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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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7.5 / 10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학창시절에 배웠던 소설 전개의 다섯 단계다. 그런 선입견이 있어서일까. 언제부턴가 소설을 볼 때 위기와 절정이 얼마나 격정적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이 너무 평이하면 읽는 재미가 없다. 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을 다루는 것이지 밋밋한 현실 그 자체를 옮겨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극단적이거나 엽기적이도 안 된다. 진짜로 일어날 만한 사건이라는 합리성을 잃어도 곤란한 게다. 요컨대 합리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엽기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훌륭한 소설의 요소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런데 이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기상천외한 전개도 없다. 결말로 치닫는 과정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 대목을 위기나 절정으로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그건 ‘정리‘다. 갈등의 불씨를 크게 지펴서 해소해버리는 게 아니라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주섬주섬 되담는 것만 같았다.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담백하며 가지런하고 보드랍다. 놀랍고도 기쁘다. 기존에 생각하던 ‘소설은 이런거야‘라는 형식이 부숴지고 ‘이런 것도 소설이구나‘라는 새로운 형식이 들어왔다.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현대 소설의 경향은 사건의 다양성이 아니라 묘사의 다양성이라고 말해주었다. 발생할 법한 사건은 이미 기존 소설에서 죄다 다루었으니, 현대의 소설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동일한 사건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에 주목했다고. 예컨대, 같은 일을 겪더라도 목수가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정치학자가 묘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학을 배웠다가 목수로 전향한 사람의 묘사는 또 다를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그 경향의 전범같은 작품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생물, 요리,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관점을 가져와서 묘사하는 것이 자못 섬세하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p.47)˝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사무소 업무에 적응해간다고 자평하는 대목이다. 건축가가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식으로 표현하겠는가. 이런 묘사들이 새롭고 또 재밌다.
어떤 소설은 흡인력이 대단해서 책을 덮기가 아쉽고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밤을 새워서라도 읽는 그런 소설은 재미있지만 독자를 다소 지치게 한다. 반면, 이 책은 언제고 펼치고 덮는데 부담이 없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갈수록 내용이 확장되지만 발산하지는 않는다. 독자의 의구심을 부추겨 앞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책을 덮기에 아쉬움은 없지만 덮고 나면 다음날쯤 생각나고 책을 펼치면 소박하지만 환대받는 느낌으로 돌아간다. 읽기에 부담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차분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에 반점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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