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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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9년, 브랜다이스 대학 체육관에서 과 대항 농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 팀이  뛰자, 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응원 구호를 외친다. "1등은 우리 것! 1등은 우리 것!" 모리 교수님이 부근에 앉아 있다. 그는 이 구호에 어리둥절해 한다. 그래서 "1등은 우리 것!" 하고 외치는 중간에, 벌떡 일어나서 그는 소리친다. "2등이면 어때?" 학생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들은 구호 외치기를 멈춘다. 선생님은 앉아서 승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204쪽)

 

이 책을 그저 자기계발서나 힐링서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베스트 셀러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그랬지만, 저 둘 중 한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해서 오랜시간 기피한 책이였다. 5년 전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노은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처음 이 책을 읽었던 그때도 고운 시선으로 온전히 책을 읽지 못했다.

 

공경희의 북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다 다시 읽고 싶어진 책이라 책꽂이를 오래 뒤져 찾아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5년 전의 그때는 몰랐었다. 이 책은 노학자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는 힐링서이기도 하지만, 한 사회학자가 바라본 사회심리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어느 사회분야 책보다도 훌륭한 공동체 문화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노은사가 죽기전에 유언처럼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읽어보니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모리가 십대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모피 공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보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분이였다. 이것은 요즘의 내가 고민하는 일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해야만 생존 가능한 자본주의 시대를 처절하게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년 전에는 책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역시 그때그때의 상황, 감정, 그간 알게 된 것들에 비례해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보는 것처럼.

해서 나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기를 즐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다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가수인 미치의 아내가 화석처럼 굳어가는 모리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에서 코가 시큰했다. 돌처럼 굳어버린 육체 안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리의 정신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어.'(109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은 한 참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 어느때고 덮쳐 올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면, 그 많은 욕망들을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죽음'을 먼 일로, 욕망에 전력투구 하는 동안에는 절대 덮쳐 올 수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세뇌한다. 누구든 자신이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어쩌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삶은 더 나긋나긋 해 질터인데.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좋은 환경이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리를 통해 확인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끌어안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8살때 병사했다. 모리는 어린시절부터 따뜻한 사랑을 그리워해왔으며, 자신은 자식이 생기면 그를 끌어안고 키스해주는 아버지가 되주마고 맹세했다.

어떠한 자극(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속에 성장하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르게 성장할 수 있다. 자긍심,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심어주는 것이 아닌 자기 내면에서 길어올리는 우물과 같은 것이다. 모리는 자신을 믿는 마음과 주변 사람들을 믿는 마음을 끊임없이 길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변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175쪽)

 

온전히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함께 하는 대상과 오롯이 함께 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음악을 들을 때는 물론이고, 책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은 금방 딴 생각으로 채워지기 쉽상이다. 하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내 머릿속은 그순간에 전혀 필요치 않은 온갖 것을 찾아 헤맨다. 그러면서도 상대와 함께 있노라고 입은 줄곧 말하는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내 머릿속의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온전히 함께 했다면, 모리 교수의 진심을 더 일찍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왜 모리와 같은 스승이 없었을까. 내 이야길 들어주고, 내 생각을 물어봐 주는 그런 스승이 내 삶에는 왜 없었을까.  설사 그가 병에 걸려 띄엄띄엄 말할지라도 눈빛과 목소리로 나를 깨워 줄 수 있는 스승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정말 없었을까? 혹시 내가 마음에 문을 꼭꼭 걸어두고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오년 만에 다시 모리 교수와 함께 일요일을 보내며, 내 삶에도 모리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좋았겠다 하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나마 책으로 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감사 할 일이긴 하다. 아, 책으로는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만남이니 더 감사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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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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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료한 일상 속에 어느덧 찾아든 작은 설레임은 격정으로, 격정은 다시 무덤덤한 일상으로... 그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 그 끝에 있는 것은 헤어짐이거나 동료애, 우정 혹은 연민 같은 것으로 남겨지며, 이런 것들이 세월을 덧입으면 '정'이라는 이름으로 끈끈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수순인 것 같다. 간혹 무덤덤해진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맞게 된다면 일상은 다시 격정으로, 설레임으로 역순하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랑에는 수명이 있다. 적어도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함의한 에로스적  '사랑'에는 말이다.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도 그랬다. 설레임이 격정으로 변환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불과 하루 반나절하고 30분쯤) 격정이 일상이 될 즈음 샹탈은 권태를 느낀다. 남자들이 더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슬픔어린 그녀의 토로는 나이어린 애인을 향한 투정 아닌 투정일 수 있었겠지만, 장 마르크에게 그것은 샹탈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며, 그녀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혹은 그녀 스스로 나태해져 자신에게 더이상 여자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일종의 불안을 느낀다. 장 마르크는 연상의 여인 샹탈과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모종의 사건을 계획하고, 샹탈은 샹탈대로 연하의 애인 모르게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데...

