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프라우에도 힌스테라아르호른에도
아직은 인간의 발자취가 없었노라.
알프스의 정상… 기암절벽의 연봉… 첩첩산중의 한복판.
태산준령 위엔 맑게 갠 연록색의 말없는 하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응고된 눈. 그 눈을 뚫고 우뚝 솟은 얼음에 덮이고 비바람에 그을은 준엄한 암괴.
지평선 양쪽에 우뚝 마주 솟은 두 거봉, 두 거인―융프라우와 힌스테라아르호른.
융프라우가 이웃에게 말한다.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소? 당신이 나보다는 잘 보일거요. 하계의 모양은 어떻소?”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이윽고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밀운이 지면을 덮고 있소…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번에는 보이는군. 하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소. 얼룩지고 자질구레하오. 물은 푸르고 숲은 검고 쌓아올려진 돌 더미들은 잿빛이오. 그 주위에선 여전히 딱정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소. 아직도 당신이나 나를 더럽힌 적이 없는 저 두 발 달린 벌레들 말이오.”
“인간들 말인가요?”
“그렇소, 그 인간들 말이오.”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벌레들이 좀 적어진 것 같소.”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하계가 전보다는 선명해졌소. 물이 줄고 숲도 성글어졌소.”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무엇이 보이오?” 융프라우가 묻는다.
“우리들 근처는 아주 깨끗해진 것 같소.” 힌스테라아르호른이 대답한다.
“그런데 저 먼 계곡 사이에는 아직도 얼룩이 남아 있고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소.”
“지금은 어떻소?” 다시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지나자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제야 좋아졌소.” 힌스테라라르호른이 대답한다. “어디나 깨끗하오. 어딜 보나 새하얗소… 보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눈뿐이오. 눈과 얼음이 고루 깔려 있소. 죄다 얼어버렸소. 이젠 됐소, 마음이 놓이는군요.”
“잘 됐군요.” 융프라우가 말한다. “그건 그렇고 우리도 꽤 지껄였으니 이젠 한잠 자도록 합시다, 노인.”
“그럽시다.”
거대한 산들은 잠든다. 맑게 갠 푸른 하늘도 영원히 입을 다문 대지 위에 잠든다.
-「대화」/이반 투르게네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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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너무 길고 추웠던 탓일까?
밝은 빛을 너무 오래 외면하고 어둠만 딛고 섰던 탓일까?
아님 태생이 염세적인데 그동안 아닌 척 가면을 쓰고 살다 비로소 그 가면의 한계를 느꼈음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지적 허영심을 채우지 못해 기어이 병이 들었음일까?…
병이라면 아마도 불치병이지 싶다.
어쨌든, 뭔가 대단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대로 오래도록 아플 것 같다.
생각은 긍정보다 부정을 증식하고, 부정은 또 질문과 의문만 잔뜩 풀어놓아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미로에 갇힌 듯,
어디에도 답을 찾을 수 없으니 하루하루가 미칠 지경!…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저기 들쑤시며 기웃거려 봐도, 가뜩이나 비좁은 의식에 점점 더 혼돈만 가중시킬 뿐이니…
정말 이러다간 남의 글 속에서 영영 길을 잃고 말지!
이건 분명 사고다!
그러나 어쩌랴, 원하지 않았어도 심각한 ‘딱정벌레’로 태어나고 만 인생인 걸.
잠깐 사이 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