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힘 - 공부의 시작과 끝, 논문 쓰기의 모든 것
김기란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점수 : 8 / 10

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일전에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을 두고 ˝(연구)설계론에 대한 완벽한 가이드북˝이라는 후한 평가를 내린 적 있다. 사실, 그 글을 쓸 당시에도 ˝완벽한˝이란 표현을 두고 고민했었다. 최상급을 쓰면 글이 최상급으로 강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의 없고 공허해진다. 숙고 없이 아무나 쓸 수 있는 표현이고 읽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책을 만나면, 아니 책이 훌륭하다고 느낄수록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나는 힘 있는 어조를 좋아해서 단정적인 어미를 즐겨 쓰는데 이것이 최상급 표현과 같이 쓰이면 빠져나갈 수 없는 자충수가 된다. <논문의 힘>처럼 <논문 잘 쓰는 방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책을 소개하려할 때 그렇다.
분명히 <논문 잘 쓰는 방법>은 훌륭한 책이었다. 당시 나는 연구의 의미와 논문의 형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에 대해 수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본 듯이 에코는 해답을 척척 내놓았고 나는 진심으로 책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다만 인문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출판년도가 오래되어 DB를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논문의 힘>은 연구의 목적과 논문의 장르적 특성을 친절하고 섬세하게 설명하면서도 모든 학문 분야를 포함할 정도로 포괄적이며 최근 이슈까지 다루고 있다. 더구나 애초에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글이다. 어느모로 봐도 국내 대학원생에게는 <논문의 힘>을 권하는 게 낫다. 결국 나는 기존의 평가를 철회하지 않고서는, ‘완벽하다‘보다 완벽함에 더 가까운 새 표현을 창안하거나 완벽함에도 급(級)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처지가 되었으니 난처하고 또 민망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논문 잘 쓰는 방법>은 훌륭한 책이었고 나는 그 책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논문의 힘> 역시 연구설계론을 소개하는 뛰어난 책이다. 외려 출판년도가 최근이며 한국의 사례를 다룬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연구자에게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서문의 마지막 대목, 책의 집필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3~4년 전만 해도 논문작성법 강의를 진행하면 강의실에서 비탄의 신음과 안도의 한숨이 가득했다. 표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논문을 쓸 뻔했다는 두려움, 선행 연구를 읽고 요약하다 보면 나의 논문이 완성될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자조감, 포괄적인 주제를 설정하여 보람 없이 잡아먹은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강의실에 가득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는 듯한 당황스러운 눈빛과 만나게 된다. ‘왜 나만 어렵게 논문을 써야 하나요? 손해 보기 싫습니다. 남들처럼 쉬운 길로 가겠습니다. 저는 대학원 졸업만 하면 되니 큰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며 관행이 원칙을 대신하게 된 씁쓸한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지난 10년간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pp.14-15)
과거에 나는 연구설계론이 특정한 계층의 사람만 배우면 되는 전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논문을 쓰는 사람 말이다. 지금은 좀 다르다. 당장 논문을 써야하는 사람 뿐 아니라 대학원 과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책, 8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점수 : 7.5 / 10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학창시절에 배웠던 소설 전개의 다섯 단계다. 그런 선입견이 있어서일까. 언제부턴가 소설을 볼 때 위기와 절정이 얼마나 격정적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이 너무 평이하면 읽는 재미가 없다. 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을 다루는 것이지 밋밋한 현실 그 자체를 옮겨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극단적이거나 엽기적이도 안 된다. 진짜로 일어날 만한 사건이라는 합리성을 잃어도 곤란한 게다. 요컨대 합리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엽기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훌륭한 소설의 요소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런데 이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기상천외한 전개도 없다. 결말로 치닫는 과정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 대목을 위기나 절정으로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그건 ‘정리‘다. 갈등의 불씨를 크게 지펴서 해소해버리는 게 아니라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주섬주섬 되담는 것만 같았다.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담백하며 가지런하고 보드랍다. 놀랍고도 기쁘다. 기존에 생각하던 ‘소설은 이런거야‘라는 형식이 부숴지고 ‘이런 것도 소설이구나‘라는 새로운 형식이 들어왔다.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현대 소설의 경향은 사건의 다양성이 아니라 묘사의 다양성이라고 말해주었다. 발생할 법한 사건은 이미 기존 소설에서 죄다 다루었으니, 현대의 소설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동일한 사건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에 주목했다고. 예컨대, 같은 일을 겪더라도 목수가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정치학자가 묘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학을 배웠다가 목수로 전향한 사람의 묘사는 또 다를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그 경향의 전범같은 작품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생물, 요리,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관점을 가져와서 묘사하는 것이 자못 섬세하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p.47)˝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사무소 업무에 적응해간다고 자평하는 대목이다. 건축가가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식으로 표현하겠는가. 이런 묘사들이 새롭고 또 재밌다.
