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상하지 말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
송길영 지음 / 북스톤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점수 : 8 / 10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논문 때문에 통계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쓸건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원래 쓰던 eviews나 stata도 아니고, 한글화가 우수한 SPSS도 아닌 R을 배우겠다고 덤벼든 게 화근이다. 사실 R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다. 표 하나를 만들더라도, 다른 프로그램은 삽입-표-표만들기로 클릭해서 실행하면 될 것을 R에서는 table<-matrix(1:6, nrow=3, byrow=T)같은 코드로 명령한다. 윈도우를 쓰다가 도스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 대/소문자를 틀렸다고 에러, 따옴표가 없다고 에러, 괄호가 하나 없다고 에러.. 하필 에러 메세지는 빨간 글씨다. 자꾸만 붉게 물드는 모니터를 보면 좀 기가 죽는다. 그러니까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거다. 더군다나 빅데이터 시대 아닌가. 데이터의 기적을 간증하는 텍스트는 많다. 그렇게 뽑아든 게 바로 이 책 「상상하지 말라」다. 제목부터 강렬하다. ‘빅데이터님이 계신데 어디 감히 네 머리로 상상을 하느냐‘하는 일갈 같지 않나.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저자는 오히려 데이터가 모든 정답을 알려주리라는 데이터만능주의를 경계한다. 사회에 숨어있는 인과관계란 오로지 인간의 통찰력으로만 밝혀낼 수 있고 데이터는 그 과정에서 활용하는 도구라는 게다. 다만, 데이터로 확인되기 전에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상상하지 말라!)는 거였다. 사회현상의 인과성을 밝히기 위해서 선입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객관적인 도구로 관찰한다? 결국 사회과학의 본령으로 되돌아 왔다. 애초에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으나, 사회과학연구의 방법론으로 통계분석을 시도하는 입장으로서 묘한 자극이 되었다.
앞에서 좀 과하게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사실 이 책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매끄럽고 심지어는 유머러스하다.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마케터이자 데이터분석가로서 다양한 계층을 관찰하는 게 저자의 일이다. 다양한 계층의 일상과 그에 대한 다채로운 증거가 유려한 필체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싱글, 노인, 청년, 50대 남성, 주부 등 저자가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 관찰했던 소비자 그룹(곧 사회 계층)을 편견 없이 관찰했을 때 어땠는지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설명한다. 노인들은 왜 항상 ‘좋은 글귀‘를 보내며 비싼 등산복은 그렇게 잘 팔리고 싱글들은 왜 300만원짜리 대형 모니터를 사며 외국인들은 무엇을 보려고 한국에 방문하며 명절 이후에는 왜 이혼율이 급등하는가. 이 모든 사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주위에 무관심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참으로 묘하게, 이 책은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양서다.
비록 근본적으로 마케팅에 속하며 경영적인 내용으로 접근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과학의 본령과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있다. 더구나 무척 쉽게 써서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다―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책(8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