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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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기간 이 책을 읽고 싶어했다. 어떻게 알게 된 책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바라봐 온 시간이 1년? 2년?... 읽고싶은 책들을 쌓아두고 사는 나에게는 1~2년의 기간은 사실 그리 오랜기간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이 발매된 것이 2010년 8월이니, 읽고싶어하며 바라봐 온 시간은 실제 2년에는 많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이 이 책을 오랫동안 읽고싶어 했다는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이 책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즐기기도 했다는 뜻일게다.

 

표지 사진이 참 좋다. 꾸미지 않은 일상인듯, 홱 돌아보는 강아지의 몸짓이 좋고, 바지와 슬리퍼 사이의 울뚝 불거진 동맥인지 정맥인지가 보기좋고, 무엇보다 나무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그 모습이 너무 좋다. 사진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은 후에 감상도 그와 같다라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쓰던 자신의 생각을 담아 책을 쓸 것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읽던 자신의 생각을 담아 읽을 것이다. 그러므로 책이란, 나를 쓰듯 나를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른바 전문 서평꾼들이 썼다는 서평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들의 지적이고 전문적인 서평을 따라 읽다보면 본서를 읽는 것보다 더 피곤해질 때가 있다. 책을 읽는 다는 행위는 '나'를 읽는 것이므로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지적인 놀음을 일삼는 전문 서평꾼의 서평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책을 추천하는 책은 즐겨읽는 편이다. 물론 전문 서평꾼이 쓴 책은 제외하고.

 

부제에서 말 하듯, 이 책은 '잡설'이다. 서평이 아니라 생태주의자 최성각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 즉 책을 읽고 떠오르는 '잡설'들을 묶은 것이다.편안해뵈는 표지와 함께 '잡설'이라는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한 것이다. 바라봄이 길었다면 그에 따른 실망도 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정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바라본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난독·잡독을 추구하는 지은이의 취향에서 그렇고, 전문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그렇고,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다만, 생태주의자 답게 3부의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 밖에 없다'라는 중제아래 묶인 책들에 관해선 읽을수록 지루해지곤 했다. 물론 내가 읽은 책보다 읽지않은 책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환경에 관한 책은 늘 피곤함을 동반하곤 한다.  읽을수록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없다는 자괴감과 함께 더이상은 희망도 없다라는 무력감으로 환경책 읽기가 마무리되곤 하기 때문이다. 자괴감과 무력감 뒤에 숨은 게으름과 나태를 나 자신은 알고있기 때문에 겪는 피곤함이라는 것도 사실은 너무 잘 알고있다.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생태주의자인 지은이의 독서잡설이 소중하다.

 

책을 읽으며 몇 권의 책을 더 구입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벌써 읽어버렸고, <만년>과 체와 피터 드러커에 관한 책,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와 같은 책이다. 이성숙의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도 읽고싶은 책 목록에 끼워둔다. 그 외에도 읽고싶은 책들이 있지만 몇몇권은 이미 절판되어버린 책이라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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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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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를 처음 읽고 느꼈던 전율을 기억한다. 감성을 노래한 예쁜 시는 아니었지만, 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내게로 착 감겨들며 가슴을 욱조이던 느낌을 기억한다.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는 비굴하게도 작아지는 내 모습을 숱하게 경멸해 보았으므로 시의 도입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한순간에 매혹되고 만 것이다. 단지 그 느낌만으로도 김수영이 누구인지 알고싶어졌고, 해서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거금을 투자해 구입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책꽂이만 장식한 채로 김수영은 여전히 내게 오리무중의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알아야할 강렬한 사내로 남아 있었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날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로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김수영이 불의의 사고로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한때 그것이 모종의 계략에 의한 사고가 아니었을까 추측 아닌 추측을 했던 적이 있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두번째 단락을 읽고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인데, 잘 모르는 내가 읽기에도 그 시대의 권력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온하게 보였으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내가 김수영에 빠져든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시 한편으로 김수영의 불온성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 였다. 이어지는 단락의 시어들은 김수영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시가 어려운 이유는 시인 자신이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읽는 이로서는 난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강신주는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를 특별히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나머지 단락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반항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지는 시인의 아픔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나자, 단번에 전폭적으로 푹 빠져들고 말았던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가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그저 단순한 이해를 넘어 가슴에 갈고리가 하나 들어 내장 벽을 벅벅 긁어대는 듯한 아픔으로 느끼게 되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조금쯤 비켜 서 있노라고 고백하며 가슴을 치던 시인의 설움을 천분의 일쯤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껴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공통의 중심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홀로 돌지도 못하면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서 나는 아니라고, 나는 권력에 맹종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나는 나만의 스타일대로 내 신념대로 단독적인 삶을 살고있노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없었던 시인의 처절함이 이제야 말로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 느꼈던 서러움은 고스란히 생활인으로서의 설움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느끼는 설움과 같은 종류의 설움이었고, 나는 다만 그날그날을 안일하게 보내길 소망하고 있을뿐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그대로 고통이며, 두려움이다. <김수영을 위하여>를 다 읽고난 지금도 나는 여전이 두렵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쾌락과 권력과 안락을 살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있다. 돈을 얻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에 순종할 수 만은 없다고 자꾸만 삐죽대며 올라오는 숨은 내 자신이 두렵고, 타인과 나를 끊이없이 구별하고자 하는 나의 대책 없음이 두려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를 밥먹듯이 허용하는 나의 무의식이 두렵다. 이대로 가끔씩만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아 두렵다. 그저 내가 작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이 못내 서러웁다.

