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이모 집 근처에 살던 사이 좋은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기 전에 나는 네 옆을 떠나고 싶지 않으니 죽으면 마당에 묻어 달라고 했대요. 부인은 그 말대로 마당에 묻었지만 그건 볍률 위반이라고 합니다. 묘지 이외의 장소에 매장해서는 안 된대요. 법률은 무정합니다. - P46

아기가 나온 순간 저는 곧 그를 사랑습니다. 그리고 쪼글쪼글한 아기가 벌써 유달리 씩씩하고 잘 생기고 남자답고 장하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져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 어떻게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그때 저는 이 세상에 없으니-다시 울었습니다. - P66

부인이 아주 훌륭하세요. 아이 두 명과 욕심 많고 까다로운 남편이 있는데도 예술에 매진하고 계시니까요. 부디 되도록 큰 욕심을 가지고 부인을 도와주세요. - P78

저는 아홉 살 아이의 어미라서 여행도 못 가요. 시끄러운 도쿄 한복판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사과 같은 것도 사야 해서 차를 몰고 서둘러 집에 가요. 많이 바쁘지 않을 때는 돈도 없는데 500엔을 내고 고속도로를 타요. 고속도로는 빌딩과 빌딩 사이에 스파게티처럼 뻗어 있어요. 너저분한 회색 경치가 계속되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고속도로가 숲 속에 들어가요. 그러면 그 숲 저쪽에 나지막한 산과 노을로 물든 하늘이 보이는데 그럴 때 저는 여행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 한순간을 위해, 저는 500엔을 내요. 그 순간이 깨진 유리병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조각처럼 위태로워서 저는 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됩니다. 그것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완벽해져요. 항상 진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미스터 최는 이해 못 하실 거예요. 그 순간, 저는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동남아시아의 미남 청년을 상대로 바람을 피워요. - P81

낯선, 아니면 낯익은 남자들과 아름다운 또는 아름답지 않은 강의 다리를 건너고, 불결한 거리를, 안개가 자욱이 낀 오래된 거리를 걷습니다. 고속도로가 다시 회색 빌딩을 달리게 되면 여행은 끝이에요. 언제든 ‘그 그리운 베를린‘이나 브뤼헐의 그림이 있는 미술관을 찾을 수 있는 미스터 최의 여행에 비해서 제 여행은 얼마나 불운한지. 아니, 진짜가 아니니 불운하다는 표현조차 쓸 수 없는 여행을,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아요. 이래도 저는 사는 것의 천재일까요? - P82

요즘은 인생에 행운도 불운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떤 기질을 타고날지가 중요한데, 이것만은 운이 좌우합니다. ‘행복‘은 상황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행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와요. 그리고 ‘행복‘은 자각이 없는 사람에게만 찾아오고 사물을 깊이 추구하려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아요. 미스터 최, 당신에게는 결코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몇 번 태어나도 고뇌하는 영혼이 될 거에요. 비록 남이 부러워하는 상황에 있어도, 부귀와 명성과 명예와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어도, 당신은 결코 만족하지 못해요. - P93

이봐요, 미스터 최. 독일에 있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왜 독일이 철학자를 많이 배출하는지를.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 문제를 생각한 거예요. 이탈리아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지 않고도 잘 알고 있어요. - P103

결론을 말씀드리면, 모든 사랑은 환상 위에 성립합니다. 큰 환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더 거대한 환상으로 키울 능력이 있어요. 문득 제정신이 들어서는 안 돼요. - P120

진정한 국제 친선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욕하면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이 한 명을 담당하면 충분할 것 같아요. -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