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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나는 올가 토카르추크 작품들을 관통하는 수수께끼 같은 은유들에 , 그녀만의 세계관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끌렸었고, 빅팬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이해안갔던 은유들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렸고 , 그녀가 풀어놓은 독서이력이 내 취향과 상당수 겹쳐져 내가 그토록 끌렸던 의문이 풀렸다. ㅎ
<메탁시의 영토들>이 그녀가 은유로 풀어내던 경계와 비경계의 교차점이자, 다정한 서술자이자, 사인칭 서술자인 파놉티콘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만든 신조어 ‘오그노즈야‘ 가 바로 초인지적인 상태로 인간심리를 다층적, 복합적으로 이해하고,한발 뒤로 물러서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태도이자, 이 글의 핵심어인 것 같다.
다정한 사인칭 서술자인 그녀의 영감의 원천이 오그노즈야적인 존재이고, 저절로 써지는 글들 사이에서 그녀는, 서술자의 시각으로 자아를 바라보게 되는 희열을 맛본다.
밑줄그을것이 너무 많았지만,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고찰은 <방랑자들>에서도 나왔던 ‘카이로스‘와 ‘낯설게 바라보기‘, 그녀가 글을 쓸때 영감을 받는 목소리자 사인칭 서술자인 ‘옌타‘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옌타를 사인칭 서술자, 총체적인 이야기꾼이라고 불렀고,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된 나자신을 발견한 순간 전율을 맛보았습니다˝
<야쿠프의 서>도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다.
저자의 탈중심주의는 세상을 카이로스적인 순간의 선택으로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에의 강요다. 예를 들면 동물보호, 육식금지, 신상품구매중독에서 벗어남 등등 공동체적 습관으로부터의 탈피다. 아래 카이로스에 대한 정리이다.
1. <플라마리옹의 목각화>는 카이로스적인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카이로스는 올림포스의 신 중 하나이다. 후두부가 대머리이며, 카이로스가 다가올 때 우리가 움켜쥘 수 있는 건 그의 앞머리뿐이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지나치고 나면 머리채를 붙잡을 방법이 없다. 그는 기회의 신이며, 스쳐 가는 순간의 신이며, 딱 한순간만 틈을 보이기에 놓치지 않으려면 망설임 없이 바로 낚아채야 하는 (그것도 앞머리를!) 놀라운 가능성의 신이다
카이로스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순간의 결정이 만들어 내는 중대한 전환점을 놓치게 된다. 그리스의 전통에 따르면 시간을 정의하는 건 ‘크로노스‘로 알려진 거대한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카이로스다. 그것은 특별한 시간,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운명이나 숙명, 혹은 외부 상황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내리는 결정과밀접한 연관이 있다. 머리카락 한줌으로 카이로스를 붙드는 상징적인 동작은 운명의 궤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변화의 순간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p 36
저자는 카이로스를 괴상함의 신으로 표현하는 데 이는 탈중심주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뻔한 행동 반경을 벗어나려는 경향, 고질적인의식이나 사고방식,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창의적이고 기발하며, 이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은 괴상해야만 하고 탈중심적이어야 한다.괴상함은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맞서 논쟁을 즐기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것은 순웅적 태도와 위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순간을 포착하여 운명의 궤적을 바꾸는 용기 있는 태도다. p 37
우리가 낙원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행위나 신에 대한 불복종 때문도 아니고 신의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된 유일하고 단일한 존재로인식한 것이 바로 우리의 원죄인 것이다. - P26
복합성에 기반한 이 새로운 관점은 세상을 계층에 따라 정렬된 통합체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내포된 다중성과 다양성, 그리고느슨한 유기적 네트워크 구조에 주목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이러한 관점 덕분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복합적이면서각양각색인 유기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P28
나는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파생된 심리학적 결과가 상당히놀라울 것이라고 예상한다. 아마도 우리는 인간 심리를 다양한 구조와 층위의 복합체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즉 개별적인 인성을 ‘묶음‘이나 ‘다발‘로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며, 다중적인 정체성(다중 인격)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사회 영역에서는 네트워크 단위의 탈중심적인 구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민족주의‘의 배타적 사상에 기반한 위계적 국가의 개념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판명되리라. - P29
. 카이로스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순간의 결정이 만들어 내는 중대한 전환점을 놓치게 된다. 그리스의 전통에 따르면 시간을 정의하는 건 ‘크로노스‘로 알려진 거대한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카이로스다. 그것은 특별한 시간,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운명이나 숙명, 혹은 외부 상황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내리는 결정과밀접한 연관이 있다. 머리카락 한줌으로 카이로스를 붙드는 상징적인 동작은 운명의 궤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변화의 순간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 P36
나는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개념,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바란다. 동시에 나는이 세상, 그러니까 이 거대하고 유동적이며 깜빡이는 불빛처럼 불안정한 우주에서 사실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 P40
오그노즈야(폴란드어 ognozja, 영어 ognosia, 프랑스어 ognosie)는내러티브 지향적인 초현실적 인지 과정으로 대상과 상태, 현상을 반영하며, 그것들을 보다 고차원적인 상호 의존적 의미로 배열하려는 시도. (참조)→ 충만함, 전체성. (구어] 내러티브 자체는물론이고 그 일부나 세부 항목에서도 질서를 발견하여 종합적인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능력을 말한다.