 

이야기는 재미있고 밀란 쿤데라의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간소하지만, 장면들은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꿈 속인지 현실인지 종잡을 수 없고, 상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나 스스로 샹탈이 되어 보았다. 어느날 문득 알 수 없는 존재로 부터 날아온 연모의 편지를 읽은 나는 샹탈과 마찬가지로 한결 생생해지고, 활기차 진다. 알 수 없는 누군가라는 것에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겠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시선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남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여자로서의 자긍심(?)은 나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더 살만하고, 더 행복한 세상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정체성.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내가 '나'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정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타인의 존재는 필요하다. 내가 '나'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상은 마침내 의외의 사건 앞에 다시 격정으로 이어지고, 얼마간의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또다시 권태로워지겠지. 의심하겠지. 서로에게 상대가 최선인지를. 그것이 이른바 사랑이며, 인간은 사랑에 의해 더더욱 풍부하고 자긍심 넘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맞다면,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은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이 편지를 쓴 사람이 그라는 것을 짐작했다면 무슨 이유로 그녀는 그것을 그토록 적대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해 놓고 왜 그 속임수의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그의 어떤 면을 의심하는 것까? 이런 모든 의문에 대해 그는 오직 하나의 확신만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긴 그녀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생각은 전혀 반대되는 방향을 취했고 그 두 방향은 더 이상 만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35쪽)

 

사랑에 위대함이 있다면 그것은 평범을 더이상 평범으로 존재하지 않게 한다는 거다. 일상이 더이상 일상일 수 없게 하는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샹탈이 원했던 것은 장 마르크의 일상적 사랑이 아니라, 미지의 남자로부터 받는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누구나(?) 원하는 사랑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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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율리 체 지음/장수미 옮김/민음사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교되는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읽고 싶은 책.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그리고 김일성 만세/김영종 지음/호호호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려대니...

그것만 인정하면 되는 것이 우리 삶에 대한민국에 어디 한가지 뿐이랴.

김수영을 기억하며 새로운 시도인 김영종의  단편소설을 읽고싶다.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조반니 베르가 지음/김운찬 옮김/문학동네

이전에 읽은 이탈리아 문학이 있던가? 어쨌든...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도시 마콘도를 기억하며..

 

 

 

 

 

 

 

 

여자의 빛/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 니까.

죽기 3년 전에 발표한 작품이라니까.

원나잇 스탠드를 사랑으로 착각한 이야기라니까.

거기에 김남주 번역이니까!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데니스 루헤인/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오오...12월에 출간되었는지 모르고 지나쳤다가, 1월 14일 이제서야 읽고 싶은 책으로 급하게 추가한다. 아이고 저런. 너무 늦었네.가만있어보자 데니스 루헤인의 책은 '비를 바라는 기도'만 읽었다.

정여울은 이 책의 첫장면에서 영화 '신세계'를 떠올렸다 했다. 그 왜 시멘트통에 사람이 들어가있고, 주변으로는 조폭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그 장면.