그러나, 내가 김수영일 수는 없는 일이다. 강신주가 김수영이 아니듯, 나 역시 김수영을 흉내내는것도, 강신주를 모방하는 것도 옳은 방식의 삶은 아니다. 다만 김수영을 읽고 강신주를 읽으며 나만의 단독적인 스타일을 만드는 것, 포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하는 것, 그것이 강신주가 말하는 김수영 식 자유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때로는 아름답게 공명하는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이상속에서나 존재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번도 인간사에서 그러한 사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한 이상사회는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무리지어 구별하는 방법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세상에서는 '이념'이나 '주의'가 사라진 온전히 '개인'만을 존중하는 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저 김수영이라는 살아있는 역사는 궤도를 이탈한 별 정도로 이해되고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김수영 평전을 읽는 것보다도 더 김수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된 이 책을 읽고나서,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라는 시집에 실린 궤도를 이탈한 별-이 떠올랐다. 김수영, 그는 어쩔 수 없는 궤도를 이탈한 별이다. 순종이나 맹종이라는 궤도를 이탈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기를 원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내 가슴 속에 별 하나로 간직하며, 강신주가 쓴 김수영 이야기 감상을 마무리한다.

 

사족하나-강신주는 열 번에 걸친 김수영에 대한 강의를 녹취하고, 정리하여 사랑스러운 책으로 만든 편집자 김서연의 수고를 잊지 않고, 표지에 편집자의 이름을 적었다. 편집자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인문사회 출판시장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강신주의 주장이다. 편집자 김서연은 편집자의 말에 '네가 옳다'라고 '네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처음으로 말해 준 사람이 강신주 라고 했다.

여전히 선 자리에서 궤도를 이탈한 자가 되길 꿈꾸는 나에게, <김수영을 위하여>는 영원히 내 가슴에 담고 싶은 자유인 김수영 외에도,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아름답게 공명하는 두 사람을 알게 한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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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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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시간, 돈이 만능은 아니라는 규율 교사의 훈계와 같은 제목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었다. 사실은 그다지 흥미를 끄는 책은 아니었다. 굳이 읽지않아도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뿐더러, 이전에 읽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 만으로도 이 책이 어떨것인지는 충분히 가늠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돈으로 사서는 안되는 것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양심, 도덕, 관습 등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천박한 경제논리와는 구분하기를 원하고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경제논리는 생활 깊숙히 스며들어 무엇이 경제적 가치와 구분되는 도덕적 가치인지 조차도 모호해진 채로 생활하고 있다. 

샌델의 비유대로 이를테면 출퇴근 시간의 유료도로(돈을 내면 빨리 달리수 있는 차선)라던가, 또는 전담의사제를 통한 신속한 진료, 무료음악회나 공청회의 암표거래 등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볼 때, 과연 그런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란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돈을 낸다면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다는 논리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본 뼈대가 아니던가.

