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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질문들 - 마거릿 애트우드 선집 2004~202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평점 :
유쾌한 에세이였다 .작년에는 땡기지않았던 [나는 왜 SF를 쓰는가]도 읽고 싶어졌다. 2019년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1년만에 도착문자를 받고 삐져서 😂 포기했던 [미친아담]3부작도 다시 읽고 싶어짐 ㅋㅋㅋㅋ
번역탓하며 던져버렸던 앨리스 먼로 소설들도!
그 외에도 [선물] ! 꼭 읽고싶다. 제발트 소설과의 동시성?적인 해석은 은근 소름이다. (아래 밑줄긋기) !!
내가 만난[선물]의 독자들은 모두 이 책에서 통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본인의 예술 활동에 대한 통찰뿐 아니라, 일상을 너무 넓게차지하고 있어서 오히려 자세히 볼 틈이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얻었다고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빚진 걸까? 내 정체성을 다지려면 크리스마스를 가족과함께 보내야 할까? 만약 동생이 신장을 기증해달라고 부탁하면 즉각그러겠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동생에게 수천달러를 청구해야 할까?
범법 행위를 요구받는 입장이 되기 싫으면 마피아의 선물은 사양하는게 좋지 않을까? 내가 정치인인데 로비스트에게 포도주 상자를 받아도 될까? 다이아몬드는 정말 여자의 ‘베스트 프렌드인가? 아니면 현금화가 불가능한 격정적인 손등 키스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할까?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오래전에 말했듯, 인간의 상상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인간 세계만움직였습니다. 한때 인간 세계는 주위를 둘러싼 거대하고 막강한 자연 세계에 비해 정말 작았습니다. 지금은 날씨를 제외하면 우리가 통제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갖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문학은 인간 상상의 발설 또는 표출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빛으로 둘러싸인 어둠 속에 서 있다.
모조품은 무엇이고 진품은 무엇일까? 어떤 감정과 행동 방식과 말이 진솔한 것이고, 어떤 것이 겉치레이고 가식일까? 아니, 두 가지가분리될 수는 있을까? 먼로의 인물들은 이런 문제들을 자주 생각한다.
『선물』을 읽기 전의 당신과 읽은 후의 당신은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선물로서 가지는 위상이기도 하다. 선물은 단순한 상품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니까.
저는 주로 소설을 쓰고,때로 ‘사이언스 픽션‘ 또는 ‘사변소설‘이라 부르는 것을 씁니다. 어쨌든우리의 미래, 지구상의 삶, 가능성의 영역을 다루는 소설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소설을 통해 저는 현재의 사실과 동향을 조망하고, 그것을미래에 투사해서 그 결과를 추정합니다. 이런 소설의 존재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이런 소설이 작게나마 전략적 도구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이런 소설이 말하는 바는 이겁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향하는곳은 여기예요. 여기가 종착지가 될 판이라고요. 그래도 정말 이 길로 가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길을 바꿔요. 이런 부류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쉼 없이 변화를 숙고합니다.
촛불거울 현상 같은 우연한 발견을 또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확히 30년 전인 1983~1984년, 저는 가족과 함께 노퍽에서 가을, 겨울,봄을 보냈습니다. 제발트가 『토성의 고리에서 너무나 유려하게 그려냈던 지역에 직접 살았던 거죠. 그의 글이 대개 그렇듯 토성의 고리』도 덧없음에 대한 일종의 명상입니다. 이때 우리는 15세기에 지어진 웅장한 성 니콜라스 성당이 증언하듯 한때는 번성한 항구였지만 지금은갯벌에 면한 작은 포구에 불과한 블레이크니에 머물고 있었어요. 안개,바람 부는 바다, 거기에 잠겨버린 마을들, 꼬불꼬불한 뒷길들, 한때는부유했지만 지금은 퇴색한 사유지들. 우리는 토성의 고리에서 그것들에 대해 읽기 전에 그것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리치시를 배회했습니다. 노리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제 소설 홍수의 해 마지막 장의 수호성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저는 험프티 덤프티의 교훈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럼 물어볼게요! 무엇이 주가 되어야 하죠? 우리가 작가로서 단어들의 의미를 확장하는 걸까요, 아니면 작가는 단지 언어의 도구일 뿐일까요? 언어가 컴퓨터처럼 나를 프로그래밍하는 걸까요, 아니면 ‘템페스트(The Tempest)』의주인공 프로스페로가 마법을 휘두르듯 내가 언어를 휘두르는 걸까요?
제게 번역해줄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언어 몰입을 경험하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의 비(非)몰입이 제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제게 그것은 바깥에 적어도 한 개 이상의 다른 언어적 우주가 존재한다는 신호였습니다. 여기 있는 제게는 불분명하지만 거기 있는 남들에게는 자명한 것들이 있다는 신호요.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 중 하나는 글쓰기행위를 통해 다양한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작가에게뜻밖의 발견이 없으면 독자에게는 재미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미리 초안을 잡지 않는 한가지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중으로 부자유하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새장에 갇힌 울새 한마리가 온 천국을 분노에 떨게 한다"라고 했다. 존 밀턴은 「실낙원」 제3권에서 인류와 자유의지에대한 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한다. "충분히 설 수 있게 했으나 타락하겠다면 그것도 제 자유다." 셰익스피어는 『템페스트』에서 칼리반의 입을빌려 "자유여, 축제여!"라고 노래했다.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맡길 수 있을까?" 기술 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해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수만 년 동안 변하지않았다. 같은 감정, 같은 집착, 같은 선악미추 개념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 인간은 영원한 오합지중이다. ...오릭스와 크레이크』의 지미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다. 우리를 구하는 데 우리의 착한 마음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요구될까? 우리가 현재의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윤리적인 새로운 버전의 우리를 창조할 역량을 갖출 날이 머지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그 버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급속히 파괴 중인 생물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간 모델을 폐기해버려야 하지 않을까?크레이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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