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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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사랑일까>는 앨리스와 에릭이 사랑하고 고민하고 결국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소설로, 이를테면 연애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보아도 좋겠다. 누구와 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사랑했던 두 사람은 무엇때문에 어떤과정을 거쳐 헤어지게 되는지를 두 남녀의 연대기적, 지역적, 심리적 분석을 통해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수많은 철학과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한 것이 과연 세간의 평처럼 놀라우리만치 지적인 연예소설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 주장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은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앨리스는 광고회사에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는 얼핏 냉소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강박증에 가까울 지경으로, 예를들면 소수의 특권층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막상 새로 사귄 애인이 그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예약 해두었다는 것을 알고나자 레스토랑에 대한 시선이 싹 바뀌는 식이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나와 맞지않다거나 내가 좋아하지 않아 무시한다는 식의 허세를 부려보지만 사실은 대상에게 거부당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갈망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앨리스인 것이다.

그런 앨리스는 어느날 파티에서 마음에 썩 드는 남자 에릭을 만나고, 그들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며 그 이후의 순서는 매우 도식적이다. 그러나 앨리스가 사랑하는 남자는 에릭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존재해 있던 매력있는 남자상을 에릭으로 부터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앨리스에 대한 에릭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지만, 어찌보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만든 이상형에 대한 갈증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일면을 보고(대개는 외모겠지만) 반한 상대의 보이지 않는 면까지를 상상하고, 그에대해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문득 상상했던 그 모습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랑은 삐걱거리게 되는 것이다.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74쪽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이유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남자 에릭과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건 비록 아무것도 아닐 때일지라도 그저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함없는 사랑의 맹세를 필요로 하는 여자 앨리스의 이별은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만큼이나 정해진 순서인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에릭의 생각에 가까운 편으로,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더라도 결국에는 상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포들의 조합일 뿐이라는 우리는 매순간 다른 존재가 되며, 그렇더라도 매순간 '나'는 한결같은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랑하기 이전의 다소 침울한 모습도, 사랑에 빠져 세상 모든 것을 경이롭게 여기는 모습도 역시 '나'라는 것이다.

처지에 맞지 않아 아예 처음부터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손사레 치던 레스토랑을 그곳에서의 단 한번의 식사로 내 인생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여기게 된다고 해서 레스토랑을 가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구두 끈을 매는 모습이 매력적인 것도 '나'이며, 걸을 때 무게 중심을 뒤에 두어 신발이 뒤축부터 볼썽사납게 닳게 하는 것도 여전히 '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두끈을 매는 모습에 한 눈에 빠져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후 구두 뒤축부터 닳게 하는 그의 걸음걸에는 혐오감을 갖는다해도 그 사랑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뭉뚱그려진 것이 아닌 한겹 한겹이 모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과 그 후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에 대한 연대기적이고, 지리적이며 또한 심리적인 그 모든 관점들의 해석이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사람은 정체되어서는 살 수 없는 유기체이고, 사랑 또한 움직이는 것이니까.

 

에릭과 결별 후 앨리스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일 때 조차도 자신을 사랑해 줄것으로 여겨지는 필립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결말이 나지만, 이 역시도 에릭의 경우와 크게 다른 사랑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해 본다. 결국 사랑은 내 머릿속의 이상형과 나누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했다는 동어반복적인 묘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 된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사랑일까'이기 보다는 '우리는 사랑할까' 혹은 '우리가 사랑을 알까'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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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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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유전자란 게 말이야, 그 뻐꾸기 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몸에 쓰윽 들어와 있으니 말이야. 신고가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건 내가 녀석의 피에 뻐꾸기 알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야. 그걸 본인이 고마워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395쪽) 

 

히다 카자미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타고난 스키어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 경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세 살 무렵부터 스키를 배웠고, 그후로도 스키를 멀리 하지 않은 채 스키선수로 성장했다. 더구나 그녀는 스키를 좋아하고, 경주를 통한 경쟁을 즐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재능있는, 타고난, 무한가능성이 있는, 장래가 유망되는 스키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도리고에 신고는 스키선수로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났지만, 불행히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스키라고는 타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스키를 선망했던 것도 아닌 그런 평범한 학생이다. 그러던 어느날 누가 보기에도 '행운'이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 스키선수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지만, 기타리스트가 꿈인 도리고에 신고에게 스키선수가 되라는 것은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선고'로 들린다.