샌델에게 묻고 싶다. 시간이 곧바로 황금과 연결된대서만은 아니겠지만, 각종 강연 외에도 숨돌릴 틈 없이 바쁠 샌델 교수의 경우, 전담 의사제도를 이용하지 않은채로 진료표를 뽑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몇시간 혹은 몇 날을 투자해 진료순서를 기다리고 있는가, 강연을 위해 혹은 이번처럼 새로운 책 홍보를 위해 우리나라와 같은 먼 나라를 여행할 때 '맞춤 특권'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이미 VIP로서 본인이 따로 원하지 않아도 다각도의 특별 서비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약에 중독되거나 에이즈에 감염된 산모에게 돈을 주고 불임수술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인가. 그렇다면 마약에 중독되거나 에이즈에 감염된 태아를 출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닌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출생이전부터 잘못되는 것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 도덕인지 샌델에게 묻고싶은 것이다. 샌델이 그토록 주장하는 공공의 선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나는 이전에 읽었던 두 책,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주장했던 우리가 도달하고 이루어야 할 '공공의 선'의 의미마저, 이 책을 읽으므로서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해서 이 모든 저작의 시발점이 된 샌델이 29세에 썼다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정의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지난 3월에 멜론에서 출간되었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샌델의 주장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는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샌델은 모든것이 시장주의로 환원될 때의 문제점으로 두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불공정에 관한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근본적인 가치의 부재를 들고있다. 첫번째 불공정에 관해서는 이미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다소의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기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문제라면 누구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민주의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는 것, 혹은 태어난 후라도 선별해 선택하기 힘들뿐더러 갈수록 전세계의 '자본주의화'에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본가치에 관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은 무엇이나 거래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같이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한 것라고 샌델은 말한다. 그러한 대가에 관한 것이라면, 전자의 '불공정'의 문제보다는 더 유의미하다 라고 본다. 이미 시장만능주의 사회 곳곳에서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크고작은 일은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라면 샌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샌델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철학자는 아니라는 것에 나는 또한번 실망한다. 다만 문제를 잔뜩 물어놓고 자신은 쓰윽 빠지는 제스처를 샌델은 이번 책에서도 역시 고수하고 있다. 나로서는 바로 그점이 짜증난다. 서점에서 <정의의 한계>를 뒤적여 보지만 그다지 썩 끌리지는 않는 것이, 한동안은 샌델을 잊고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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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평전을 좋아합니다. 특히나 한 인물의 어린시절을 구체적으로 추척하는 평전을 무척이나 좋아하죠. 인간은 기질만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엘에 관한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늘 부족합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투쟁과 함께 치열한 글쓰기, 그리고 끊임없는 창조적 생각의 힘이 어디로 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늘 궁금합니다. 이 책에서는 어린시절과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을 돌아보는 작업을 조지오웰 글쓰기의 '원체험'으로 추적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몹시나 구미가 당기는 책입니다. 더군다나 번역본이 아닌 우리나라 저자로 부터 쓰여진 책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개인의 문제를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치부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심리학으로 부터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죠. 환경 속의 인간, 사회 속의 인간을 생각할 때 한 개인의 문제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을 뿐더러, 절대 개인적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개인, 소비, 사회, 복지.. 저의 요즘 관심사를 적어볼 때 꼭한번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가 사회학입니다. 때문에 피터 버거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에서 알고싶은 것은 '어쩌면 사회학자가 될까'일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그 답일 것도 같은데요, 6월에 가장 읽고 싶은 책입니다.

 

 

 

2009년에 출판된 한승헌 변호사의 자서전이 새롭게 개정되어 출판되었습니다. 꼭 읽어보고 싶던 책이였는데 개정판이 나올때까지 결국 읽지 못한 책이 되었군요. 이 기회에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골라봅니다. 어쩐지 자선전이라면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지만, 여러사람으로 부터 놓치지말고 읽어보라고 추천받은 책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꼭 한번 읽어야지 작심하는 것은 이 책은 그대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인인 나로서는 제목이 너무도 불경스러워 그냥 지나치고 싶은 책이였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밤에 급 삽입하게 되는 책입니다. 책과 혁명의 관계라니, 혁명은 피를 통해서만 쟁취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책은 그렇지만은 않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혁명이 책을 통할 때 더욱 확고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지만, 혁명의 속성이 한꺼번에 뒤집는 급작스러움을 꿈꾸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본다면 책을 통한 혁명은 너무 은근해 마치 미적거림처럼 느껴질 듯도 한데요...

이 책을 읽고나면 독서태도를 조금은 달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장정일의 추천사에 기대서 읽고싶어진 책입니다.

 

 그 외에 '나와 너'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생을 기록한 박홍규의 <마르틴 부버>까지를 이 달의 읽고 싶은 책으로 꼽아봅니다만, 적다보니 대체로 이 달의 책으로는 한 사람의 생, 또는 업적에 초점을 두고 고른 책들이 대부분이네요. 뭐 꼭 제가 추천한 책이 다 선정되는 경우는 없으니, 그저 부담없이 이정도로 정리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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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06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전을 참 좋아하는 편인데, 예전에 노라, 였던가요, 제임스 조이스의 아내의 평전을 추천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지난번의 카프카 평전도 참 만족스러워서.. 우리나라 저자가 쓴 평전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이 가는 편이라.. 조지오웰에 관한 평전도 궁금하네요.

