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꾸미기 빛깔있는책들 - 즐거운 생활 81
뿌리깊은나무 / 대원사 / 199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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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에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이 책을 보았을 때, 흥미가 일긴 했지만 '디스플레이'용일 뿐 아직까지도 이 책이 유통되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 보아도 무척 오래된 책이고(마치 내가 어릴때 부모님 책장에 꽂혀있었을듯한 느낌) 내용도 80년대 주택 인테리어를 다루고 있다. 인스타와 핀터레스트와 오늘의 집을 통해 인테리어 레퍼런스를 차고 넘치게 접할 수 있는 2020년에 30년 전의 인테리어를 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정말 대단하게도 이 책은 1990년도에 초판을 찍고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었고 내가 인터넷 서점에 주문해서 받아본 책은 마치 갓 인쇄소에서 나온듯 반짝반짝 윤이 나기까지 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충격을 안겨준다. 1990년도의 문체가 너무도 옛스럽고, 그리고 너무도 옛스럽다 보니 되려 참신하게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애들이 80년대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소스로 삼아 뉴트로 풍으로 재미나게 재해석하던데 이책은 그런 풍조의 '글' 버전 소스로 쓰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야단스럽게 잔뜩 들여놔야 마음 편해 하는 요즈음 사람들은 이 욕심 없는 거실에서 배울 것이 참 많다.

베란다 쪽의 꾸밈이 아주 특색이 있다. ...반투명의 하얀 아크릴에 그림을 그려 매달 작정이다. 베란다의 이러한 꾸밈은 자칫하면 단조롭게 느껴질 거실에 싱그러운 생동감을 듬뿍 보충해 준다. 

부추꽃과 고사리류와 들풀을 거느린 그 소나무 옆에 커다란 맷돌이 놓여 있고, 서쪽의 붉은 벽돌의 담 앞에는 석등이 다소곳이 서 있다. 단순함, 담백함과 세련된 절제가 번뜩이는 매우 차분하고 운치있는 마당이다. ...그 공간들은 제각기 그 가운데 뜰 둘레를 도는 폭 일미터쯤의 조붓한 복도로써 연결된다.

또 대단한 점은 무척 촌스럽게만 느껴지는 80년대 시대에도 미감은 존재했으며, 심지어 지금의 미감과 본질적으로는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시대에 그걸 학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화자본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80년대라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평등하게 못살았던 시대쯤으로 막연히 생각했는데 지방에서 나와 내 이웃들이 연탄불 피우고 살 때 서울의 부잣집 사람들은 밀라노나 뉴욕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건축가나 디자이너 같은 직업을 가지고 지금 사람들이 직구를 해도 비싸다고 주저하는 고급 디자이너의 오리지널 가구들을 턱턱 사들였던 것이다. 벽에는 김환기나 김수근의 그림을 걸어두고서...또 탁자 위에는 삼국시대의 토기를 오브제로 놓아두고서. 


그리하여, 정리하여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그 시대의 프레임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미감은 어찌 실현되는가?를 구경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노란 장판은 그대로 놓아두고 조명을 갤러리처럼 간접으로만 꾸민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 고가구를 전통 보자기와 함께 매치함으로써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실현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미는 시대여행을 하는 재미.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은 일반인들도 있다지만 그 시대에 집을 이 정도로 꾸밀 문화자본과 진짜 자본이 있었다는 점에서 상류층들이었고 그렇다 보니 30년이 지난 지금 보면 그 업계의 탑이 되어 원로로 추앙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젊을 때, 갓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척박하고 못난 한국에서 어찌 자신의 공간을 꾸미고 살았나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지나가며 나오는 사소한 부분들도 주목해보면 무척 재미가 있다. 가령 예를 들면, 건축주가 대학을 갓 졸업한 누구에게 설계를 맡겨 지은 집이라 했는데 지금 그는 한국 건축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 되어 있다던지 하는... 


이들의 인테리어를 보며 아름답고 유니크하다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였는데 그 실체는 인스타그램이었다. 뉴욕에나 런던에서 호화롭게 생활하는 부잣집 자식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우리 할아버지 집 할머니 집, 이라며 은근슬쩍 찍어 올리는 그 집들이 바로 이 책에 담겨있는 그 집들이었다. 그 느낌, 올드하면서 나름의 일관된 미감으로 꾸며진 옛 평창동 방배동 주택들. 그래서, 이 책을 보는 감상은 아주 복합적이고 입체적이었다. 옛말씨가 좋고 그 시대의 미감이 재미있었다가, 그 시대에 이런 걸 할 여력이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사회구조와 계급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다가, 이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인생이란 무엇일까 같은 막연한 생각까지 쏟아져 나온다. 


재미있는 건, 이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김종학 씨는 일제가 아름다움을 아는 이 나라의 상류층을 제거해 버린 데에 오늘날의 미적 혼란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아름다움의 주권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요즈음은 어떠냐 하면, 아무리 애를 쓰고 만들어도 사장이나 관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집을 소개한 사람들이 어떤 배경으로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1990년에 이미 누군가의 2세로서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일제 시대에도 상류층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런 집단의 일부 손주손녀들은 인스타그램으로 정치적 지향도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친일 보수와 가까울 듯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게 아이러니, 아이러니,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들었다. (이건 김종학씨에 대한 이야기나 특정 인터뷰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계급과 집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책을 책장에 보관할 듯 하다. 그 시대에 장 뒤뷔페를 굳이 골라 벽에 걸어둔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서, 마치 박제하여 책 속에 숨겨두고 언제고 다시 꺼내보는 그러한 기분으로. 물론 이는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나름의 깨달음도 이책을 통해 얻었다. 미드센츄리 시대 빈티지 가구를 굳이 유럽에서 한국까지 수입하려고 노력하고 일본의 명품 가구를 구매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내 삶이, 취향이 나를 만든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취향의 껍데기 한꺼풀을 벗겨내면 본질적 욕망은 1990년의 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은 상당히 큰 것이었다.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달까?


그렇게, 무인양품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은 나에게 무척무척무척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세련된 안목이라는 것이 생활을 배반하면 그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 P21

박찬무 씨가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벽창호 같은 환경에도 그랬거니와 가끔 이웃끼리 오간다는 대화가 오로지 아파트 값에 쏠리는 풍경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 P48

그는 "가구를 으레 나무빛이나 밤색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고정 관념이 많으나, 사람마다 다 취향이 다른 것이고, 또 자기집인 만큼 자신을 갖고 "용감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빛깔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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