어떤 소설은 흡인력이 대단해서 책을 덮기가 아쉽고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밤을 새워서라도 읽는 그런 소설은 재미있지만 독자를 다소 지치게 한다. 반면, 이 책은 언제고 펼치고 덮는데 부담이 없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갈수록 내용이 확장되지만 발산하지는 않는다. 독자의 의구심을 부추겨 앞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책을 덮기에 아쉬움은 없지만 덮고 나면 다음날쯤 생각나고 책을 펼치면 소박하지만 환대받는 느낌으로 돌아간다. 읽기에 부담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차분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에 반점을 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점수 : 6 / 10

나는 예전부터 라틴어에 대한 동경심을 새가 알을 품듯이 마음 속 깊숙히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에 대한 동경이나 사라진 것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저 내가 하는 말을 남들이 좀 못 알아들었으면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영어와 닮은 듯하고 또 의미도 비슷한데 도저히 그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는 게 라틴어 아닌가. 허세나 과시욕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누가 내 일에 알은 체를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진지하게 한글 자모에 기반한 암호를 개발하기도 했는데 결국 쓰지 못했다. 첫째로, 한글에 기반하되 원래 글자와 닮은 구석이 없어야 하니 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비효율적이었다. 둘째로, 한국어도 어렵게 말할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굳이 티나게 암호를 끼적이는 것보다는 어려운 단어를 쓰는게 더 편하다(문제는 ‘그게 무슨 의미냐‘고 굳이 되묻는 경우인데 그냥 적절히 맞춰주면 된다). 어쨌든 이렇게 일단락 된 후에도 라틴어에 대한 집착(?)을 나는 쉽게 떨치지 못하여서 책을 읽다가 만나는 라틴어를 반짝이는 물건을 본 까치처럼 수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뒤늦게 이 책 <라틴어수업>이 작년 인문교양 베스트셀러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신간을 좀처럼 읽지 않고 또 구입보다 도서관을 애용하는 도서산업의 암적인 존재인데 이건 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이례적인 경우다. 내용은 생각보다 체계적이었고 동시에 생각보다 가벼웠다. 라틴어는 사어(死語)라서 전문연구자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줄 알았는데, 대부분 유럽국가에서 학생들이 교양으로 배운다고 하여 제법 놀랐다. 또 바티칸을 비롯한 교회에서는 여전히 사용되며 실제로 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어휘와 발음과 문법이 정비되어 있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문법이 너무 복잡하고 유럽의 역사,문화와 결부된 내용이 많아서 배우기 힘들다고 한다. 결국 이 책은 라틴어의 기본적인 특징을 알려주고 유럽 문화의 기초소양을 살짝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데서 그친다.
동시에 이 책은 ‘따스한 말‘과 ‘위로‘외 ‘격려‘가 나머지 반이다.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글에 잘 이해하지 못한다(가끔은 내가 싸이코패스인걸까 고민한다). 이런 글은 감정선을 따라서 논지가 흐르기 때문에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앞에서 이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다른 주제로 넘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는건지 의아하다. 그리고 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글을 끝내는걸까. 나는 질문만 하고 답을 주지 않는 글을 싫어한다. 글에서 질문을 했으면 맞든 틀리든 답하는 게 책임감 있는 태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혹 ‘질문을 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면서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만난 그것은 대개 무책임의 다른 표현이었다. 진정 훌륭한 가르침은 명시적인 질문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즉 뒤에 물음표를 붙이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질문 무더기를 안겨준다. 그것은 내면에서 쏟아지는 것이므로 남이 정해서 물어보는 질문보다 더 진지하고 치열한 법이다. 자꾸 질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별로였다.
그럼에도 라틴어라는 희귀한 언어, 바티칸 생활이라는 드문 경험, 유럽의 역사와 문화라는 매력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의 투덜거림이 어째서인지 나한테만 있는 불만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크다. 개인적인 혹평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좋은 양서(6점)‘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상하지 말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
송길영 지음 / 북스톤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점수 : 8 / 10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논문 때문에 통계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쓸건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원래 쓰던 eviews나 stata도 아니고, 한글화가 우수한 SPSS도 아닌 R을 배우겠다고 덤벼든 게 화근이다. 사실 R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다. 표 하나를 만들더라도, 다른 프로그램은 삽입-표-표만들기로 클릭해서 실행하면 될 것을 R에서는 table<-matrix(1:6, nrow=3, byrow=T)같은 코드로 명령한다. 윈도우를 쓰다가 도스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 대/소문자를 틀렸다고 에러, 따옴표가 없다고 에러, 괄호가 하나 없다고 에러.. 하필 에러 메세지는 빨간 글씨다. 자꾸만 붉게 물드는 모니터를 보면 좀 기가 죽는다. 그러니까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거다. 더군다나 빅데이터 시대 아닌가. 데이터의 기적을 간증하는 텍스트는 많다. 그렇게 뽑아든 게 바로 이 책 「상상하지 말라」다. 제목부터 강렬하다. ‘빅데이터님이 계신데 어디 감히 네 머리로 상상을 하느냐‘하는 일갈 같지 않나.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저자는 오히려 데이터가 모든 정답을 알려주리라는 데이터만능주의를 경계한다. 사회에 숨어있는 인과관계란 오로지 인간의 통찰력으로만 밝혀낼 수 있고 데이터는 그 과정에서 활용하는 도구라는 게다. 다만, 데이터로 확인되기 전에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상상하지 말라!)는 거였다. 사회현상의 인과성을 밝히기 위해서 선입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객관적인 도구로 관찰한다? 결국 사회과학의 본령으로 되돌아 왔다. 애초에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으나, 사회과학연구의 방법론으로 통계분석을 시도하는 입장으로서 묘한 자극이 되었다.

