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구판절판


겨울이 긴 북구의 집들에겐 형광등 불빛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후 세 시면 컴컴해지는 기나긴 겨울밤을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 조명은 삶의질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형광등에 비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백열등의 조명기술은 꽤 오래된 문화다. 이는 초를 켜던 과거 오랜 관습의 연장이다 -16쪽

리추얼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도 바로 리추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지식인들은 깊이 고뇌했다. 도대체 이 엄청난 야만이 어떻게 독일에서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괴테, 쉴러, 베토벤의 나라 아니던가?
그들은 독일의 권위주의적 사회구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가족, 학교, 일터에서 반복되는 권위주의적 리추얼이 권력자에 대한 일방적 복종과 충성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 독일인들은 사회 구석구석에 남겨진 이 집단 리추얼을 철저하게 해체했다. 그래서 독일의 대학에는 졸업식이 없다. 졸업식 가운도 물론 없다. 졸업식을 집단으로 모여 권위를 확인하는 세리머니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그래서 한 번도 졸업식 가운을 입어본 적이 없다. 반성이 철저한 독일인들은 초등학교의 합창시간도 없앴다. 함께 노래하는 행위가 집단에 대한 무의식적인 충성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신 소리가 아주 착한 리코더를 불게한다. -29쪽

후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자신이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 그리고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차피 후회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짧게 하는 게 좋다. 그래야 심리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짧게 후회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확 저질러버리는 편이, 고민하며 주저하다가 포기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건강하다. 후회가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한 일은 반드시 오래, 아주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결혼을 망설이는 이들이게 한결같이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고 후회하는 편이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38쪽

뇌가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부위는 손과 입술, 혀의 순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끊임없이 만지고 싶은 것이다. 키스도 그래서 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뇌를 사용하여 느끼고 깊은 까닭이다. 뇌에서 차지하는 혀의 비중을 보면, 왜 혀를 사용해야 하는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입술만큼이나 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67쪽

불안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까닭이다. 모든 결과는 과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오직 결과만 가지고 서로 비교한다. -108쪽

사는게 재미있으면 일하는 게 재미있으면, 근면 . 성실하지 말라고 해도 근면. 성실해진다. 순서를 바꾸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인내가 쓰면, 열매도 쓰다. 도대체 열매의 단맛을 겪어봤어야 그 단맛을 즐길 것 아닌가. 21세기에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하다. 지금 사는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153쪽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재미있니?라고 하는 문장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일상적 용어가 되었다. 물론 재미라는 단어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재미가 아니다. 재미라는 단어 사용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나타난 문화현상이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fun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1쪽

서양이늗ㄹ에게 타인의 존재는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의 너다. 동등한 주체로서의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은 곧 나라는 주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곧바로 날씨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 너의 존재를 인정할 때 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거가 그의 책 '나와 너'에서 나라는 존재의 근거로 너와의 관계를 지적하고, 이 나와 너의 관계를 모든 의미구성의 기본 단위로 여기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문화적 맥락 때문이다.
한국인의 상호작용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 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타인이 일단 우리라고 하는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 타인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에게 절대 무례해서는 안되다. 우리라는-226쪽

경계선을 넘어오는 순간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나와 너라는 주체적 상호작용은 우리가 성립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를 지탱해왔던 우리라는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산업사회의 공동체 구성방식으로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존재근거가 되었던 우리라는 그 울타리가 변형되어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우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안적 우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존재 확인 방식이 없다는 이야기다. -227쪽

문화심리학적 시각에서 본다면 사회주의가 망한 이유눈 단순하다. 재미없어서다. 보다 재미있는 사회를 가능케 하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동경이 동독의 몰락을 가져왔다.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당시 동독은 절대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 이상이었다. 당시 한국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었다. 동독 사람들이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통일 후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들을 살펴보면 된다. 장벽을 뚫고 서독으로 넘어온 다음날부터, 서독 시내의 섹스숍은 동독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발그레한 얼굴로 섹스숍을 나서는 그들에게 기자들이 느낌을 묻자, 그들은 그랬다.
"망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오히려 사회주의가 망했다"-242쪽

어릴 적 꿈꿨던 일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충족되지 않는 어릴 적 욕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의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260쪽

내가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살아왔는지를 확인하려면 내 친구에게 물어본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내 친구에게 물어본다. 저사람 누구지요?/저 사람 잘나가는 회사의 전무에요
만약 내 친구들의 입에서 이런 식의 대답이 나온다면 내 미래는 곧 참담해진다. 지금 아무리 잘나가도 곧 망하게 되어있다.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게 되면, 그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고 아등바등하게 되어있다.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는 순간 내 존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즐겁고 재미있는 삶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삶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는,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는 어떠한 창의적 아이디어도 나올 수 없다. -266쪽

논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나 스스로를 망각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정말 놀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잘 논다는 것은 이렇게 나를 망각하고 말 그대로 정신없이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이렇게 정반대의 과정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내면의 항상성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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