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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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반년 가까이 케이시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가 몇 번인가 걸려와 통화는 했다. 제레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과묵한 피아노 조율사는 그 후 줄곧 웨스트 버지니ㅏ 주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장편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어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 한 누군가를 만나거나 외출을 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씩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했고, 집 밖으로 나가도 1킬로미터 범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 P33

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아오키를 이겨야 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아니었어요. 인생 그 자체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 자신이 경멸하고 모멸하는 상대에게 간단히 짓눌려 찌부러질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지요. - P90

얼음사나이가 창고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줄곧 혼자서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다. 원래 나는 바깥에 나돌아다니는 것보다 집 안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고, 혼자 있는 것을 별반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직 젊었고, 그런 아무 변화 없는 일상의 반복이 점점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지루함이 아니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반복성이었다. 그런 반복 속에서 어쩐지 나 자신이 반복되는 그림자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 P109

나는 운다. 내 눈물이 그의 뺨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는 잠에서 깨어나 나를 끌어안는다. 나쁜 꿈을 꿨어, 하고 나는 말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단지 꿈일 뿐이야, 하고 그는 말한다. 꿈은 과거에서 오는 거야. 미래에서 오는게 아니지. 꿈은 당신을 속박하거나 하지 않아. 당신이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지. 알겠어? 으응,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다. - P114

모던재즈 시대가 가고, 프리재즈 시대가 되고, 이제 일렉트릭 재즈 시대가 되었지만,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의 재즈를 계속 연주했다. 일류 연주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늘 일거리는 있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고, 주위에 여자도 많았다. 불만이 있는가 없는가의 관점에서 인생을 본다면, 그것은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이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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