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인간의 반대물은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부정을 노예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유야말로 인간 존재의 전부라고 했다.-30쪽
그러나, 그 시대가 다시는 오기 힘들지도 모를, 독특하고 위대한 '세미나의 시대' 즉 자발적.공동체적 책 읽기의 시대라는 점은 움직일 수 없다. 소위 '명문대생'부터 '3류 대학생'까지, 남한 땅 동북 끝 강릉에서 서남단의 제주도까지, 대학뿐 아니라 공장.야학.교회.사찰에 다니던 셀 수 없이 많은 청춘들이 '세미나'에서 같이 읽었다. 심지어 재수학원 종합반 동기들의 독서 모임도 있었고, 고교 동문회에서 학습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 시대가 아니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숭고한 영성을 가진 이들도 있었고, 또는 그 시대의 기운이 아니라면 '변혁'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결국 그렇게 된) 소심하고 비루한 영혼을 가진 자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가히 '공부의 시대'이자 '책과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사회과학의 시대'나 '문학의 시대'는 저절로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겠다. 저 '같이 읽기'야말로 80년대식 책 읽기가 지닌 정치성의 핵심이며,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52쪽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책 읽기를 그르치거나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집중할 수가 없다', '안정적인 시간을 마련할 수가 없다' 외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이 많이 돌아온다. 비단 청년.대학생뿐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직장인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알아서 수행해야 하는 순간, 그들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 뭔가 끝없이 읽고 공부하고 있다. 경쟁에서 져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렇게 한다.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대다수는 스스로 자기 정신의 키를 낮추고 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한다. 그것이 당장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지만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루저로서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위너의 자리에 갈 가능성이 있는 소수의 인간들은 자본의 운동 원리에 자기 삶을 합체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배의 하수인이 되고 비인간으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도 스스로에게 부과되는 불안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위너 혹은 위너라고 착각하는 삶의 공허는 온갖 거짓된 장식물(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몇 가지 징표들)로 분장된-54쪽
그중 가장 초-물질적인 것이, 학연 따위의 '위너'끼리의 계약(우정으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한 가식적인 계약일 뿐인)이나 소망교회 신도증(한국적이며 현대적인 면죄부 발급 시스템)같은 것일 터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세속 (반)윤리의 틀, 즉 '루저'대 '위너'의 이분법과 그 명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한다. 필요한 일은 경쟁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다.-55쪽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듯이,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만 직접 전쟁에서 죽을 확률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은 20세기의 거의 모든 전쟁에 관여했지만, 한 세기 동안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죽은 미군 병사의 총수는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 죽은 한국인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죽을 확률이 0.1%에도 미치지 않는 군인과 죽을 확률이 10%가 넘는 사람을 같은 군인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를 전쟁의 피해자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전쟁, 비상계엄 선포로 작전 지역 내의 민간인과 병사들에 대한 권한이 거의 군주의 반열까지 오르는 현장 지휘관의 처지가 보급품을 제대로 -65쪽
공급받지 못해 민간인의 쌀독과 가축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병사들과 같은 정도로 비인간화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인간 세상에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66쪽
199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북한의 핵개발 관련 의제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또 2006년 용산의 미군기지 평택 이전을 둘러싸고 한국인들 내부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전쟁 상태는 외적인 전쟁 상태가 내부에서 진행된 것일 따름이었다. 각종 시민단체 집회에 나타나서 힘을 행사해 판을 깨는 열혈 노인들의 행태나, 신문의 하단을 장식하는 우익단체 광고에서 나타나는 험악하고 전투적인 언사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충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적을 없애야 내가 산다는 논리, 여차하면 동족을 살해할 수 있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73쪽
지구적인 무한 경쟁은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던 기업을 완전경쟁에 노출시켰으며, 최소한의 양심과 공정거래의 규범을 벗어던지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자유주의하의 무한 경쟁 시장에서도 법과 규범은 사치가 된다. -75쪽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정렴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예가 없었다고했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던 그에게는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144쪽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 영역은 소위 오타쿠라고 불리는 이들이 향유하는 서브컬쳐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논리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코드가 된 잉여 정서와 관련이 있다. 잉여라는 말은 이 시대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의미심장하다. 이전 시대의 루저 정서는 주로 학벌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의, 혹은 반발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잉여 정서는 학벌 사회에 순응한 이들의 것이다. 부모님들이 시키는 대로 꿈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 성적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그 결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어느 곳에도 취업할 전망이 없는 이들의 정서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공유하는 잉여정서는 자기 학대와 정치적 각성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문화적 감수성이다.-203쪽
