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어떤 사람이 밤이고 낮이고 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그때 강박관념이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내게도 그와 같은 ‘달’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나는 써야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라는 생각뿐입니다. 한 작품을 끝내기가 무섭게, 다음 작품을 쓰지 않곤 못 배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세 번째, 또 네 번째 하는 식으로… 마치, 말을 바꿔 타가면서 계속해서 달리듯이 노상 쉬지 않고 써 대는 겁니다. 대체 여기에 무슨 아름답고, 빛나는 생활이 있을지 한 번 물어보고 싶군요. 이 얼마나 야만스런 생활입니까!

   지금도 흥분하며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아직 끝내지 못한 소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저기 피아노처럼 생긴 구름이 보이죠. 그럼, 나는 피아노처럼 생긴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는 묘사를 꼭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 헬리오트로프 꽃향기가 나면, 대뜸 이런 생각을 하죠. 달콤하고 짙은 향기, 미망인의 꽃, 어느 여름날 저녁 묘사에 써먹어야지, 하는 식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고 있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죄다 내 문학 창고 속에 저장해 두느라고 바쁘죠.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작업을 마치면 푹 쉬면서 모든 걸 잊으려 극장이나 낚시터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천만에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어느새 머릿속에서는 새 작품의 주제가 무쇠 포탄처럼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하죠. 그러면 결국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언제나 이런 식이어서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고 사는 듯한 느낌이에요. 마치 누군가에게 꿀을 주기 위해,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 꽃을 꺾어버리고, 뿌리까지 뽑아 짓밟아버리는 격입니다. 이래도 과연 내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데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무엇을 쓰고 계신가? 이번엔 어떤 선물을 주시려나?’ 언제나 같은 말들 뿐이지요. 이들의 관심이나 칭찬, 감탄이 내겐 모두 거짓말처럼, 마치 환자를 안심시키려 속이는 거짓말처럼 들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누군가가 슬며시 등 뒤로 다가와, 저 뽀쁘리친(고골의 ‘광인일기’의 주인공)처럼 뒷덜미를 움켜잡고 정신병원으로 끌고 가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생에서 가장 불꽃 같다는 청년시절, 막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의 내 창작 생활도 한마디로 고통의 연속이었어요. 애송이 작가, 특히 이렇다 할 인정을 못 받은 젊은 작가란, 자신을 초라하고 한심하고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끼게 되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지죠. 인정도 못 받고 누군가의 눈에도 들지 못한 채, 그래서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문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주위나 기웃거리는 겁니다. 그건 마치 돈 떨어진 도박꾼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한 번도 내 독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왜 그런지 그들은 내게 적대적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들을 무서워했고, 그들은 내게 공포를 주었습니다. 새로운 희곡을 공연하게 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머리가 갈색인 사람은 내게 적의를 품고 있고, 금발은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아,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어요. 정말이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죠!  

 

   그야 물론 글을 쓰고 있을 때는 행복하죠. 퇴고를 하는 것도 좋구요. 그러나 일단 책이 나오기만 하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아닌데, 실수했군, 차라리 이런 건 애초에 쓰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겁니다. 한편 독자들은 책을 읽어보고, ‘꽤 재미있군, 재주가 있어, 괜찮은데. 하지만 톨스토이를 따르려면 아직도 멀었어’ 라든가, ‘훌륭한 작품이야, 그러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만은 못해’하고들 평합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잘 썼네, 재능은 있어’라는 평만 계속 되는 겁니다. 그저 이것뿐이지요.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나를 알던 사람들이 무덤 옆을 지나면서, ‘여기 트리고린이 잠들어 있군. 꽤 좋은 작가였지만, 그래도 투르게네프만은 못 했지’라고들 말하겠죠. 
 


* 체홉의 희곡<갈매기>/ '트리고린'의 대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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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약을 떨어야 했을까? 그러지 않고서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을!

빗길을 돌아오며 내내 후회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해야 했다. 변덕이다. 비바람도 자책을 부추겼다. 그렇지만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또다시 그렇게 행동하고 말 것이다. 어쩌랴! 고만큼인 것을.

어두운 문을 열자 깊이 갇혀있던 외로움이 우르르 시위대처럼 달려든다.

