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구판절판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상포르 <격언집> 1795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 100년 경-154쪽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철학사에서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예를 수도없이 찾아볼 수 있다.

-164쪽

러스킨은 쇼보다 300년 전에 미셸 드 몽테뉴는 비슷한 맥락에서 삶의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서, 한참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은 종자를 여럿 끌고 다니고, 아름다운 궁에 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 그를 둘러싼 것이지 그의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죽마를 떼어내고 그의 키를 재보라. 부와 장식을 벗기고 벌거벗은 몸을 보라...그에게는 어떤 종류의 영혼이 있는가? 그의 영혼은 아름다운가? 그 영혼은 능력이 있고, 행복하게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는가? 그 영혼의 부는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빌려온 것인가? 운은 관계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상업적인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 제기에서는 공통적으로 돈처럼 우연하게 분배되는 것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호소를 읽을 수 있다. 부와 미덕을 교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행을 중단하고, 사람을 판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죽마를 떼어내라는 것이다.-257쪽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질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그런 견해들은 자신만만하게 주창될 수도 있고, 나무나 하늘처럼 존재의 기본 구조에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어떤 정치적 관점에 따르면-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현실적 또는 심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자 만든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것은 지배적인 믿음들이 자신은 태양의 궤도처럼 인간의 손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공들여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자명한 것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주로 퍼뜨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배계급들이다. 그래서 지주 계급이 결정권을 쥔 사회에서는 툊에서 나오는 부가 본래 고귀하다는 개념을 주민 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이런 체제에서 손해를 보는 많은 사람들도 그런 개념을 받아들인다)반면 중상주의 사회에서는 기업가의 성취가 사회 구성원의 성공의 꿈을 지배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이 관념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277쪽

우리의 건강이 좋고 권력도 막강할 때는 우리를 칭찬하는 사람이 진짜 애정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어떤 이익을 노리고 그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하고 물어볼 용기 또는 냉소적 태도는 보여주기 힘들다. 그러나 병은 세속적 사랑의 조건을 제거하여 그런 구별이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297쪽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ㅎ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이 말이 강요된 물질적 상황보다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상황을 표현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363쪽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업이나 예술에서 경제적 또는 비평적 실패는 당사자의 인격에 대한 의미심장한 고발장 노릇을 한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의 노력에 공평하게 보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벌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볼 때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가장 지혜롭거나 가장 훌륭한 사람인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결함이 많은 청중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영합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와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시도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19세기의 많은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적 가치 기준으로 보자면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는 정치가나 예술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존경했다. 이런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이류 시인 토머스 채터튼으로, 그는 후원자들로부터 작품을 인정받지 못하여 가난에 시달린 끝에 1770년 열여덞 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1835년 파리에서 초연된 알프레드 드 비니의 희곡 <채터튼>은 이 젊은 시인을 보헤미아가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의 대변인으로 밖어 놓았다. 이 희곡은 전통보다 개인적 영감, 경제적 이익보다 친절, 합리성과 공리주의보다 집중과 광기를 찬양했다. 드비니의 메시지는 재능 있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은 부르주아적 공중의 아둔함 때문에 절망하고, 심지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우러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6쪽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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