어젯밤에는 40대 가장인 조폭의 비애를 다룬 영화를 보았다. 송강호주연의.. 음, 아무리 벗어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조폭 운명..? 그 모든 것이 죽어야만 끝날 업보려니. 아마도 <밤에 살다> 주인공의 운명도 그렇겠지. 아, 너무 늦었지만 13기 마지막 소설로 <밤에 살다>가 선정되면 정말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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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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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십대들이 보여주는 삶의 지향이나 행태는 획일화된 외곬으로만 치달은 나머지 살벌한 경쟁 자체가 '모범적인 삶'으로 바뀌어 있다. 사회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을 바람직한 사회생활로 이해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평생을 학습능력 하나로 '단죄'받고 사는 시스템 따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력차별(학력위계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더 열심이고, 자기계발서를 인생 최고의 경전인 듯 떠받들며 안으로는 극단적 자기관리의 고통에 피가 마르면서도 밖으로는 사소한 경쟁우위를 위해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까지 여긴다. 도대체 무엇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걸까? (머리말 중에서)

 

현재 우리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현병호의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를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야 겨우 살아남을까 싶은 경쟁으로 부터 내 아이만은 자발적 탈락했다고 좋아라만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열다섯이 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강사이고, 이 책은 2008년 부터 시작해 5년간 쓴 박사논문을 일반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재구성한 것이다. 경쟁을 모범적인 삶이라고 여기며 오늘도 '닥치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이십대 대학생들이 경쟁우위에 서기 위한 경주에서 어떠한 차별도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경위에 대한 연구이며, 지은이는 그 배후에 노력하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다는 식의 '자기계발의 논리'와 그를 배양하고 양산하는 '자기계발서'가 있다고 주장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오늘날에는 대학 졸업생의 80%는 비정규직에 내몰릴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등장하는, 혹은 지은이에게 강의를 듣고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재 비정규직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기계발에 게을러 비정규직이 된 그들은 자기계발에 몸바쳐 헌신하는 자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모든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는 불합리한 사회적 함의와 이를 확산하는 자기계발서에 큰 책임이 있다라고 보는 것인데, 이시대의 자기계발이란 진정한 자기함양을 위한 계발이 아니라 고용인으로서 회사에 철저히 충복하기 위한 개발을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십대가 스펙을 쌓고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어떻게든 취업을 하겠다는, 비정규직이 되지 않겠다는,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절체절명의 몸부림인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서점 판매 순위 1~10위에 있는 이십대 관련서 중 8~9종이 자기계발서라고 지은이는 밝히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자기계발과 스펙을 쌓기위해 없는 시간도 쪼개 쓰며, 지칠때마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려니, 전투적인 자기계발 짬짬이 멈춰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살피면서.

 

오늘날의 이십대들이 경쟁을 위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는데, 불안의 이유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찾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마는 것이 물론 자기계발서나 힐링서 때문 만은 아니다. 단지 자기계발서 때문이라면 차라리 더 문제가 쉽겠지만, 그 이전에 유아 시절 부터 '나'를 먼저 강조하는(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교육이 문제일 것이고, IMF시대를 지낸 부모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 양육과정에서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며, 공동체의 공존보다는 경쟁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사회구조적으로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안이겠는데,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125쪽) 나가는 것이다. 이에 지은이는 대안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 시발일 수 있다고 보았다.

 나 역시 지은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그 대안을 생각할 때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남을 끌어내리는데 설마 이정도까지 유치하고 각박할까 싶은 것이다. 지은이는 왜 우리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공감하는 게 자기계발 권하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지 않겠는가(195쪽)고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추상적으로 들린다. 자기계발 논리의 배후로 말하자면 자본일 것인데 말이다. 그것도 거대 자본이.

역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 탈락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자발적 탈락자들은 어쩌면 패배자로 매도되기 십상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은 높은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허황된 믿음에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올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십상일 텐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좀 널리 두루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적어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보다는 멈추면 보이는 것들 보다는. 그래서 아픈 것은 청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멈춰서 봐야 할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공동체의 존립 속에 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그래야만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이니까.


"대개 사람들은 위협당할 때 형편없어지네. 그런데 우리 문화가 사람들을 협박하거든. 우리 경제도 그렇고. 우리 경제 체계에서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위협을 느끼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야. 그리고 사람은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 자기만 생각하기 시작하네. 돈을 신처럼 여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다 우리 문화의 속성이라구."(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세종서적/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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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 - 흔들리는 부모들을 위한 교육학
현병호 지음 / 양철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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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앞에서, 교육 앞에서 자신만만한 이가 어디 있으랴. 외출타기를 하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같기도 하다. (6쪽)

 

그런데 아닌 것 같다. 교육 앞에서, 삶 앞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나뿐'인 것만 같다. 모두들 저렇게 당당한 얼굴로 자신있게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날마다 흔들리고 매 순간마다 흔들리는 것 같다. 삶 앞에서, 아이의 교육 앞에서는 더더욱...