 

하고싶은 일과 재능이 일치할 때 그보다 더한 행운이 있을까. 하고싶은 일은 뚜렷한데 그에 대한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을 비교적 자주 보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타고난 작가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 체조선수를 갈망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도대체 도약하지 못하는 체조선수, 의사가 되어 여러사람 살리고 싶은데 피만 보면 그야말로 피가 역류해 의사로서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의과대학생.

그런가하면 그에 반대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좋아하는 일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도리고에 신고 같은 경우 말이다. 이런 경우 재능과 하고싶은 일 가운데 도리고에 신고가 택해야 하는 길은 무엇일까.

유전자를 연구 조사해 스포츠 선수의 재능을 과학적으로 발굴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지도와 투자를 기울이므로써 회사의 수익을 노리는 한 대기업의 스포츠 과학 연구소는 카자미와 신고를 영입한다. 그들은 스키어로 대성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드러나는 카자미의 태생에 얽힌 비밀은 이 책을 마지막까지 몰고가는 견인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고의 역할은..?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역할이 무척 궁금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폐인이 있을만큼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을 보장받는 작가지만, 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와 그를 혼동할 만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작가이다. 따라서 그의 책도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를 처음으로 읽었다. 책은 처음 손에 쥘 때부터 마지막까지 한호흡으로 읽어낼 만큼 흥미진진했는데, 책을 읽으며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다만, 책을 덮고나서 궁금해 진 것은 재능을 발굴하고, 그에 맞는 지원으로 그를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좋은일 일까, 나쁜일 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재교육이니, 맞춤교육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어린나이에 아이의 재능을 미리 알아보고, 아이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인재로 육성하자는 것인데, 그는 국가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좋은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새삼 그것이 좋은일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의혹이 생긴 것이다. 재능과 적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50의 노력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 재능 하나로 100의 노력을 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똑같이 100의 노력을 한다면 결국은 재능이 승부를 가른다. (10쪽)

 

재능을 찾아내어 인재로 육성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운동에 적합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들을 발굴한다는 발상이 한단계 더 나아간다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운동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창조해 내고도 남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우성교배를 통해 찰진 옥수수를 만들어내고, 알이 굵은 콩을 만들어내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적어도 콩이나 옥수수가 아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재발굴과 재능교육이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기계이거나 쓸모에 따라 이용되고 평가되는 대상이 아니다. 기능적인면에서는 떨어지더라도 누구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해 운동선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체력을 지녔지만, 무엇보다 높은 심폐 기능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스키의 한 종목 크리스 컨트리로 극도의 성취감을 맛보는 후지이는 남과의 경쟁을 통한 승리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은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말이다.

주말, 일종의 기분전환용 영화를 보듯 아무 생각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뻐꾸기 알은 누구 것인가>는 할 수 있는 것과 하고싶은 것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주는 책 이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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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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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백민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혀끝의 남자>를 읽기 전까지는.

작가의 사적인 역사도 물론 그렇지만, 그의 소설을 단 한편도 읽은 일이 없었으며, 백민석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다. 나야 뭐 그저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정도의 독자이니, 내가 백민석을 몰랐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며, 아는 작가보다 모르는 작가가 더 많다는 것은 내게도, 작가에게도 그리 자존심 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10 전 작가 그만하겠다고 잠적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후 <혀끝의 남자>를 들고 다시 등장한 작가라고 했다. <혀끝의 남자>에 대한 홍보글을 읽다보면 유독 '절필 선언 후 10년 만에 복귀한 작가의 소설'에 방점을 두는데, 나는 그것이 전혀 놀랍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올 것이라면 절필은 왜 하나, 이런 경우는 구차스러운 '번복'에 해당하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만큼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백민석이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이다.

