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가지이 모토지로 단편선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안민희 옮김 / 북노마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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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그 사람의 높은 콧대를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 P33

그림자만큼 신비로운 건 없다고 K군은 이야기했습니다.
"당신도 한 번 해보면 분명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점점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거든요.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그림자인데 말입니다. 전등 불빛 같은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달빛이 가장 좋습니다." - P35

과학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처음 목소리를 가진 생물이 태어난 것은 석탁기의 양서류였다고 한다. 즉 개구리의 소리가 지구에 울려퍼진 첫 생명의 합창이었다고 생각하면 꽤나 장렬한 기분이 든다. - P58

이 마을로 돌아와 얼마 후에는 누군가 목매 자살한 끈을 가져와 ‘속는 셈 치고‘ 한번 달여 마셔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약을 추천한 사람은 나라에서 칠 기공을 하는 남자였는데, 그 끈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요시다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마을에 폐병을 앓는 홀아비 하나가 병세가 심해졌는데 돌봐줄 사람도 거의 없어서 다 무너져 가는 집에 홀로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얼마 전에 목매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빚을 여럿 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었다는 소문에 채권자들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에게 집을 빌려주었던 집주인이 채권자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소지품을 경매에 부쳐 처리하게 했다. 그런데 소지품 중 가장 비싼 값을 받은 것이 그 사람이 목을 맨 끈이었고, 그것을 한 마디 두 마디씩 사겠다는 사람이 불어 결국 집주인은 그 돈으로 조촐하게나마 장례식을 치렀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밀린 집세까지도 처리했다는 이야기였다. - P89

요시다가 병원에 온 후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간병인이라는 외로운 여성들의 무리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단순히 생활에 필요해서뿐만이 아니라 남편과 사별했다든가 나이가 들어 돌봐줄 사람이 없다든가, 뭔가 그러한 인생의 불운에 관련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라는 점을 관찰했는데, 어쩌면 이 아주머니도 가족이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지금 이렇게 간병인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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