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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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담은 기왕부터 부실해져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제 어미의 부은 맨발을 보고 그 자리서 혼절했다가 깨어난 뒤로 향이와 약국이 안팎으로 허물어져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불안했다. 향이를 잃을까 겁이 났다.
최약국을 그냥 살려두었다면 향이의 계모 또한 성한 채로 남아 있을지 몰랐다. 그랬다면 향이도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내 죄를 향이에게 토해야 했다. 제발 살아 있어만 달라 빌어야 했다. 담을 넘다가 다리를 상했다. 왼쪽 무릎이 옆으로 접히면서 꺾어지다시피 했다. 그때 난 소원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나도 향이처럼 되는 줄 알았다. 고장난 내 다리를 살피던 향이를 엉겁결에 품으면서 상투 끄트머리까지 치오르는 통증을 즐겼다. 다리를 아예 못 쓰게 해주십사 성주대감, 조왕신, 터주신,조상신, 삼신, 측신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었다.-99쪽

그후로도 몇 번의 월담은 용기 없는 자의 의식이었다. 내 손으로 내 다리를 결딴낼 수 없으니 다시 한번 기회가 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에 대한 신들의 수수방관함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향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같아지지 못해서 미안했다. 약국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약국과 살림채 사이 중문에 머리를 박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99쪽

나 병신 만들고 싶지 않음 어서 나와!
당장 나오지 않으면 자기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작두는 낡았지만 날은 아주 깨끗하게 잘 벼려져 있었다. 그래도 한 번에 잘라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껏해야 볏짚 같은 마른 풀줄기나 썰던 것이 두툼한 할에 뼈까지 한 번에 토막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인지, 수컷으로소 자기 소유의 암컷에게 갖는 집착인지 혼동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격정이었다. 젖먹던 힘까지 쓰는 게 아니라 먹었던 젖까지 다 끄집어내 흘리는 울음이었다. 한꺼번에 드러내지 말고 사는 동안 자잘하게 나누어주었더라면 내가 너의 삭막함에 골병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117쪽

차마 흘리지 못하고 삼킨 눈물이 속에 고여서는 몸을 움직일 적마다 출렁거렸다.-142쪽

내가 붉은 꽃을 들고 제풀에 서러운 사이 눈물방울들이 부뚜막 위로 떨어져 자글자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식간에 마르더니 흰색의 결정체가 되었다. 짠맛이 돌았다. 그걸 소금과 섞어 간을 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왠지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능소화 잎을 죽 위에 고명으로 얹고 있는 동안 정신이 든 오라버니가 처음으로 밥을 찾았다. 죽을 먹고 나서 오라버니가 울었다. 내 눈물이었다.-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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