비의딸 2012-06-07 08:48   좋아요 0 | URL
가연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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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다가, 정작 내가 김수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았다. 경찰이나 관리에게는 힘도 못쓰면서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비굴함을 자책하며 자신이 얼마나 작으냐고 묻는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를 읽고 느낀 전율과 그가 만취한 채로 버스에 치여 어느날 비명횡사했다는 것 외에는 그가 <풀>의 김수영이라는 것도, '자유'를 떠올리게 하는 시인이라는 것도 몰랐으며, 어쩌면 김수영이 시인이였다는 것조차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 맞다. 나는 어렴풋하게 그가 저널리스트이거나, 혹은 저항작가 이거나 쯤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거대한 뿌리>라는 제목의 시집인데, 그중 제대로 읽은 시라고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 정도이고, 산문같기도 시같기도 한 다른 작품들은 읽어도 공감하지 못하고 무슨말인지 이해못해 오랫동안 던져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2003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김수영 전집 중 2권 '산문'을 가지고 있다. 그 역시 언젠가 김수영을 이해하고 말겠다고 몇년 전 구입한 책이지만, 아직 목차조차도 읽지 못하고 책장에 고히 모셔두었다.

 

 

그러니까 내게 김수영이란 알고싶지만 당장은 아닌, 혹은 모르지만 아는척에 두고 싶은 '허영'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강신주가 쓴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게되자, 작정하고 김수영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부랴부랴 김수영에 관한 책을 찾았다. 1981년 시인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이 2001년에 실천문학사에서 개정되어 나왔지만, 어쩐일인지 책은 품절된 채 어느곳에서도 구입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도서관의 책은 관외대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운 좋겠도 중고서점에서 <김수영 평전>을 만났다.

 

환경 속의 인간이라고, 타고난 기질보다는 나고 자란 환경과 주변체계로 부터 한사람이 만들어진다고 믿는 나는 평전을 좋아한다. 물론 주변체계가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받아들이는 본인의 기질이 문제가 있다면 그역시 무용지물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나'라는 인간을 만드는데 그다지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고 믿음으로써 나의 현재를 위로한다. 또 하나 평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는 훌륭하지 못한 체계 속에서 성장했지만, 아이에게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되도 않는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전을 읽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주변환경과 관계 없이 타고난 '기질'이 중요하더라는 것이다. 되는 나무는 어떻게든 되더라는...

 

 

김수영은 자유주의자 였다. 그가 자유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남으로 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고유한 자신의 성질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구한말 땅부자였던 조부 아래서 태어난 첫자식 아닌 첫 자식으로 허약한 체질 때문에 더더욱 귀하게 자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어린시절 그는 항상 가족의 중심이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 했고, 돈벌이를 위해 글을 쓰고 번연을 하는 것을 고역으로 여겼으면서도 원고료를 목표로 작업을 계속했으며, 원고료 독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도 어린시절 허약한 자신을 중심으로 돌던 가족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그가 자유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이 6.25 시절 의용군에 강제로 징집되었으며, 목숨을 건 탈출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이념은 인간의 자유에 걸림돌일 뿐이다. <김일성 만세>라는 시는 그래서 탄생된 시이다. 자유정신은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에 있으니까.

모든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 그것은 내가 추종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모든 권력으로 부터의 해방. 내 어린시절에는 무슨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권력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일까.

그러나 그는 아나키스트는 아니였다. 그 역시 돼지같은 설렁탕 집 주인년에게 작은 권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적 권위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한때 자신을 배신했던 아내 김현경을 용서하지 못했으면서도 수용했다. 무엇때문에..? 최하림이 정리한 <김수영 평전>에서는 그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다. 그저 아내의 물질적 욕심을 책망하는 시를 쓰기도 하고, 아내에게 작은 폭군처럼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던 내용을 적고 있기도 하지만, 아내의 배신에 대해 보인 김수영의 정신적 방황이나 고뇌는 의외로 소소하게 다뤄졌다. 아마도 이 책의 상당부분이 그의 노모와 아내의 구술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할 뿐이다.

책에서는 문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근대시와 현대시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시인들과 그가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새삼 놀라기도 했다. 김수영이 이렇게 오래전 또는 아주 최근의 시인이었던가. 살아있다면 팔순을 넘겼겠구나. 어쨌든 그는 행복한 시인은 아니였던 것 같다. 시대적으로 불행했으며, 개인적으로도 그랬다. 그가 느낀 소소한 행복은 어떤 것이였을까. 그에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제 <김수영 위하여>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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