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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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언제나 아잇적에 보았던 인물을 어른이 되어 만나면 누구나 실망하게 되는지. 미래가 확정되지 않은 데서 오는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전혀 담기지 않은 아이의 영리함이며 순진함이며가 그야말로 덧없이 사라지고, 성인이 되면서 어느 결에 좀 피로한 듯한 교활함이 살갗에 실리는 것이다. -76쪽

윤희에게
처음 여기 오던 밤에 나는 뺑끼통 위에 올라서서 먼 어둠속 허공에 몇점씩 빛나는 별을 보았소. 별인 줄 알았다가 산동네 가난한 창에서 보내는 불빛임을 이튿날에사 알아보았소. 초저녁에는 산허리에 불빛이 가득하더니 밤이 깊고 새벽이 가까울수록 한점 두점 사라져 저만큼 하나, 다시 저어만큼 하나씩. 그제사 창이 다시 별이 되는 연유를 새겨봅니다. 잠들지 못한 마음 별이 되는 지금, 내 것도 저기서는 별이 되겠지요.-78쪽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청춘이 깃들인 사진 두 장을 간직하고 있어요. 하나는 동경 유학시절의 모습인데 사각모에 망또를 걸치고 있어요. 누렇게 퇴색한 옛날 사진의 인물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른스럽고 무슨 현자처럼 은근한 권위가 있어 보이는 걸까. 아버지는 그 시절에 고작 칸트나 헤겔 또는 호이어바흐에서 이 사진을 찍을 무렵에야 막 엥겔스와 맑스로 넘어갔을 텐데. 칸다의 고서점 골목에서 문고판 '자본'이나 '선언'을 찾아 읽었겠지요. -83쪽

다음달에 같이 유학갈 거야.
그는 자기 약혼녀에 관해서 성의를 가지고 설명을 했어요. 뭐 빤하잖아요. 멜로영화에 많이 나오는 줄거리. 흔하다는 건 바로 당대 생화르이 반영이라면서요? 장래를 촉망받는 가난한 젊은이와 부잣집 따님의 결혼이며 유학이며 그리고 과거와의 결별.

고마웠어
나는 그를 잠시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곤 나직하게 물었지요.
뭐가요.....?
나한테 잘해줘서.
나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어요.
형, 씩씩하게 잘살아.
이렇게 우리의 영화 한편이 끝났습니다. 내가 이런 얘길 세세하게 적어놓는 건 그 시대의 꿈입네 야망이네 성공이네 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인생의 시시함에 대해서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에요.-137쪽

너두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지 않니.
네, 어려서는 그랬어요. 아무것두 몰랐으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악마처럼 생각했거든요.
너희들이 책도 많이 읽고 세계사도 알게 되고 할 때까지 나두 아무말 않고 기다려운 셈이로구나. 그래...세계는 끊임없이 변해갈 테지. 우리두 그런 변화의 먼지 같은 일부분이었다.
아버지는 말을 하다가 피로해졌는지 점점 가늘어지고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이내 잠에 곯아떨어지곤 ?지요.
이건 우리의 세계가 아니야.
네 ? 아버지, 뭐라구요?
너의 길을 걸어라, 세상이 어떻게 떠들든지...
어딜 가신다구요?
가야지...
그러고는 그냥 잠으로 빠져드는 거였죠. -146쪽

얘, 글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무렵이 되면 자기 잘못을 정확히 알게 되고 또 자신을 용서하게 되더구나. 나는 절대로 그때를 후회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그런 길밖에 없었을까 하구 생각해볼 때가 많아. 그래, 세상에서 지어낸 삼라만상은 부처님 말씀처럼 세상이 지닌 한계만큼의 꼴로 나타나게 마련이지. 내 동료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그저 허공중에 빛나는 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양쪽을 보니까 서로 거울을 맞대놓은 듯이 그저 사람살이의 좌우가 바뀐데 지나지 않았어. 싸우는 동안에 서로를 닮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람세상의 이 미완은 멋있지 않니? 미처 해내기 전에 같은 무렵에 살던 모두가 죽어버리니까. 불교에서 그걸 뭐라고 하더라. 백년 후에는 현재 세상에 살고 있던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댄다. 그맘때 사람들은 모두가 새사람들이지. 그렇게 거듭된단다. -147쪽