 

혀끝의 남자. 머리에 불을 이고 혀끝을 걸어다니는 남자라니, 도대체 그가 이승에 존재하기나 하는지 나로서는 영 감이 잡히지 않는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인도 여행기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약과 함께한 인도 기행문인데, 타지에 대한 낯설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마약에 취한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알 수 없을만큼 '알 수 없는' 단편이다.

두번째 이야기 '폭력의 기원'도 그랬다. 작은 절골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이야기는 무허가 판자촌 아이들의 놀이터인 작은 절골에서 무덤같기도 한 괴상한 틈새를 발견해 내는 이야기다.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냐. 폭력의 기원과 그 틈새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나는 여전히 그렇게 작가의 말에 어두운 귀를 달고 세번째 이야기 '연옥 일기'를 읽었다. 이 세번째 이야기가 작가 백민석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어지는 심정의 절정이였다 할 수 있는데, 이건 뭐 읽으라고 쓴 소설인지 작가 혼자만 알고있는 의미를 독백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책의 맨 끝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백민석은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이다.' 라고 했는데, 자기 혼자 음미하려고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나 싶은 의문이 들만큼 모호한 단편이었다. 어쩌면 시인의 그것처럼 작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 난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젠 그만 포기해야겠다 싶을 무렵에 읽은 네번째 이야기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부터 나는 백민석에 호기심이 생겼다. 삶에 치인 성년의 남자가 자신이 어린 시절 도서관 소년이였다는 것을 기억해 내며 한 서점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인데, 책을 매개로 쓰인 이야기기 때문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일 수도 있고, 드디어 작가의 일방적 독백이 아닌 이야기를 만났다고 생각해 반갑기도 했다. 그후로 여덟번째 이야기까지 속사포처럼 읽어나갔다. 특히 마지막의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은 무표정한 작가의 절필기이며, 필살기이기도 했는데,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백민석이라는 작가의 절필에 이르기까지의 고통,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의지 같은 것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았다는 것은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그가 불후한 어린 시절을 도서관에서 지나왔고, 그후로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았으면서도 어찌어찌 작가가 되었고, 작가로서 나름의 바닥을 치고 절필했다가 10년 만에 다시 펜을 세워 들었다는 정도를 알았을 뿐이다.

살고 싶어 글을 쓰지 않았다 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살만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아야겠기에 글을 쓴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나는 단편 '혀끝의 남자'를 두번 읽었다. 처음 책을 펼치며 읽었고,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며 한번 더 읽었다. 아홉 편의 단편과, 백민석의 귀향(?)을 손꼽은 평론가의 해설과, 10년 만의 귀향 후 가진 문단의 술자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자신은 좀 더 대범해진(좀 더 수용적이된, 좀 더 폭넓은 시선이 생긴, 좀 더 시크해진) 것 같다란 작가의 말 까지를 읽고나자 나는 백민석이 몹시 궁금해졌다.

백민석이란 작가가 궁금하긴 했는데, 표제작인 '혀끝의 남자'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혀끝의 남자'를 다시 한 번 더 읽었던 것이다. 머리에 불을 인 혀끝의 남자는 담배 모양의 대마이거나 해시시이며, '신'은 내 삶이 궁핍할 때 나를 거는 그 무엇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넘겨짚기 해본다.

 

작품해설을 보니 백민석이 작가로 돌아올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평론가는 백민석의 글은 분노의 문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민석은 자신의 분노는 문화적인 분노가 아닌, 생활에서 오는 분노라고 했다. 그제서야 무허가 판자촌의 어린 소년은 작가 자신이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은 평생 공부만 해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완고해 보여 실제 나이보다 더 노숙해 보이기도 하다. 특별히 잘나온 사진을 골라 실었겠지만, 어디에도 삶의 그늘, 무게 같은 것은 들여다 뵈지 않는다. 작가 백민석이 궁금한 것처럼 인간 백민석도 궁금해졌다. 책을 주문하고 몇 일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 주변의 서점들을 뒤져보지만 <혀끝의 남자>외에는 보유하고 있는 책이 없다했다.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몇 권 안되는 책이 그나마도 모두 대출중이었다. 결국 온라인 서점을 통해 두 권의 책을 구입하고 몇일을 기다리기로 한다. <혀끝의 남자>를 읽고 작가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백민석이 지나온 시간들이 궁금했다. 그래도 괜찮다면 10년 간의 공백에 대해 들려줄 후속작을 기다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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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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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80쪽)

