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읓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 P58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찾찾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손택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P64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