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고약을 떨어야 했을까? 그러지 않고서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을!
빗길을 돌아오며 내내 후회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해야 했다. 변덕이다. 비바람도 자책을 부추겼다. 그렇지만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또다시 그렇게 행동하고 말 것이다. 어쩌랴! 고만큼인 것을.
어두운 문을 열자 깊이 갇혀있던 외로움이 우르르 시위대처럼 달려든다.
인간은 외로워서 죽기도 하고, 외로워서 미쳐버리기도 한다. 당연하겠지. 외롭지 않다면 어찌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외로워서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분노한다. 불안하지 않다면 사나워질 까닭도 없다. 그것이 자연이나 인간의 특성이다. 정신의 상태가 변덕스러울 뿐 특성은 변하지 않으니까.
뇌를 쿡쿡 찔러대며 폭력을 휘두르던 생각들이 무색무취의 술 한 잔에 일시에 마비된다. 그리 나쁘지 않다. 마비된 채 멍하니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것. 우습기까지 하다. 뭔지는 몰라도…
정면에 동그랗게 웃는 얼굴의 스케치를 매달고 초침이 무심히 돌아가고 있다. 틱, 틱, 틱… 저것이 지금 비웃는 것인가! 자기가 우주인 양, 영원인 양.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유리관 안에 꼼짝 없이 갇힌 채 제자리에서 맴만 도는 주제에. 기가 막혀서!
………
그런데 내 펜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제 분명, 손에 들고 밑줄을 긋다가 깜빡 졸았을 뿐인데… 정말 내 곁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소소한 것들이 주위에서 종종 사라질리 있을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는 벽 뒤에 감히 알 수도 없는 또 다른 현실이 겹겹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언젠가 외화에서 보았던, 알파의 세계, 베타의 세계, 감마의 세계 같은 또 다른 현실들이… 어쩔 수 없이 불가해한 세상! 시간 역시 한 방향의 가면을 쓰고 무수한 세상을 속이는 중이다.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내가 모른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문득, 내 펜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의 소설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