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파트에는 거울이 없다. 거울이 있다면 얼굴을 비춰보면서 주름살을 세고 그렇게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오십 년 전이나 사십 년 전, 아니면 육십 년 전 그때는 가을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알 고 있다. 내 생애의 에피소드에 또 다른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때 나는 거울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 P10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인생에는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 모으면 내 인생은 상당히 짧은 인생이 되었다. - P15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 P24
독단조차도 지속적으로는 제대로 교육받은 지성이 필요하다. - P35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놓쳐서 아쉬운 모든 것에 대해 위로받기 위해 매일 아침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덜 불행하게 흘러갔다면, 그래서 브라키오사우루스 아래의 그 자리가 동시에 몬태나였고 뉴저지였고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해들리에 있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이 되었던 일이없었다면, 그랬다면 프란츠가 그곳에서 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 P43
전쟁이 없다면 남자들도 여자들과 똑같이 그저 인간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용기와 기사의 충성심같이 남자들의 것으로 간주되는 일정한 특성들이 오직 전쟁을 통해 규정되고 미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남자들을 말살시킴으로써 그들을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그렇게 끔찍한 행위들을 저질러도 여자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자신들에게 있어서 군인다운 특성들이 최고의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P59
나는 자기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부모와 닮아간다는 당연한 위협에 대해 기겁을 했다. - P60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 P75
노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맞서 다양한 감정들을, 프란츠에 대한 자의 정열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고안해낸다. 동물 사랑, 어린이 사랑, 자연 사랑, 일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인간애, 음악애호, 일반적인 예술애호....교화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개를 사서 개를 사랑한다. 개가 죽으면 개를 새로 사서 그 개를 다시 사랑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쉬웠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에 나는 그 영원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사랑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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