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이었다. 기간이 길었다는 게 아니라 느낌이 길었다는 말이다. 즉흥적인 여행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소득은 많았다.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외양은 그랬고 느낌도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얼어붙었던 겨울이 질척하게 녹는 중이었고, 유빙들이 바다 위를 하얗게 부유하며 겨울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직 한참은 더 그런 모습을 안고 있을 터이다. 자주 안개에 싸일 것이고, 자주 눈이 내릴 것이고, 또 바람도 불 것이다. 그래도 봄은 거의 다가와 있었으니 곧 검게 얼룩진 겨울의 흔적을 지우고 도시의 갈라진 틈새마다 노랗게 민들레를 피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구석구석 더 오래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이 기다리고 있어 아쉬움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 도시의 형상과 그림자와 그 속의 삶과 사람들을, 또 안개에 가려 유령선처럼 바다 가운데 정박해 있던 선박, 유빙들을 헤치며 천천히 움직이던 소형선들, 길게 사선을 그으며 쏟아지던 젖은 눈발, 난생처음으로 망망해 가운데에서 바라본 일몰과 일출, 거세게 뱃전을 때리며 부서지던 파도, 그리고 배와 함께 온전히 흔들리던 내 상상의 세계.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그 세계를 얼개로 만드는 일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다.

그런데 여태 몰랐던 내 영혼의 운명이 떠돌이였었던지 오히려 머물러 있는 지금 나는 심하게 멀미를 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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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문학은, 도저히 열 수 없는 ‘납 상자’일지도 모르나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달콤하고 고통스런 유혹이다. 꿈의 선물상자이다. 또한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내게 문학은 그와 같다. 물론, 아직까지 ‘아무리 먹어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래서 아직은 그만큼의 희망이 남아있다 여기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실비 제르맹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공간 속으로 끝없이 탐험해 들어가는 일이다. 글을 뚫고 이미지를 심는 것,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는 어떤 일을 추구해 나가는 것, 앞으로 나아가지만 지평선을 향해 걸어갈 때처럼 항상 미완성 상태일 뿐이라서 가면 갈수록 지평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리고 샘 새비지의 「소설 쓰는 쥐 퍼민」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늘 이렇게 상상해왔었다. 만일 내가 그 이야기를 쓸 때가 온다면…’ 이어서 또, ‘만일 그때가 온다면!’(은) 가망이 없다는 것. 지워 없애자.

이 얼마나 뼈에 와 닿는 말인지! 

가망이 ‘있다’와 ‘없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만일 그때가 온다면…' 이라는 희망에 붙들려 있는 것이 얼마나 슬픈 고통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터이다.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검증되지 못하는 투쟁만큼 고독한 싸움은 없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어제는 까마득히 멀어지고, 내일은 순식간에 다가와 있다. 내 일상에서의 시간과 공간 개념은 완전히 삭제되고 그들의 삶과 인생을 함께 살게 되는 까닭이다. 그들과 함께 숨 쉬고, 함께 마음 졸이고,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울고 웃으며… 또 한편으로는 작가들의 재능과 창작세계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그러면서 희망을 품고, 호기롭게 몇 문장을 써보다가 지독하게 형편없음에 금세 좌절하고… ‘작가의 DNA’는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의 영향인가, 라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 그러기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한마디로 고통이다.

오, 그 지독한 고통이라니! 복통이 요동치는 창자들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몸속으로 파고들어 쥐어틀며 점점 더 세차지는 그 긴 경련. 지금도 나는 그 거듭된 고통이 내게서 종이 씹는 버릇을 영영 버리게 하지 못한 것이 놀라울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고통이 자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다시 씹기 시작했고, 때로는 그만큼도 기다릴 수 없었다. -<소설 쓰는 쥐 퍼민 중에서> 

 

이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은 없다. 정확한 실체를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슬픈 사랑이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아파하고, 또 괴로워하면서도 결코 단념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나의 문학이다.

퍼민은 ‘책들의 멋진 한 가지 맛은, 커피 냄새가 나는 맛이다!’라고 했다. 근사한 표현다.

그러한 책들의 향기 속에서 오늘도 나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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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은 내 앉은 책상과 직통으로 연결되어있다. 정확히는 왼쪽으로.  

나는 북쪽을 향해 앉아있고 현관 밖에서 나는 소리는 왼쪽 귀로 곧바로 흘러든다.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그마저 아무도 나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때문에 웬만한 기척에는 나 역시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스검침이나 소독하는 사람조차 집에 들이지 않는다. 이기적이긴 하지만 절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예외도 있다. 미리 통보 받은 택배나 등기우편물을 받아야 할 때 같은. 

