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 P25
소네는 냉정한 사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네는 자기 삶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인간에게는 속아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을지 모르는데. - P50
노세 씨가 내 생활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픔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엄청난 아픔이 내 가슴을 조여오더라. 그때야 나는 내가 노세 씨의 사상과 행동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지. 토론하는 그의 뜨거운 몸짓을, 여유로운 밝은 웃음을, 문득 고개를 들 때 보이는 턱선의 젊디젊은 윤기를, 그리고 뺨과 목덜미에 보송보송한 아직 어린 그의 솜털을, 그러니까, 여름 아침의 산들바람, 가을 저녁 은행나무의 긴 그림자, 이른봄 새벽의 떨리는 공기처럼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 P163
2층 창가에 선 당신의 얼굴에 아래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있었어. 빛 그림자 탓일까. 반쯤 열린 유리창에 먼산을 보는 당신의 옆얼굴이 뜻밖에 또렷하게 비치는 거야. 아주 차가우면서도 쓸쓸한 시선으로 끝없는 저 너머를 보는 듯한 옆얼굴이었어. 그걸 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내 속의 피로를 느꼈어. 아, 피곤하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그 피로감이 갑자기 무거워져 온몸에 가라앉는 것 같았어. 속옷을 챙겨 입는 것조차 귀찮은 기분이 들더라고. 간신히 옷을 다 입고 돌아보니, 당신은 아직 담배를 피우면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런 피로는 그후 줄곧 나를 떠나지 않았어. 당신 품속에 나를 맡기고 녹아드는 안도감 속으로 빠져들 때도 역시 내 몸속 어딘가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거야. 아무리 깊은 잠도 그것을 달래주지 못했어. 되레 그것은잠 속까지 들어왔고 잠에서 깬 뒤에도 내 몸에는 피로감이 무겁게 남았어. - P174
나는 내게서 떠나지 않는 피로감의 의미를 깨달았어. 우리 사이, 우리의 생활은 무에 지나지 않는다. 날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생은 각자 다른 사실과 현상이 우연히 연속해서 일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무의미함 속에 나는 지쳐버렸다, 내 생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 없다. - P175
사람에게 과거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야. 그걸 부정한다는 건 그 안에서 태어나 자란 현재의 자신을 모두 부정하는 거라 생각해.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럼에도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미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 P177
나는 내가 당신에게, 그리고 예전에는 노세 씨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했다고는 생하지 않아. 우리 인간의 ㅇ활은 늘 아무런 의미도 는 망막한 세상의 심연 위에 노출된 채 빛이 바래가지. 또 자칫하면 그 끝없는 깊이 속에 빠져드릭도 하고. 아니, 그런 망막함 속에 표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생활일지도 몰라. 그럼에도 내 생활은 의미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어. 언제나 상대와 뭔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뭔가 공통된 의미를 갖고 싶다고 바란 것도 망막한 세상에 확실한 못을 박고 싶은, 그것을 한 개 한 개 박음으로써 단조로운 시간의 흐름이 아닌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었어. - P185
그때 나는 알았어. 비틀비틀 걷기 시작한 내 몸은 이미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내 마음과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P185
나이를 먹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지만, 역시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우리 세대는 분명 늙기 쉬운 세대다. 늙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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