앞에서 좀 과하게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사실 이 책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매끄럽고 심지어는 유머러스하다.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마케터이자 데이터분석가로서 다양한 계층을 관찰하는 게 저자의 일이다. 다양한 계층의 일상과 그에 대한 다채로운 증거가 유려한 필체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싱글, 노인, 청년, 50대 남성, 주부 등 저자가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 관찰했던 소비자 그룹(곧 사회 계층)을 편견 없이 관찰했을 때 어땠는지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설명한다. 노인들은 왜 항상 ‘좋은 글귀‘를 보내며 비싼 등산복은 그렇게 잘 팔리고 싱글들은 왜 300만원짜리 대형 모니터를 사며 외국인들은 무엇을 보려고 한국에 방문하며 명절 이후에는 왜 이혼율이 급등하는가. 이 모든 사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주위에 무관심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참으로 묘하게, 이 책은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양서다.
비록 근본적으로 마케팅에 속하며 경영적인 내용으로 접근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과학의 본령과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있다. 더구나 무척 쉽게 써서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다―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책(8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좌의 정치학 - 우리가 몰랐던 국회 보좌관의 모든 것
이진수 지음 / 호두나무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점수 : 7 / 10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자주 드는 감정은 답답함이다. 일단 사회과학이라서 추상적이다. 사용하는 개념이 실체가 없는데다가 학자마다 자기 식으로 정의한다. 보다 더 정교한 논의를 위한 시도라지만 학생들의 머리 속은 확실히 보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권력자다. 그네들은 대개 대중과 유리되어 자기들끼리 모여 있다. 20대 정치학도와는 인연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가끔은 자연과학자나 심리학·사회학자가 부럽다. 천문학이나 양자역학 같은 분야가 아닌한 대부분 자연과학은 실험이 가능하다. 연구대상을 잡아오거나 똑같이 재현해서 눈으로 보면서 연구하면 된다. 심리학의 연구대상은 자기 머릿속에 있다. 사회학의 연구대상은 우리 삶에 있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입증하는 것이 힘든 것이지 적어도 만나지 못해서 답답하진 않을 게다(사실, 그들의 고민은 정반대에 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데 설명할 수 없는 것도 고충이리라). 혹여 특이한 정신병을 연구하거나 특수한 계층의 은밀한 문화를 연구하는 경우라도 그 케이스를 찾기 힘들어서인거지, 뻔히 알면서도 만나볼 수 없는 정치학의 허망함과는 좀 다르다.
연구를 하게 되니 이 답답함은 두려움이 되었다. 학위 논문의 방향이 국회의원간의 내부 경쟁 쪽으로 기울어졌다. 흡사 바다를 한번도 본 적 없는데 바다를 그리게 된 화가나 사랑을 한번도 해본 적 없는데 연애를 묘사하게 된 작가가 된 기분이다. 대충 그럴듯하게 상상하고 조합해서 면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조품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정치학 연구를 하는 게니 그 결과가 정치에 무언가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할텐데 그 연구대상이 동떨어져 있으니, 그저 내 머릿속에 가상의 국회와 국회의원을 떠올려놓고 그걸 분석한 결과물을 내놓을까봐 걱정이다. 그건 틀렸다는 점에서 무용하고 현실을 왜곡했다는 점에서 나쁜 일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국회와 국회의원의 ‘현장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다양한 문헌을 뒤적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로 완벽했다. 나는 선수(초선, 재선, 삼선, ...) 외에도 국회의원의 역량(?)을 가늠할 수 다른 요인들을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이 책에서 의원의 선수에 따라서 달라지는 업무를 자세하게 설명한다(pp.41-52). 물론 저자의 의도는 맞춤형 보좌관이 되라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선수에 따라 달라지는 국회의원의 행동 패턴과 같은 선수 내에서도 대성할 정치인과 그렇지 못한 정치인의 분기점에 대한 ‘내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입 보좌관을 위한 업무지침서‘를 표방하고 있지만 비단 그것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크게는 한국 정치에 대한 소회(계파정치에 대한 평가가 인상적이었다)와 세세하게는 입법이나 선거 과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다. 기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단순한 직업으로서의 전문 보좌관이 아니라 국회의원의 정치적 동반자인 소명 있는 정무 보좌관인 바, 정치에 대한 규범적·현실적 평가가 비중 있게 등장하고 있다. 꼭 보좌관이 아니더라도 제도권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분명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가 우리 사회에 희귀하니 그저 ‘읽으면 좋을 양서(7점)‘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