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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 사랑 이야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4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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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라 푸아가 마치 성물이라도 만지듯이 경건하게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입 물어뜯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죄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그토록 많은 독실한 유대인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갔는데 나 혼자 이렇게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되는 것일까? -60p
...고맙게도 내 고통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여전히 한창이지. 우리가 잠불에서 고생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어. 당신은 못 믿겠지만, 헤르만, 난 이런 게 오히려 편하기도 해. 우리가 겪은 일들을 잊고 싶지 않거든. 방 안이 따뜻하면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을 배신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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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랑하기도 힘들다. 남자는 미국으로 건너와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치가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도망칠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아내에게 다정해질 수 없다. 불륜으로 만난 유부녀이지만 이 여자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는 건 홀로코스트에서 이놈 저놈에게 몸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더러운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머리 한구석에 박혀있고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옛아내와는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기도 힘들다. 그 힘들었던 시절을 같이 견딘 사람, 나의 바닥을 보았던 그 사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그래서 그의 연애사는 유대율법과 미국법을 모두 거스르며 세 여자와 불안한 줄타기를 한다.
저 유럽에서 보았던 시체더미들에 대한 죄책감, 같은 고통을 견뎌낸 이들에 대한 연민과 한편으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경멸감, 짧은 인생동안 너무 많은 걸 압축적으로 경험해버린 뒤의 무기력함, 스탈린과 히틀러를 만들어 낸 신의 창조성에 대한 냉소, 그리고 그렇게 악착같이 지켜낸 삶인데 이젠 사랑하며 즐거워지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망. 이 소설의 제목은 유대인의 고단한 인생역경과 거미줄처럼 엉킨 무수한 모순의 감정들 속에서의 애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냥 사랑만 하기엔 이들의 삶은 너무 복잡하고 깊고 슬프다.
너무 잘나서 관심가지고 싶지 않았던 소수자, 유대인. 그들의 구비구비 한 많은 역사를 '세 여자와 결혼한 남자'라는 희극에나 어울릴 법한 캐릭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의 능력이 경이롭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유대언어인 이디시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던 작가인데 책을 읽고나면 괜히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는 괜히 유대인이 아닌 것이다. 돈 많고 이기적이고 철저하게 장사꾼인 유대인들의 얼굴 뒤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마저 죄스러운 마음이 숨어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세계명작, 인류의 유산으로 꼽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