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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즈워스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평점 :
이 소설의 제목인 도즈워스를 처음 들었을 때 those words의 발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책의 주인공인 성공한 미국인 사업가 새뮤얼 도즈워스의 이름이다. 도즈워스는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제조업이 부흥하던 시기에 상업용 승용차를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50언저리가 되자 자신의 회사만큼 진지하거나 멋진 차를 만들지는 않지만 대량생산의 측면에서는 더 큰 경쟁력을 가진 회사에 사업을 매각하고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즈워스의 아내 프랜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던 시절, 그러니까 도즈워스가 자동차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때 만난 여인으로 순수하고 아이같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처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해본 적도 있는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의 프랜은 순수한 사랑으로 도즈워스를 택하고 도즈워스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을 택해준 프랜에게 보은하듯 충실하고 헌신적인 결혼생활을 한다. 그의 자동차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렸기에 도즈워스는 큰 저택을 짓고 유모와 하인을 들여 프랜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랜은 결혼하던 스무살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같은 외모와 마음을 지닌채로 마흔을 넘기게 된다. 도즈워스가 사업을 매각한 이후 유럽에 가자고 보챈 것은 프랜이다. 프랜은 더 늙기 전 마지막으로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그 장소로는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유럽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내 말 들어봐! 이번이 우리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 우리가 너무 늙어서 돌아다니기 싫어지기 전에 당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 기회를 잡자! “난 마흔에, 아니 마흔하나에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나를 서른다섯, 심지어 서른셋 이상으로 안 봐. 그리고 이 덜떨어진 도시에서 바보 같은 짓이나 하면서 영영 산다면 내게 인생은 끝난 셈이야! 그러지 않을래. 내 말은 그거야! 당신은 꼭 원한다면 여기 있어도 좋아. 하지만 나는 멋진 일을 할래. 나는 그럴 권리가 있어. 내겐 젊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5년이나 10년뿐이야. 마지막 탄창이라고. 그리고 난 그걸 허무하게 써버리지 않을 거야. 이해가 안 돼? 이해해줄 수 없어? 난 진심이야. 간절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애원할게. 아니, 아니야! 요구할 거야! 점잖고 빠르게 다녀오는 단체 관광 정도론 안 된다는 뜻이야!”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즈워스는 평생 자신의 일부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에 후련함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끼지만 보채는 아내에 떠밀려 유럽이 자신에게도 좋은 변화를 줄것이란 막연한 합리화를 하며 짐을 싸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달콤한 휴식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유럽여행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즈워스는 일과 성취로서 인정받던 미국에서의 자신이 유럽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프랜이 프랑스어로 통역을 해주지 않으면 택시기사를 부르거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가 인정해주고 말고를 떠나 빈둥대기만 하는 생활 자체가 고역이다. 반면 아내 프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만 고집하고 다람쥐 코트 같은 사치품을 사들이고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유럽의 저명인사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나날이 이어지며 도즈워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프랜의 속물성과 경박함을 인지하게 된다. 도즈워스의 상식으로는 물려받은 작위 외에는 별다른 성취 없이 빈둥거리며 지적인 사교라는 것만 하는 사람들이 영 사기꾼처럼 보인다. 반면 그의 아내 프랜은 그런 사람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백작부인'이라거나 '몰락한 귀족'이라는 단어에는 떨치기 힘든 낭만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프랜은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 식대며 리무진값을 모두 자신이 사용하고 아무렇지 않게 도즈워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자신의 남편은 아는 것이 없고 촌스럽고 지겹다는 식으로 대한다.
일반적인 요즘 독자의 기준에서 프랜의 행동은 과도하게 철이 없고 제멋대로이고, 반면 도즈워스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취에 걸맞지 않게 과도하게 소심하고 아내에게 휘둘린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 그 부분이었다. 도즈워스는 경제적으론 충분이 감당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둘이서 여행 내내 호텔의 스위트룸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방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위해 여기저기 호텔을 옮겨다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별 볼일 없는 사기꾼 같은 유럽의 저명인사들이지만 아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고 새벽까지 감기는 눈을 참으며 댄스파티를 다닌다. 자신은 이제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지만 아내가 아무것도 없는 몰락한 후작과 은근한 밀애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떠나기 싫다고 하자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혼자 다른 도시로 떠났다 다시 아내가 그리워 돌아온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프랜은 당당하고 그녀의 말에 기가 죽는 도즈워스의 모습은 가스라이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독자입장에선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도즈워스가 뭐가 아쉬워서???
결국, 프랜은 그 시대의 멍청한 소설속 여주인공들이 그렇듯(ref.인생의 베일) 불륜남과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당당히 도즈워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도즈워스는 끝까지 매달려보지만 사소한 호텔객실 예약 하나도 제 마음대로 해보지 못한 도즈워스가 유럽의 귀족이란 허울에 눈이 먼 프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둘은 헤어지고 도즈워스는 상심한 마음을 도저히 추스리지 못해, 그리고 미국에 돌아간다면 주변인들에게 받을 시선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럽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는데...
큰 줄기의 서사로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가 500페이지도 넘게 이어진다는 건 그만큼 서술이 상세하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한다는 것. 그만큼 지루한 측면도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웬만하면 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책을 (고생스럽더라도) 읽어보자는 나름의 결심이 있었던 터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은 뒤에야 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도즈워스와 프랜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미국과 유럽의 이야기, 그러니까 미국의 유럽에 대한 근거없는 동경과 멍청하리만치 일방적인 애정, 반면 그 실체는 별 볼일 없고 허영과 무위로 존재하는 유럽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도즈워스가 유럽에서 경험하는 일은 단순히 프랜과의 다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겪은 다양한 일을 읽을 땐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때로는 이런 것까지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완독을 한 이후에 보자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아주 작은 조각들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만의 특수성이 소설의 디테일로 그려져 있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주제가 아주 명확하며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대의 특수성이 21세기 독자가 독서를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미국은, 그리고 전세계인은 유럽을 얼마나 동경하는가? 지금도 유럽은, 얼마나 겉만 번지르르한가?
그렇게,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책으로 홍보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흥미를 느껴 읽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적으로는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점이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외로움에 절망한, 쉰이 넘은 나이에도 하는 행동은 젊은 베르테르 같은 로맨티스트 도즈워스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는지는 책으로 읽어보시길. (그렇다. 미국인들은 엄청난 실리주의자이지만 그 실리에 대한 추종과 열망이 너무도 강렬해서 도리어 순수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는 점...)
*재미있었던 게 하나 있는데, 미국인들이 주고 받는 농담에 유럽에 장기로 다녀온 친구에게 '얼음이 있는 미국이 그립지 않았던가?' 하는 농담이 있다는 것. 100년도 더 전에도 유럽은 얼음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이 돈을 쥐어주겠다 함에도 아아를 파는 것에 그리 소극적이라는 것이 정말...정말... 유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