인간은 외로워서 죽기도 하고, 외로워서 미쳐버리기도 한다. 당연하겠지. 외롭지 않다면 어찌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외로워서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분노한다. 불안하지 않다면 사나워질 까닭도 없다. 그것이 자연이나 인간의 특성이다. 정신의 상태가 변덕스러울 뿐 특성은 변하지 않으니까.

뇌를 쿡쿡 찔러대며 폭력을 휘두르던 생각들이 무색무취의 술 한 잔에 일시에 마비된다. 그리 나쁘지 않다. 마비된 채 멍하니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것. 우습기까지 하다. 뭔지는 몰라도…

정면에 동그랗게 웃는 얼굴의 스케치를 매달고 초침이 무심히 돌아가고 있다. 틱, 틱, 틱…  저것이 지금 비웃는 것인가! 자기가 우주인 양, 영원인 양.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유리관 안에 꼼짝 없이 갇힌 채 제자리에서 맴만 도는 주제에. 기가 막혀서!

………

그런데 내 펜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제 분명, 손에 들고 밑줄을 긋다가 깜빡 졸았을 뿐인데… 정말 내 곁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소소한 것들이 주위에서 종종 사라질리 있을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는 벽 뒤에 감히 알 수도 없는 또 다른 현실이 겹겹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언젠가 외화에서 보았던, 알파의 세계, 베타의 세계, 감마의 세계 같은 또 다른 현실들이… 어쩔 수 없이 불가해한 세상! 시간 역시 한 방향의 가면을 쓰고 무수한 세상을 속이는 중이다.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내가 모른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문득, 내 펜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의 소설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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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으로도 지칠 수 있다. 

상상만으로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다. 

갈증으로 허기로...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내고 건너뛰고 방치하고 잃어버리고 또는 잊어버리고.... 

그래도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았다고 변명한다. 

간혹 누군가 내가 추천한 책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는 말을 해주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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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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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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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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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낯선 아내에게
아사다 지로 지음, 박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6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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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프랑스에, 인류에 헌정했다.

인류는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주었고 그 대가로 나는 한 권의 책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 비긴 셈이다.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 에밀 아자르 -


그래,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시시때때로 소설 속으로 도망쳐버리는 게으른 영혼이 있다. 어둠이 가시고, 새벽이 오고, 어수선한 낮이 지나면 어스름한 평온이 찾아든다.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며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틈, 층과 층 사이에 위치한 세상.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 그러나 엄연한 세상. 나는 그 세상으로 도망치지만, 겨우 한 발만을 들여놓는다. 한 발만! 비겁하고 소심하게!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그토록 원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먼 바다로 떠나지 못한다. 나의 선생은 말했다. 무조건 떠나라고. 배는 항해를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뭍에 매여 하염없이 출렁거리기만 할 거면 이미 ‘배’이기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다고. 맙소사! 내가 배였던 적이 있기는 했던가! 그저 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거침없이 떠나는 자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던 게 전부였던 내가?

나는 내 영혼이 단지 타인의 상상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 마침내 먼지가 되고, 기어이 그마저 증발해버릴까 봐 두렵다. 달궈진 철판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치지직! 그리고 끝나고 마는 것. 끝!

나는 미치거나 취해야만 숨 쉴 수 있는 ‘황당’한 세상을 꿈꾼다.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세상. 시간도 삼켜버린 세상. 차라리 백지인 세상을.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그 한 세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지칠 줄 모르고 위협하는 지옥의 그림자라도 전혀 두렵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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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저 내키는 대로 향하는 여행길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같았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단 한 시간의 기억이 나를 놔주지 않고 있다. 그 한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때의 일 분 일 초가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보다 더 큰 것만 같아서… 나는 시간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 '피사로 가는 길' 중에서 ―
 


누군가 무심히 해버린 한 마디,

다른 '주제'의 들러리로 잠깐 스쳐갔을 뿐인, 

말 한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말이, 

그 말이 왜 그 순간에 내 뇌리에 박혀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사소한 그 한 마디가 어떻게? 

 

이 후로 한 동안(지금까지) 그 말은 내 안에서 나를 휘젓고 있다. 

혼란스럽고 우울하고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없을 것 같다.

그 말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은…  

나도 시간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디네센의 글을 다시 읽는다.

그런데

그 속에 답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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