그런데, 

현관문 밖에 잔뜩 붙어있을 광고지들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청소부들의 몫이다. 그들인가 했다. 잠시 후,  중얼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웃이겠지, 뭐'라고 여긴다. 그런데 아니다. 내 현관문에 키를 꽂아 돌리는 소리. 

온 몸과 신경이 급속냉각 된다. 계속되는 부스럭거림과 딸그락대는 마찰음, 또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던 내 두 손도 창백하게 숨죽이고 소리에 긴장한다. 현관 밖의 소리가 멈춘다. 사이. 그가 누군가에게 외친다.  

“아니다! 502호다!”  

멀어지는 발소리.  갇혀있던 숨이 한꺼번에 팍 터져 나온다. 내 집은 3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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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큰 일 났다.

읽어야할 것도 번역할 것도 써야할 것도 태산인데,

시간은 잔인할 만큼 가차 없으니...

이럴 때 '시간 경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만, 

어쩌랴,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일단 불부터 끄고 생각은 나중에 해야겠다.


<Длинный день>, <Вместо меня>, <Ничего особенного>,

<О том, чего не было>, <День без вранья>, <Этот лучший из миров>, и. т. д.

 

그리고…


1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소설 쓰는 쥐 퍼민
샘 새비지 지음, 황보석 옮김 / 예담 / 2009년 1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절판

9월의 빛- 검은 그림자의 전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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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품절
바베트의 만찬 (양장)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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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에도 힌스테라아르호른에도

아직은 인간의 발자취가 없었노라.  



알프스의 정상… 기암절벽의 연봉… 첩첩산중의 한복판.

태산준령 위엔 맑게 갠 연록색의 말없는 하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응고된 눈. 그 눈을 뚫고 우뚝 솟은 얼음에 덮이고 비바람에 그을은 준엄한 암괴.

지평선 양쪽에 우뚝 마주 솟은 두 거봉, 두 거인―융프라우와 힌스테라아르호른.

융프라우가 이웃에게 말한다.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소? 당신이 나보다는 잘 보일거요. 하계의 모양은 어떻소?”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이윽고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밀운이 지면을 덮고 있소…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번에는 보이는군. 하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소. 얼룩지고 자질구레하오. 물은 푸르고 숲은 검고 쌓아올려진 돌 더미들은 잿빛이오. 그 주위에선 여전히 딱정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소. 아직도 당신이나 나를 더럽힌 적이 없는 저 두 발 달린 벌레들 말이오.”

“인간들 말인가요?”

“그렇소, 그 인간들 말이오.”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벌레들이 좀 적어진 것 같소.”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하계가 전보다는 선명해졌소. 물이 줄고 숲도 성글어졌소.”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무엇이 보이오?” 융프라우가 묻는다.

“우리들 근처는 아주 깨끗해진 것 같소.” 힌스테라아르호른이 대답한다.

“그런데 저 먼 계곡 사이에는 아직도 얼룩이 남아 있고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소.”

“지금은 어떻소?” 다시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지나자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제야 좋아졌소.” 힌스테라라르호른이 대답한다. “어디나 깨끗하오. 어딜 보나 새하얗소… 보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눈뿐이오. 눈과 얼음이 고루 깔려 있소. 죄다 얼어버렸소. 이젠 됐소, 마음이 놓이는군요.”

“잘 됐군요.” 융프라우가 말한다. “그건 그렇고 우리도 꽤 지껄였으니 이젠 한잠 자도록 합시다, 노인.”

“그럽시다.”

거대한 산들은 잠든다. 맑게 갠 푸른 하늘도 영원히 입을 다문 대지 위에 잠든다.

 

-「대화」/이반 투르게네프 -  

 

 

 

겨울이 너무 길고 추웠던 탓일까?

밝은 빛을 너무 오래 외면하고 어둠만 딛고 섰던 탓일까?

아님 태생이 염세적인데 그동안 아닌 척 가면을 쓰고 살다 비로소 그 가면의 한계를 느꼈음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지적 허영심을 채우지 못해 기어이 병이 들었음일까?…

병이라면 아마도 불치병이지 싶다.

어쨌든, 뭔가 대단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대로 오래도록 아플 것 같다.

생각은 긍정보다 부정을 증식하고, 부정은 또 질문과 의문만 잔뜩 풀어놓아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미로에 갇힌 듯,

어디에도 답을 찾을 수 없으니 하루하루가 미칠 지경!…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저기 들쑤시며 기웃거려 봐도, 가뜩이나 비좁은 의식에 점점 더 혼돈만 가중시킬 뿐이니…
정말 이러다간 남의 글 속에서 영영 길을 잃고 말지! 

 

이건 분명 사고다!

그러나 어쩌랴, 원하지 않았어도 심각한 ‘딱정벌레’로 태어나고 만 인생인 걸. 

잠깐 사이 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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