아버지, 요새는 땡감이 없대요. 카바이드인가 뭔가로 아예 떪은 감을 연시로 만든다던데 뭐.
응, 그래야 상품이 되겠구나. 촌에는 있겠지.
요즘은 애들두 그런 건 안 먹을 거예요.
아버지는 단감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하면서 들여다보았어요.
아버지, 감을 잡수시려는 게 아니라 감상하려구 그러시죠?
왜, 그러면 안된다던? 가을이 보이잖니.-152쪽

갑자기 엄청난 무렵감이 나를 엄습했다. 동우는 자리를 잘 잡았는지. 도대체 한줌도 안되는 젊은것들인 우리는 이 아리따운 순정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지.-186쪽

경자라는 아가씨가 또 있었는데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이 가늘고 몸매도 뚱뚱했다. 처음 인사할 때 어찌나 얼굴이 빨개지던지 양쪽 귀에 꽃이 피는 것 같았다.-190쪽

아마도 형사들인 것 같던데 서울까지 날 따라왔었어요. 박형이 무슨 말 없었어요?
순옥이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박씨 오빠 말은 별루 들어보지 못했어요. 근데 명순이가 어제 그랬어요. 오씨가 아무래도 막일할 사람 같지 않다구요. 말투나 얼굴이나 이 동네 올 사람이 아니더라구 그랬어요. 그건 저두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봉제공장에서두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여자대학생이 몰래 취업했다가 잡혀간 적이 있어서.
가슴에 무엇인간 묵직한 덩어리가 치미는 것만 같았다. 아아,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뒤처져 있는 것이다. 지식인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눈에 뜨거운 물기가 고였ㄷ. 그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끊었다. 순옥이가 물었다.
무엇때문에 그런 일을 하죠? 남들은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국민학교두 못 마치구 일하러 서울로 오는데
댁에 부모님들이나 순옥씨하구 친구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두 왜 못살죠?
그야 .........가난해서 그렇지요.
왜 가난한가요?
첨부터 가진 게 없었으니까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저축도 하고 밑천에 생겨야 하잖아요?
배우지 못했으니까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렇잖아요.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어두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수 있는 세상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순옥은 말문이 막힌 듯 잠깐 침묵했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순옥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건.......너무 어려운 일이에요.-200쪽

우리는 함께 일어섰다. 박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오형아, 자네가 이해해라. 요새 말야 불온분자 신고하면 쌀배급을 주거든.
얼마나 주는데....
한 세 말쯤 줄거야
나는 다시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됐지 뭐, 쌀 서말이면 한식구 살 만하겠지. -204쪽

봄은 그야말로 덧없이 가버렸다. 그와 만난 지 석달이 넘었을 무렵에야 우리는 서로 익숙해졌다. 아가도 태어난 지 백일이 되면 한사람의 목숨으로 받아들여주고 기도를 하여도 백일이 되면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했다. -210쪽

뭣 땜에 사는지 모르겠어.
하고 나서 혜순은 두 손을 내리고 물기로 얼룩진 얼굴을 쳐들며 나에게 말했다.
형, 우리 이젠 그만두자. 지들 천년만년 해처먹으라고!
나와 최도 둘 다 눈알이 벌게져 있었다. 우리는 쫓기듯이 천을 들치며 국밥집에서 나왔고 등뒤에서 혜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 나타나지 말구...형, 잘 가.
그리고 나는 그네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자도 건이가 징역을 살던 긴 세월 동안에 취직도 다시 했고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 안산에서 산다던가. 사는 조건이 지식인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열악했던 그들은 잊혀지고 저희 혼자서들 감당하며 고난을 견디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들의 넉넉한 따뜻함과 시대 속에서 잊혀지고야 말 익명에도 당당했던 청춘을.-212쪽

윤희는 손을 놀리면서 무심한 듯한 투로 말했다.
나 신문 봤어요.
길뫼에서 이런 살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외부세계를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나는 가끔씩 라디오의 뉴스를 듣고 있었지만 배달하는 이가 규칙적으로 집을 방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신문은 구독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딘가 조금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라디오 뉴스를 듣는 일도 번거롭고 부담스런 노릇이 되어서 그마저 듣지 않으니 차츰 편해졌다.
학교에서 우연히 봤는데........
하는 수 없이 나도 말했다.
나두 봤어. 읍내 중국집에 짜장면 먹으로 갔다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왜 나한테 말 안했어요?
그대가 걱정하실까봐.-252쪽

그래요, 사는 일에는 에누리가 없지요.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든 끌어안고 겪는 이에게만 꼭 그만큼 삶은 자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차례 차례로 내놓거든요.-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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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2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문장들이 많네요. 문체가 안정적이고 흡인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