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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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적어도 미래의 뉴랜드 아처 부인이 바보는 아니기를 바랐다. 젊은 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혼 여성드로가 어울릴 수 있도록 자신이 계몽적인 교류를 통해 사교술과 민첩한 재치를 발전시켜 줄 생각이었다. 여성들은 이런 기교로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남성을 장난스럽게 놀려 주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는 법이었다. 가끔씩은 거의 그럴 뻔하기도 했지만, 그가 자기 허영심의 밑바닥을 잘 살펴보았다면, 한때 그를 사로잡았던 매력적인 어느 유부녀만큼 자기 아내가 세상에 밝고 남의 호감을 사는 여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14쪽

당시 뉴욕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음식과 옷과 돈에 신경 쓰는 밍고트가와 맨슨 가 부류와, 여행,원예,훌륭한 소설에 돈을 아끼지 않고 속된 쾌락을 경시하는 아처.뉴랜드.밴 더 루이든 일족으로 크게 나뉘었다.-47쪽

그러나 그녀를 한번 슬쩍 훓어보면 이 모든 솔직함과 순진함이 단지 인공적으로 꾸며진 데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낙담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본능적으로 뒤틀린 교활함에 가득 차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62쪽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원칙이 늘 얼마나 단순했던가를 절감했다. 그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로 통했고, 가련한리만치 어리석은 솔리 러시워스 부인과의 밀애도 세상에 다 알려져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기분조차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워스 부인은 어리석고, 허영심 강하고, 원래 비밀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그의 매력이나 능력보다는 밀애에 따르는 비밀스러움과 위험에 훨씬 더 끌렸던 그렇고 그런 여자였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그 사건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즉, 그녀와의 정사는 그 또래 젊은이들 대다수가 한 번은 겪고 넘어가는 통과의례였고, 그런 경험을 통해 냉정한 양심과 확고한 신념으로 사랑하는 상대와, 즐기면서 불쌍히 여기는 상대 사이의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구분하게 된다. -122쪽

아처는 항상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는 타고난 성격에 비하면, 우연과 환경은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데에서 사소한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147쪽

"도대체 저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그녀의 눈부신 출현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똑같은 기대를 불러일으킬 때,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무릇 미인은 정작 스스로도 믿지 못할 때조차도 남자의 가슴에 확신을 일깨우는 법이다. -248쪽

아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자기 미래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끝없이 공허한 삶을 보내면서 아무런 사건도 겪지 않은 채 늙어 갈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스름이 깔리는 황량한 정원, 쓰러져 가는 집, 떡갈나무 숲을 둘러보았다. 올렌스카 부인을 꼭 찾아낼 것만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 가 버렸고, 분홍 양산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281쪽

막상 승객이 반쯤 찬 배의 좌석에 나란히 앉으니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아니면 그들이 하려는 말은 각자 고립되어 행복한 침묵에 빠져 있을 때에만 서로에게 가장 잘 전달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294쪽

"실현될 거라고 믿는다니 무슨 뜻인가요?"
"당신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소?"
"당신과 내가 함께 있게 되는 당신의 꿈 말인가요?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장소를 잘도 골랐군요"
"내 처의 브루엄을 타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럼 나가서 얘기할까요? 눈을 좀 맞아도 괜찮겠소?"
"아니에요 나가서 걷지는 않겠어요. 전 되도록 빨리 할머니께 가야하니까요. 그리고 내 옆에 앉아서 꿈 말고 현실을 보세요."
"현실이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요. 내게 유일한 현실은 이것뿐이오"
"그럼 당신 생각은 내가 당신의 정부가 되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당신의 아내는 될수 없으니"
그는 노골적인 질문에 흠칫 놀랐다. 상류계급의 여성들이라면 대화가 그런 주제에 바짝 접근할 때라도 그 말은 애써 피할 것이다. 그는 올렌스카 부인이 익숙하게 쓰는 어휘인 것처럼 그 말을 발음했음을 알아차렸고, 그녀가 도망쳐 온 몸서치쳐지는 삶에서는 면전에서 숱하게 쓰였던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갑자기 허를 찔린 듯 허둥거렸다.
"내가 바라는 건...난 어떻게든 그런 말, 그런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세계로 당신과 -356쪽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 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그녀는 다시 깔깔대고 웃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당신,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요? 그런 곳에 가 본적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곳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요. 그들은 모두 잘못된 역에서 내렸어요. 볼로뉴, 피사, 몬테카를로 같은 곳 말이죠. 그곳은 그들이 뒤에 두고 떠나온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더 작고 음침하고 난잡하다는 것만 빼고 말이죠."-356쪽

요컨대 그는 요즘 쓰는 말로 '선량한 시민'이었다. 뉴욕에서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자선 활동이나 시정, 예술 등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나 그의 의견을 구했고, 거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 했다. 장애 아동을 위한 최초의 학교 개교, 미술관 개편, 그롤리에 클럽 설립, 새 도서관 개관, 새 실내악단 구성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처에게 물어보라"고들 했다. 그의 전성기는 충만했고, 매일이 고상한 일로 빽빽이 채워졌다.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 볼 만한 삶이었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 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복권에는 셀수도 없는 많은 표가 있었지만 상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ㅇ르 생각 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라는 -425쪽

평을 받았고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가 옮은 폐렴으로 갑자기 죽었을 때에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들이 함께한 긴 세월을 통해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즁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426쪽

이제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관습 속으로 얼마나 깊이 가라앉아 버렸는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430쪽

"저기, 아버지, 올렌스카 부인은 어떤 분이었나요? 자, 솔직히 털어놔 보세요. 아버지랑 그분은 보통사이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었나요?"
"아름답다고? 모르겠다. 그녀는 달랐어"
"아 바로 그거였군요!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거죠. 척 보니 다르더라.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라도 제가 패니한테 바로 그런 걸 느꼈거든요"-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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