 

아이가 대안교육을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되었다.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중고등 과정의 대안학교에 진학했다(진학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초등 6년 과정 중, 저학년 3년 동안은 학교 생활에 남들보다 뛰어나게, 혹은 남들만큼 적응시켜보려고 동분서주 했고, 그 후 3년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호시탐탐 대안학교를 넘보게 되었다. 주위에 대안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가 없어 나름 각개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모르니까 일단 규모가 적은 곳은 기피하게 되었다. 이왕이면 대안학교도 이름이 알려진, 나름 탄탄해 뵈는 학교였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탄탄한 대안학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학교는 편입이 쉽지 않았다. 해서 초등기간에 훌쩍 정규 교육을 포기하는 대담함은 감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 집 가까이의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름 큰 모험이었다. 물론 입학하는 순간까지도, 아니 어쩌면 지난 일 년간 내내 제도권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를 고민했다(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어느 중학교 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선택하기 까지 격월간 <민들레>의 힘이 컸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던 무식한 엄마로서는 누군가 바람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대안학교에 대해 알리는 것조차 꺼렸을 것이다. <민들레>를 통해 알게 된 작은 대안학교들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런 학교들이었다. 내 아이의 자유로운 영혼을 있는 그대로 숨쉬게 해줄 바로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지난 일 년간 무수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나태한 모습에 그랬고, 생각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학교 규모 때문에도 그랬고, 운영위원이니 대표니 학교를 이웃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선생님들의 온갖 시중들기를 마다하지 않던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모습에 기가 질렸던 나는 대안학교는 더더군다나 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어서도 그랬다.

 

그런가하면, 입학 전 캠프나 사전 합숙을 통해 대안학교를 체험하고 두말없이 대안학교를 선택했던 아이도 역시 학기 중간 중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고사를 잘 보았냐고 묻는 초등학교 친구의 말에 그랬고, 수학이나 영어의 수준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서도 그랬고,  공강이 있을 때 자기가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럽다고 했다(겨우 열 네살이 된 아이 입에서 자신이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그동안 아이를 많이 닥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선뜻 일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우리 모자는 흔들리면서 첫 대안교육 일 년을 보냈다.

 

흔들렸으면서도, 흔들리면서도 대안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역시 해보니까 알겠다는 거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무익함을, 그 횡포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은 대단한 행운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혹은 아이에게 일조하라는 그런 거창한 포부는 없다. 단지 오늘을 즐기는 아이가 내일도 역시 즐겁게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학력은 부족할 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내는 실력만큼은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더 느린 템포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만큼 신중한 아이인 것이다. 한 때는 그것이 세상살이에 큰 해가 되지싶어 아이를 닥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아이가 달팽이보다 더 천천히 걷는다 해도 그 아이의 걸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정해진 규율대로만 움직이며, 보이는 고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야 그나마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가 제 머리로 생각하고, 가끔 자주 옆길도 흘깃거리며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해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이 책은 격월간 <민들레>의 발행인 현병호 선생님이 지난 10여 년 동안 <민들레>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처음 대안교육을 고민할 때 <민들레>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지난 1년 간의 대안학교 생활을 생각해 보며 2013년 한 해를 정리해 보자는 의미에서 연말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흔들리는 마음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잡을 수 있었고, 역시 우리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학교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대안교육을 선택할 때 바로 이점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기도 하다. 좋은 학교, 좋은 교사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아이가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것이다. 그것이 대안교육 역시 또다른 형태의 교육과잉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현병호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대안교육이 만능은 아닌 것처럼, 이 책 또한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와 교육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이유를 아는 이라면, 그가 부모이든 교사이든 혹은 그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대안교육과는 무관하게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책이니까 말이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교육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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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1-1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앞으로
늘 느긋하면서 아름답게 하루하루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그동안 비의딸 님도 즐거우면서 느긋한 삶을 함께 누리셔요~

비의딸 2014-01-14 10:1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란 말이 참 좋아요.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 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