어느해 겨울 길거리에서 선배가 정혜윤에게 했다던 이 말은 행동 대신 말을 앞세우는 내 문제이며, 내 약점이기도 하다.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곤 하는 손쉬운 감정이입 뒤에 숨은 것은 그와 같은 불합리를 겪는 것이 나는 아니라는 안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늘 당면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큰소리로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을 책 목록에 적어둔다.

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 이 한 문장 만으로도 이 책을 읽유는 충분했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 싫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책 이야기이되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녀의 책 이야기가 좋다. 그런 한편으로 개인적인 감정 난입이 조금 지루하거나 영 생뚱맞아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때도 있고, 간혹은 잰체하는 그녀의 문장이 영 싫을 때도 있다. 너무 감각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감각 노출증이 있다 할까. 항상 자신의 감정 최대치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할까. 나 역시 관음증자이기 보다는 노출증에 가까운 사람이니, 너무 되바라지게 보여주는 그녀가 가끔은 지루해지는 것으로 질투의 감정을 감추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혜윤의 책 이야기가 좋다. 책을 통해 끝없이 세상과 대면할 기회를 모색하며, 오로지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찾고, 인간은 끝없이 배워야 한다라고 되뇌는 그녀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딱 내 스타일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장식한 에피소드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에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유언처럼 남기고 간 글, '하느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가 귀에 자꾸만 울린다. 이처럼 정혜윤 그녀는 책 이야기 하기를 즐기지만, 그녀의 책 이야기 속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 좋다. 때문에 그녀의 책 이야기에는 앞으로도 계속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책을 덮고 나자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보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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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기, 머물다 - 공경희 북 에세이
공경희 지음, 김수지 그림 / 멜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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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풍의 힐링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가 무엇이든 개인으로 시작해 개인으로 끝나는, 그래서 지쳐 쓰러지더라도 책임을 다하고 끝끝내 희망을 잃지말라는 둥의 나긋나긋한 강요가 버겁기 때문이다. 고달프고 힘들겠지만, 그건 너 뿐만이 아니며 어떻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는 그야말로 예쁜 이야기가 그러니 '너도 정신차리고 살라'는 설교로 들리곤 해서 피곤해진다.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못할 때, 이상은 높되 현실이 받쳐주지 않을때는 차라리 애초에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힐링서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나름의 취향과 작풍이 있듯 번역가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번역하든 인문서를 읽는 것 같은 김석희의 번역이 있고, 뉘앙스와 분위기, 조근조근 느낌을 풀어주는 김남주의 번역이 있듯, 말하자면 공경희는 바른 정신 바른 생활을 모토로하는 '힐링풍'의 책들을 주로 번역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떻는 엄친아이며, 엄치아의 엄마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인생에 대한 부드러운 찬미를 즐기지 않는 나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은 많이 읽지 않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을 모아 보았다. <무지개 물고기>, <파이 이야기>,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템플 그랜든>, <굿바이, 찰리 피스플>, <우리는 사랑일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역시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읽은 책은 이보다는 많다. 그녀가 번역작가로 정식 데뷔한 첫 번역작이라는  시드니 샐던의 <시간의 모래밭>을 비롯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머니가 된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등등...  그리고 그 유명한 <마시멜로 이야기>까지.

