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11월
구판절판


배가 부두에 매여있다고 믿는 것, 그게 바로 덫이다. 우리는 남남으로 만나 특별한 사이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고 신뢰를 쌓고 미래를 약속한다. 그런 다음 모험을 간행한다. 집을 사고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 방을 온통 분홍빛으로 꾸미고 밤마다 끌어안고 잠을 잔다. 그러면서 그 남남의 하나됨에 경탄한다. 남편과 내가 예전에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안다'라고 말했던 그 은근한 묵계의 경지에 경탄한다. 사실, 우리도 행복할 때는 그런 말을 하며 살았다. 예전보다는 약간 덜 행복하다고 느낄 때까지도...우리가 행복한 게 당연하다고 믿는 것, 그게 바로 덫이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우리가 좌우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일쑤니 말이다. 우리 인생은 우리 뜻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더 일찍 그 점을 깨닫는 것이다. '더 일찍'이라는 게 언제인가? 그냥 더 일찍. -50쪽

마흔두살...그 나이에 인생에서 무얼 기대하겠어?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 일밖에는 할 게 없었어. 그냥 죽어라고 일만 했지. 일은 나의 위장이자 갑옷이자 알리바이였어.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였어.-101쪽

"홍콩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비행기 타는 게 두렵지 않았어. 나는 생각했지. 이 비행기가 폭발할 수도 있고 한낱 돌덩이처럼 추락하여 박살이 날 수 있지만, 난 상관없어, 하고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왜냐고?"
"네.....저 같으면 반대로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저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에요 '이제 나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할 이유가 생겼다. 비행기야, 제발 추락하지 말고 무사히 가 다오!'하고 말이에요"
-160쪽

나는 조금 괴롭다고 해서 모든 걸 망쳐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어. 헤어지는 게 괴롭다고 해서 계속 함께 살다가 평생을 망쳐 버리는 사람들 말이야..그래 내 나이쯤 되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 그들이 아직까지 함께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줄 아니? 그들은 보잘것없는 거멀못에 의지하고 있는 거야. 자기들의 생기 없는 삶에 기대고 있는 거라고. 온갖 타협을 거치고 갖가지 갈등을 이겨낸 결과가 고작 그것인 셈이지...훌륭해,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야!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 꿈, 친구등 모든 것을 땅에 묻었어. 그리고 이제 곧 그들이 묻힐 차례가 될 거야. 훌륭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야. -171쪽

그들은 일종의 은퇴자야...모든 것에서 은퇴한 사람들이지.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해. 내 말 듣고 있니? 나는 그들이 싫어.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이미지를 보기 때문이야.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만족감에 빠져 있어. '우리는 꿋꿋하게 잘 벼텨왔어'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잘 버텨온 대가가 뭐지? 아쉬움 회한 상처 비겁자의 낙인이야. 그런것들은 아물지 않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스러지지 않아. 황금 사과가 열리는 헤스페리스의 뜰에서 아무리 행복하게 산다 해도 사진을 찍기 위해 증손자들까지 그들 주위에 앉아 있다 해도 퀴즈 프로그램의 문제들을 척척 맞추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거야-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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