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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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정당제 및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이른바 반혁명죄로 기소되어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꾸바의 어느 수학교수를 위한 탄원문에서, 빠리 과학아카데미의 원장은 피델 까스트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는데, 나에게도 의미심장하게 와닿았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품었단 찬란했던 희망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란 다름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수억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기 위하여 아홉 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죽이는 데는 단 한순간으로 족하며 또한 아주 간단한 족쇄로 그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21세기의 벽두에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행위는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 행위는 인간의 가장 나쁜 재앙 중의 하나입니다. -209쪽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하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단다. 아니,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단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이든 민족의 과거이든....-226쪽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는 라 서당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 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도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 소리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 하고.-237쪽

삐라를 뿌렸던 장소에 다시 돌아가는 일은 금지되었으나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나는 10분쯤 뒤에 현장에 가보았었다. 우리들이 뿌린 삐라는 그대로 보도에 흩어져 있었고 누구 한 사람 읽어보겠다고 집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다 집어든 사람은 잠깐 일별하더니 뜨거운 감자라도 만졌다는 듯 곧 팽개쳤다. 유신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는 바로 잡혀가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압도되어 있었고 또 서로 불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증오 이데올로기는 바로 공포였고 또 그 그물망은 아주 촘촘했다. 보도에 흩어져있는 삐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내 마음은 당시의 공기처럼 무거워졌다. 사람들이 흥미없어 길바닥에 내버린 광고지를 밟고 지나가듯 우리들이 뿌린 삐라를 밟고 지나갈 땐 흡사 내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처연한 기분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젊은이 하나가 삐라 한 장을 슬쩍 집어들어 읽지도 않은 채 뛰더니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뛰면서 삐라를 슬쩍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그것이 삐라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젊은이가 너무 고마웠다.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우리의 행동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설사 그런 사람이 없다 해도 우리는 계속 삐라를 뿌렸을 것이다. 그 행동 자체로 우리에겐 이미 큰 의미가 있었다.-265쪽

빠리지앵들은 일년에 한두 번씩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지하철 파업이 그것이다. 빠리의 지하철노조는 다른 사업체 노조와 마찬가지로 복수노조이다. 그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당에 가까운 '프랑스민주노동동맹' 공산당에 가까운 '노동총동맹'그리고 '노동자의 힙'과 가톨릭계의 '프랑스기독노동자동맹'등으로 다양하고 또 비노조원도 있다. 이와같은 노조의 구조도 똘레랑스 사회의 특징이라 하 룻 있다. 이들 각 노조들의 파업참가 여부에 따라 파업의 심각성이 결정되는데 전 노조가 파업을 결의하고 비노조원까지 합세하면 지하철 전체가 완전히 정지하여 빠리 시내의 교통은 완전 마비상태에 이른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시가지가 온통 자동차와 사람들로 메워지고 합승을 제의하거나 요구하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택시 합승도 있게된다. 이런 기현상에 웃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지만 모통 30분이면 가능한 출근 시간이 두세 시간씩 걸려 시간 허비와 불편으로 불만의 소리가 당연히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불평들 사이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꼭 들어있다 "우리 이용자가 불편을 겪는다고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데 동의하면 언젠가 그 제한의 목소리가 바로 우리에게도 닥칠 것이다"-305쪽

미떼랑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유독 극우파들은 사형제도를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주 흥미있는 발견을 하였다. 즉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아의 낙태수술에는 결사코 반대한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낙태수술에는 찬동하고 있었는데, 이 겹모순의 해답은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그리고 '사회의 책임'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서 찾아질 것이다. -208쪽

난 능력도 부족하겠지만 처음부터 꼭 학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았아요.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는 하지 ㅇ낳아요. 내가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일 뿐이니까.-131쪽

나의 아내는 가게의 점원이 되어 일할 수 있었다. 주로 일본인과 한국인 관고아객을 대상으로 화장품 등의 선물용품을 면세하여 파는 가게인데 이런 가게의 주인은 거의 유태인들이었다. 아내의 일이 주로 한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주인이 나의 문제를 알면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나의 문제를 감추어야 했고 우리의 특이한 노동허가증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한참 동안 정식채용이 될 수 없어 봉급도 박했고 사회보장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아내의 벌이만으로 생활이 아니라 생존도 어려웠다. 아직 철없던 때 맏딸 수현이가 "왜 우유 안 사?" 하고 붇던 일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우리는 그때 우유를 안 산 게 아니었다. 그런 때였었다. 김지하 선배가 인편에 난초 그림 열 점을 보내주었던 것은. 나는 한 점도 간직하지 못하고 모두 팔았다.-65쪽

나는 집에 돌아와 첫날의 수입을 찬찬히 세보았다. 768프랑이었다. 다시 한번 더 세보았다, 역시 768프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편이었다. 계산을 맞춰보니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한다면 1500프랑 정도, 그리고 한 달에 6.7천 프랑의 순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초보자라 손님이 별로 없는 택시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린다든지 하는 착오도 있을 테니, 조금 시간이 지나 경험을 쌓게 되면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생겼다. 그러나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하게끔 몸이 견뎌줄 수 있을지 하는 걱정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피로한 몸으로 새벽 5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쉽게 잠 못 이루고 온갖 상념에 젖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자문하고 있었다. "과연 책을 읽을 시간이 있을까? 논문 쓰는 것은 포기했다고 해도 책은 읽어야 할 텐데..." 잠을 청했다. 날이 벌써 훤하게 밝아 있었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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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1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세화는 이리봐도 저리봐도 천상 '학자풍'인 사람이죠?
그래서 어쩔땐 '참 순진하구나'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209페이지의 편지글은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네요.
거기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거든요.

LAYLA 2007-03-1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진...아직 세상에 안나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택시일 하고 잠들기 전에 책 읽어야 할텐데 하고 걱정하는게 아마도 순진.하다고 불리는 그런거겠죠? 근데 그게 너무 좋더라구요. 막 눈물났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