책 좀 읽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두권 쯤 공경희 번역의 책은 읽어보았을 만큼 대중적이면서, 오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책들을 끊이지 않고 작업해온 번역자 중 한 사람임에도 단지 좋아하는 분야의 번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은 많이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꼭 인생을 찬양하는 분위기의 아름다운 글들 만을 번역했던 것은 아니였다. 책 뒤에 실린 그녀의 번역서 목록을 보다 보니 다소 당황스러운 책들도 있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거나,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와 같은 스릴러부터 유아용 그림책까지 넓게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아, 글쎄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들을 그녀가 번역했다는 것에서는 정말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는 분야를 아우르며 작품을 선택하되, 그녀만의 독특한 작풍을 유지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무엇을 읽든 자기만의 독특한 감상을 남기듯, 번역 또한 역자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테니까. 그래서 번역은 또 하나의 문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의 북 에세이 역시 그런 느낌의 글이다. 번역한 책 중 오십권 가량을 골라 각 책에 실린 '옮긴이의 글'을 옮기고, 그에 대한 현 시점의 감상을 적었는데, '옮긴이의 글'이라지만 딱딱하지 않고, 그녀 특유의 느낌을 살려 번역자로서의 전문성보다는 독자로서의 감상에 치중한 글들이다. 전문적인 서평보다 개인적 감상글을 좋아하는 나는 갓구워나온 말랑하고 부드러운 식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처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앨리스 스타인바흐가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떠난 <앨리스, 30년 만의 휴가>를 번역하는 동안 그녀는 '부럽다'라는 느낌을 반복해서 받았다 했는데,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는동안 내내 나 역시 '부럽다'라는 생각이 반복해서 들었다.

부럽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라고 고백했지만, 다행히도 번역작가라는 일이 그녀와 잘 맞아서 이십 오년 간 쭈욱 쉬는 날 없이 일하고 있다는 것도 부럽고, 큰 고비없이 물이 흐르듯 그렇게 유유히 흘러온 그녀의 인생도 부럽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을 보고 지나가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너도 번역작가 하지 그랬어? 잘했을 텐데.' 툭 던지고 가는 그 한마디에 공경희라는 역자가 내게는 끝끝내 부러움으로 남게 되었다.

 

책을 읽다 불현듯,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읽고 싶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세간에 알려진 만큼의 감동이 없어 조금 실망했던 책이었는데, 독자들은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부분에서 대부분 감동을 받지만, 역자인 자신은 착취하지 않는 인생에 대해 집중했다는 공경희의 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서 잠시 책을 접어두고,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오년만에 다시 읽어 보았다. 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정말 좋은 책이라는 것을. 죽음을 앞둔 노학자에 대한 어설픈 동정과 아직은 죽음이 멀었다고 여겨지는 내 삶에 대한 안도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골똘한 물음의 책이라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역시 '옮긴이의 글'은 본문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개별적인 글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원서로 책을 처음 읽고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번역자는 그저 글자만을 옮기는 단순노동을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역자가 감동하지 않은 글은 독자도 감동할 수 없는 법이다.

 

출판사에서 외국 출판사와 에이전시와 어렵사리 계약한 책을 나를 믿고 번역 의로하고, 몇 달이나 기다린 끝에 원고를 받아 책으로 엮어내는 일, 그 책이 세상으로 나가 독자에게 찾아가서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 여정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그러지면 나는 그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할 수 없고, 독자 여러분과도 만날 수 없다. 수개월에 걸친 그 과정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기적이다. 거기에는 기대가 있고 믿음이 있고 약속과 성실이 있다. 불면의 밤도 있고 성취의 기쁨도 있다. 때로는 무력감을 낳고 피로가 쌓이고 낙심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설렘과 부끄러움과 보람이 있다. 그러니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어느 밤의 작업'은 분명 기적이다.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허락해서 그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으며, 글 속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 여러 인물과 만나며, 거기 담긴 모든 것을 우리 글로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내게는 기적이다. 크나큰 기적.(172쪽)

 

그녀가 번역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잘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번역한 그녀의 책들이 마치 자식과 같다 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번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기적'으로 이해한다. 나는 그녀의 말을 오롯이 그대로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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