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홍콩
마가파이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누나에겐 결혼 후 5년 동안 총 다섯번 한밤중에 친정으로 달려온 씁쓸한 기록이 있다. 고부 사이가 좋지 않은데 남편이 늘 어머니 편을 드는 바람에 부부 싸움이 잦았다. 누나는 2대1로 싸우다가 도저히 못 견디면 친정으로 달려왔고 그때마다 매형이 데리러 올 때까지 사나흘씩 친정에서 지냈다. 나도 그럴 때마다 누나에게 이혼을 권했다. 그냥 헤어져. 마작을 쳐도 둘이 짜고 치면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겨. 빨리 포기하고 손 털고 나와. 평생을 잃고 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이번 판은 졌지만 좀 쉬다가 다른 테이블로 옮기면 지금까지 잃은 걸 만회할 수도 있어. 허관걸 노래에도 이런 가사가 있잖아? ‘인생은 도박판, 잃을지 얻을지는 아무도 몰라.‘제일 실패한 노름꾼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노름꾼이야. 패배를 인정해야 최후의 승자가 될 기회가 있지. - P14

"자유롭다고 꼭 즐거운 건 아니야. 중요한 그 자유를 가지고 뭘 하느냐지." - P15

인생이란 게 그래. 첫 발을 내딛기 전엔 두 번째 걸음을 어디로 내딛게 될지 몰라.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나면 또 자기도 모르게 세 번째 걸음을 내딛게 되고. 우린 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행복한가, 그거야. - P16

먹고사는 건 세상이 태평할 때도 중요하지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더 중요한 법이다. 혼자 먹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먹을 때 그래도 이 세상에 내 자리 하나는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84

중국이든 서양인이든 남자라면 모두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포부가 있다는 걸 록박초이도 알고 있었다. - P101

어렵게 동생을 만났으니 록박초이도 광저에 정착하기로 했다. 어차피 고향에는 가봤자 의미가 없고 홍콩에는 갈 수가 없었다. 사람은 강호를 떠다니며 산다고 했다. 강江도 호湖도 모두 물이고 물결이다. 물결이 데려다주는 대로 흘러가면 그만이다. - P163

마음 속에 귀신이 있으면, 세상 어딜 가든 귀신이 있는 법이다. - P301

몇 주 동안 강제로 문을 닫았던 도박관가 유곽이 다시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저쟁 때 받았던 고통을 전쟁 후에 보상받으려는 듯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라도 노름을 하고 매춘을 했다. 너는 내게 빚을 지고, 나는 그에게 빚을 진다. 이건 낙관적인 기대를 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모든 고통이 머지않아 지나갈 것이며 너도, 나도, 또 그도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 P391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 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사고팔았다. 그날그날이 한평생이고, 내일의 윤회는 내일의 인과응보일 뿐 오늘은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듯했다. - P397

뻐드렁놈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남초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한겨울 들불에 그을린 논바닥처럼 새까만 얼굴 위에 우뚝 솟은 콧대가 논 가운데 서 있는 고목처럼 스산하고 처량했다. 뻐드렁놈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고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록남초이가 옆얼굴을 뻐드렁놈에게 향한 채 한참동안 침묵했다. 속눈썹이 속절없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흐느낄 힘도 없이 슬퍼하는 까마귀 같았다. 오랜 침묵 끝에 록남초이가 몸을 일으켜 벽 귀퉁이로 다가갔다. 벽 귀퉁이에 갑자기 문이 생겨 도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보이지 않는 얼굴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벽을 만졌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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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4 0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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