지금의 청년들이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본가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다. 우리 사회에 그러한 조류는 IMF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 이후에 닥쳐왔다. IMF를 '극복'해 내는 동안 우리는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IMF이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빚을 졌지만 개인들은 저축을 하는 사회였다. IMF이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돈을 쌓아두지만 개인들은 빚을 내어 돈을 굴리는 사회로 변모했다. 개인은 안정된 직장에서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알콩달콩 삶을 꾸리는 소소한 행복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기업가적 마인드를 장착하고 담대한 마음올 투자하여 인생 역전을 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205쪽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객관화할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반성적 고찰만큼 치열한 저항의 방식이 있을까? 우상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디서든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이성은 과거 학생운동권들에게 요구되었던 것과 같은 윤리 의식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특권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던 과거의 대학생들과는 달리, 대학 진학률 86%시대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파악하는 이성이다. 그리고 우상과 이성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섣부른 근본주의나 간편한 냉소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려는 성찰 그 자체다.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그런 성찰 속에서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208쪽
...지금 우리사회 분위기가 도로 보수적인 분위기로 역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예요. '반동'이지요.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고 일어나는 게,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 항거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깨우쳐 나가면서 '아, 이것이 다만 우리들만의 생존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러한 사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운동이 바로 변혁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커다란 것들만이 변혁이 아니에요 -221쪽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리다니, 그거야말로 자본가의 극단적인 자기정당화의 이론화요.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비슷하지. 외화를 획득해 오지 않느냐. 그러니까 삼성 재벌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이야기인데, 집단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전혀 무시해 버리는 발언이야. 아주 위험한 사상이에요.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내 회사에 좋은 건 1만 명에게 좋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해도 좋다, 이런 생각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치판단을 지배잗르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가치판단이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져 버리는 겁니다. 비인간화, 소외된 인간,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런데 오히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그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편하게 살기 위해 자발적 동조, 굴종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돼지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224쪽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가냐고 물으시길래 그냥 돈 안 드는 짓이 그것밖에 없어서 숨만 쉬고 있다 했더니 웃으신다.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 야생마 같은 아이잖니?
스스로 항상 잉여인간에 청년 백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야생마가 되니 어쩐지 신이 난다. 똑같은 청년 실업에 잉여인간이라는 기분으로 괴로워할 젊은이들에게 뭔가 충고해 주실 말씀이 없냐고 여쭙자 계속 사양하시다가, 괴테 이야기를 꺼내셨다.
괴테도 말이야, 그런 요청을 받고 계속 거절을 했다지. 하지만 계속 부탁을 받으니까 거절하고 또 거절하다가 이렇게 말했지. 그래 알겠다. 충고를 하겠다. 단, 내 충고를 따르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만 충고를 하겠다. 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Simple life, high thinking'즉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포게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군
하지만 부자되세요의 주문이 여전한데 생활을 간소히 하는 것이 가능할까-234쪽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 설령 모자 500개, 넥타이 300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나?오히려 물질이 주인이 되고, 물질의 예속물이 되는 거야. 정신의 혁명이 필요해.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지.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강압과 사치와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타락이 중대한 병이야. 이 타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만큼 인간적.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 기품이 높아지게 되지. 악덕한 제도, 정치.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풍요 속에 매몰되지 말고,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과 결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를 상실하고 의식 없이 생활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지.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소비에서 낙을 찾으려고 하는 풍습이 많으니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의 인생은 그저 낙오자일 수밖에. 계속 낙오자의 길로만 걸어왔고.-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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