쪽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끄록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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