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부의 삶 - 옛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남자의 뜻, 남자의 인생
임유경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품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서유규가 사촌 동생 유경에게 쓴 편지
지난 가을 가뭄이 7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지. 올해도 4월까지 계속 해서 비가 오지 않아 시내와 도랑은 다 말라 거북 등처럼 갈라졌더군. 농가에서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네. 장차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들이 대단했지. 다행히 5월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7월까지 계속되었네. 전날 말랐던 곳에 지금은 물이 넘쳐흐르고 거북 등처럼 갈라졌던 곳에는 개구리 떼가 살고 있다네. 강촌에 물이 넉넉해지니 생활도 예전으로 돌아왔네. 어제 우연히 이웃에 사는 박생과 함께 잠을 자게 되었네.밤이 깊어 비가 쏟아지는데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지더군. 낙숫물 소리가 귀를 때리고, 세찬 바람이 풍경을 거세게 울리고 창문을 드세게 흔들어대는 통에 엎치락뒤치락하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였네. 그러던 중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벌떡 일어나 박생을 흔들어 깨우고는 "자네는 오늘 이 비를 아는가? 이것은 옛사람의 문장일세"라고 크게 말했다네. 박생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에 상세히 말해주었지.
-51쪽

"지난날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오늘을 위해 쌓아두었던 것이고, 오늘 이 비는 지난날 쌓아둔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네. 오로지 오래 축적해야 지금처럼 모자람 없이 쏟아질 수 있는 법이지. 문장도 마찬가지야. 옛날 작가들은 모두 길게는 수십 년이요, 짦아도 십여 년이 되도록 학문을 쌓고 생각을 깊이 하여 콸콸 솟아 넘쳐나고 눌러도 다 없어지지 않은 연후에야 마침내 그것을 꺼내어 문장을 지었네. 그래서 그 말이 콸콸 쏟아지고 항상 촉촉하여 마르지 않았지. 그렇지 않고 없는 살림에 하루하루 쓸 거리를 맞춰 살다 보면 머지않아 부족하여 남에게 빌리고 표절하게 되니 어찌 굶주리지 않겠는가."-52쪽

참된 친구를 만나셨나요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쓴 편지
제가 평생토록 교유한 범위가 넓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격과 처지를 살펴 거의 다 친구르 사귀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허여한 이들이 때로는 명예를 좇고 권세에 빌붙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친구를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명예와 이익, 권세를 보았을 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저는 거친 풀숲에 숨어들어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요, 아내를 얻은 탁발승입니다. 산 높고 물 깊은이곳에서 명예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옛말에 "움직이면 비방은 받겠지만 그래도 명예는 따른다"고 하였으나 모두 빈말인것 같습니다. 겨우 한 줌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벌써 비방이 한 자만큼이나 따라와 있습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늙어서야 그런 이치를 깨닫습니다. 저 또한 젊어서는 헛된 이름을 얻고자 옛사람의 줄글을 훔치고 꾸며 칭찬과 명예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이름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비방은 산만 합니다. -75쪽

청성산 한 귀퉁이를 떼어주오
-김성일이 권호문에게 쓴 편지

우리가 헤어진 뒤로 봄기운이 일어나니, 지난해 청성산을 유람했던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구려, 티끌 속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그리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소. 요즈음 그대의 근황이 더욱더 좋으리라 생각하오. 나야 이 지경까지 낭패를 당하고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을 하겠소. 늦은 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그대는 청성산의 한쪽 구석을 떼어나에게 주실 수 있는지요.
꽃지고 낙엽 지는 것이 그대의 달력인데, 속세의 인간들이 보는 달력을 무엇에 쓰려 합니까. 그러나 오는 길에 부탁을 받았으니 한부 보내오. 이만 줄이오. -111쪽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 명나라 사람 이탁오가 한 말을 곰곰 생각해보자.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163쪽

한 끼를 배불리 먹으면 살이 찌고, 한 끼를 굶ㅇ면 마르는 것은 천한 짐승에게나 어울린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오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 일이 뜻대로 되면 금세 아이처럼 표정이 밝아진다. 근심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 감동과 분노, 사랑과 증오 등 온갖 감정들이 아침 저녁으로 변하니, 달관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느냐.
그러나 소동파는 "세속의 안목은 너무 비천하고, 하늘의 안목은 너무 고상하다"고 말했다. 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이 다를 바 없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지나치게 고상한 게 아니겠느냐.
아침에 햇빛을 받는 쪽은 저녁에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핀 꽃은 먼저 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운명의 수레는 재빨리 구르며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 점을 기억하고 세상에 뜻이 있다면 잠시의 재난을 이기지 못해 청운의 뜻까지 꺾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장부는 언제나 가을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상을 가슴에 품고 있어 천지가 좁아 보이고 우주도 내 손안에 있는 듯 가벼이 여겨야 한다.
-정약용이 아들 학유에게 쓴 편지-188쪽

하루는 저녁에 집주인 노파와 한담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선생은 글을 읽으신 분이니 이런 뜻을 아시겠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오히려 어머니가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은 왜 아버지는 중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대하도록 가르치셨을까요? 성도 아버지를 따르고, 복을 입을 때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너무 한 쪽으로만 기운 게 아닌가요?"
이에 나는 "일찍이 '아버지 날 낳으셨다'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나를 처음 태어나게 한 분으로 여긴 겁니다. 분명 어머니의 은혜도 깊지만 하늘의 으뜸인 탄생의 은혜를 더 중히 여긴 까닭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노파가"선생의 말씀이 꼭 옳지만은 않ㄹ습니다. 생각하건데, 초목에 비유한다면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씨앗이고, 어머니는 흙입니다. 씨악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베푼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할 수 있고 흙이 자양분을 주어 길러내는 공은 대단히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밤의 씨앗은 자라서 밤이 되고 벼의 종자는 자라서 벼가 되니 그 몸 전체를 -232쪽

이루고 있는 것은 흙의 기운이지만 결국에는 씨앗에 따라 종류가 가려지게 되어 있지요. 옛성인들이 가르침을 세워 예를 정할 때에도 이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며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밥 파는 노파가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헤아리고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기이하고 기이한 일입니다
-정약용이 형 약전에게 쓴 편지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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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땠어요? 저는 그냥 선비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 이상의 느낌은 안오던데.

LAYLA 2007-09-1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좋았어요^^ 가볍게 읽을수 있는 난이도이고 옛날 말씨를 원체 좋아해서요 ㅋ 가끔 눈물이 글썽여지는 글도 있습니다. 편지글이라 그런지 진심이 절절이 배어있거든요..^^

마늘빵 2007-09-12 09:3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너무 무덤덤하게 읽었나봐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