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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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이나 모리스, 바우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디자인 사상들은 원래부터 그 배경에 약간의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러스킨과 모리스는 창조적 활동이 기계생산과 직결되어 경제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너무나 싫어했으며, 바우하우스의 탄생은 바이마르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으므로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적인 풍조가 바우하우스적인 사상을 낳게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디자인 개념의 배경에는 적어도 이상주의적인 사회 윤리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경제 원리의 강력한 자기장 속에서 그 이상을 관철할 힘은 약했다.
-17쪽

..아트와 디자인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아트는 개인이 사회를 마주 보는 개인적인 의사 표명으로 발생의 근원이 매우 사적인 데 있다. 따라서 아티스트 자신만이 그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이 아트의 고독함이면서 또 멋진 점이기도 하다. 물론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낸 표현을 해석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 표현들을 재미있게 해석하고 감상하고 평가하여 나아가 전시회 같은 것으로 재편집하여 지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티스트가 아닌 제삼자가 아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한편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그 동기가 개인의 자기 표출 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쪽에 발단이 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 디자인의 본질이 있다. 문제의 발단을 사회에 두기 때문에 그 계획이나 과정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도 디자이너와 같은 시점에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나 정신이 태어나고, 그것을 공유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감동이 바로 디자인의 매력이다.
-38쪽

우산꽃이라면 현관 앞 벽면에서 15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콘크리트 깊이 5밀리미터 정도의 홈을 파기만 하면 된다. 우산을 세워 두고 싶은 사람은 우산 끝을 고정할 수 있는 장소를 찾고, 그런 행위를 내다보고 새겨진 홈은 틀림없이 그것을 찾는 우산에 의해 발견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위를 치밀하게 탐구하면서 그곳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도록 디자인 하는 것이 후카사와의 방식이다. 이것은 어포던스(affordance)라는 새로운 인지이론을 연상시키는 사고방식이다. 어포던스는 행위의 주체뿐만 아니라 어떤 현상을 성립시키는 환경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나가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서다'라는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력'과 '어느 정도 딱딱한 지면'이 없으면 '서다'라는 행위는 실현되지 않는다. 무중력이면 몸이 붕 떠버릴 것이고 물이 깊은 수영장에서도 '서다'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경우 중력과 딱딱한 지면이 '서다'라는 행위를 이끌어 낸다(afford).. ...이와 같이 어떤 행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해 나가는 태도가 '어포던스'-62쪽

정보의 건축

나는 감각 혹은 이미지의 복합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디자이너는 수용자의 뇌 속에 정보를 건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건축은 다양한 감각 채널에서 들어오는 자극으로 만들어진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 나아가 그것들의 복합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극이 두뇌 속에서 재생되어 우리가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출현하다.

또한 이 두뇌 속의 건축에는 감각 기관에서 주어진 외부입력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깨어난 '기억'까지도 그 재료로 활용된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 주체가 의지적으로 과거를 반추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하여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기 위한 이미지의 모델링으로 작용한다. 즉 이미지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극과 그에 의해서 재생되는 과거의 기억이 두뇌 속에서 복합.연계된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이와 같은 복합적인 이미지의 생성을 전제로 하여 적극적으로 그 과정에 참여한다.
-73쪽



...물질성은 오히려 사라지고 영상이나 문자를 운반하는 추상적인 매개물로서 인식된다. 세계 3대 발명품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는 종이의 명예도 실제로 그러한 중립적인 미디어로서의 성질에 대한 것이지 손끝에 천연물이 닿는 즐거움을 전해 주는 물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오늘날의 종이는 미디어의 주역에서 내려와 실무적인 임무에서 해방된 덕분에 다시 본래의 '물질'로서 매력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107쪽

향수에 빠져 책을 편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디지털 미디어를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메일이 없으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정도로 이미 정보 기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때문에 종이 미디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무의식이 아니라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그것과 마주하려고 생각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등장한 덕분에 종이는 이제야 겨우 본래의 매력적인 소재로서의 역할을 마음껏 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미디어가 정보 전달의 실질적인 도구라면, 책은 '정보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책은, 종이라는 미디어를 선택한 이상 '그 물성을 어떻게 잘 살리고 있는가?'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종이에게는 행복한 과제이다.
-110쪽

자주 듣는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비판으로, 다른 나라의 자동차에 비해서 미의식이 부족하다거나 철학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분명 일부 유럽의 자동차에는 강한 자기주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자동차라는 제품에 담긴 생산자의 의욕이 느껴진다. 일본의 자동차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일본의 자동차는 일본인의 욕구만을 좇은 결과이므로 자아가 느껴지는 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매우 온후하며 순종적이다. 성능이 우수하고 연비도 좋고 고장도 적다.

일본의 자동차가 일본인의 눈에 얌전하게 보이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일본인의 욕망을 정밀하게 스캔하고 그것에 완벽하게 순종하는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일본의 자동차는 일본인의 자동차에 대한 욕망의 수준 그 자체이다. 마케팅이 정밀하게 이루어지는 한 제품은 그 메이커가 참여하고 있는 시장의 의식을 반영하며, 그 욕망의 수준이나 방향이 이들 제품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48쪽

넓은 시야로 형세를 판단하는 단서가 여기 있다. 즉 문제는 마케팅의 정밀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기업이 진출하는 시장의 욕망이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항시 주시하면서 그에 맞는 전략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의 상품이 인기를 얻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문제다. 브랜드는 가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하는 나라와 그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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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1-0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때요?

LAYLA 2012-01-04 20:27   좋아요 0 | URL
괜찮았습니다. 한 디자이너의 철학과 사고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부분이라 상당히 감탄하며 본 부분이 많네요.

Arch 2012-01-05 12: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하~ ^^ 글도 참 잘 쓰는 디자이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