인식에 이르는 지각 및 인지 과정의 장애를 뜻하는 의학 용어 agnosia(실어증)의 반대개념으로 토카르추크가 만든 신조어다. - P41
우리는 어쩌면 하나의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실제로는 각자의 환영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능력은 우주의 본질도, 신의본질도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란 그저 인간 사고의 본질이라 보기에도 애매하며,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인간 사고의 여러 경향중 하나에 불과하다. - P68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바라보는 것, 우리를 타인과 구분하는 명백한 경계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착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환영에 불과한 가상의 경계선은 나와 다른 사람들, 나아가 인간과 동물을 갈라 놓을 뿐이다. 이것이 코스텔로가 불교를 통해 ‘공감‘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 P76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의 DNA가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마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규범과 질서가 세워져 있는 것처럼, 우리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는 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 P76
나는 이처럼 경이로운 순수의 상태를 모두가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고유한 경험을 억누르고, 세상이 고르고 일정하다고 믿게 하며, 불변의 반복적인 법칙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다는 착각을 빚어내고, 그래서 그러한 세상을 신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연결망과 조합, 인위적인 연관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경험해 봐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상태는 우리 것이 아닌, 다른 규칙에 기반한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세계가 우리 세계보다 더 좋지도 더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준다. 나아가 우리가 만든 질서 또한 세상의수많은 질서 중 하나이며, 우리가 느끼는 편안함은 실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 - P90
문학은 집단의 언어가 한때 지금과는 다르게 기능했고 과거의 세계관이 현재와는 확연히 달랐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을 인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실은 여러 가능한 모습 중 하나이며, 이 또한 우리에게 영구히 주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 P105
늘명확하고선명하게만여겨지던 대상들을 마치 램프처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그래서 그 빛 속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갑자기모호해지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고, 안심하던 것들이 의심의 대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잠시나마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멈추고 타인이 되어보는 데 독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 P116
해석의 행위는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를 연이어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에 떠 있는 마야의 장막과 환상에 의해 세상이 창조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옳다. 물론 해석들은 상호 배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배제란 결국 보완을 요구하는 법이니! 사실과 사실 사이를 연결하는 선은 직관적으로 그어지며, 동시성과 연관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거기서 갑작스럽고도 명백한 깨달음이 생겨난다. 해석은 인식의또 다른 형태가 아니라 그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일 뿐이다. 의미는 무수히 많고, 텍스트는 끝이 없다. 마치 예시바의 학생들이소금 그릇에 손가락을 담그며 탐독하는 토라처럼 말이다. 글자의무수히 많은 배열과 조합이 얼마든지 가능한 만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버전의 텍스트가 존재한다. 각각의 버전에는 신의 이름이 붙어있으니 그 이름을 일일이 헤아려 모두 부르는 자가 세상의 역사를 끝내고 시간을 마감하리라. 그렇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책을 읽기 위해서다. - P132
우리가 창작의 과정,즉 카를 융이 ‘동시성‘이라고 독창적으로 명명한, 서로 인과 관계가없는 사건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존하는 그 과정을 우리가 주의 깊게 성찰할 때 우리 눈앞에 무엇이 선명하게 보이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 P181
그러므로 초반의 스토리텔링은 권능의 행위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서 속 창조 사역의 반복이며, 상상의 끝자락에 이를때까지 창조하고, 지어내고, 꾸며내는 ‘나‘에 대한 긍정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는 실제로 누구이며, . - P194
그 고요함 속에서심장은 부드럽게 뛰고, 피는 속살거리며, 심지어 그들이 꾸는 꿈조차현실이 아니다. 난 그것들이 뛰고 있는 이미지의 조각들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꿈꾸는 몸들 중 어느 것도 나와 더 가까워지지 않고,더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그들을 바라볼 뿐이며 그들의 뒤엉킨 꿈의 생각 속에서나자신을 본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모습도, 그어떤 가치도, 그 어떤 감정도 없는 순수한 시선이라는 이상한 사실을발견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한다. 나는 시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나는 공간 속에서 시점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도 그것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 화면의 커서처럼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저 그것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손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꿈을 꾼다. 이것은 나로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긴시간이다. 나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으며, 새로운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 나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밤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조차 내가 보고 있는 것을바꿔 놓지 않는다. 나는 보고 있고, 새로운 것을 인식하지도 내가 한번 본 것을 잊지도 않는다. - P205
나는 옌타를 사인칭 서술자, 총체적인 이야기꾼이라고 불렀고,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된 나자신을 발견한 순간 전율을 맛보았습니다……. 가여운 옌타는 지금 모니터 위에 대문자로 표시되고 있는 옌타, 옌타, 옌타리는 글자를 포함하여 텍스트에빈번하게 등장하는 자신의 이름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곧장 흥미를 잃고 다시 위쪽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 P227
.. 출생을 일종의 추방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안개저편에 펼쳐진 낙원, 순수한 균형과 안정의 공간, 아직 서로 차별화되지 않았기에 모두가 순결한 존재였던 이상향을 우리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음을 인류의 오래된 신화들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자신의 고유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시절,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 순간 상기시켜 주는 ‘나‘라는 존재의 고통스러운 경계를 깨닫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이나 집단적 기억, 나아가 뿌리로부터 떨어져나올 때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낯선 소외의 경험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응축된 파생적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쿠프의 서』는 근본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이러한 느낌을형상화하는 데 온전히 헌신한 작품입니다. - P236
야쿠프의 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묘한 서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옌타의 존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머물며 서서히 결정체로 변해 가는 유일하게 비이성적인 인물 옌타는 소설에서의 실체적 프레임, 즉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말하면 개연성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특권을 가진 인물입니다. 기이한 옌타의 존재는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옌타는서술된 이야기 전체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으로 만들고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옌타로 인해 독자는 특별한 파놉티콘의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소설의 리얼리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고찰해 보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코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고 종종 측량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으로 여기며직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문학을 통해 세계를 일대일로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조차 말입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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