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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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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식민지 시대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겪은 후 우리는 한마디로 '발전'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허리띠를 졸라매 왔다. 경제적 성장을 통한 발전은 다같이 잘 사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오늘날의 GNP와 GDP 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다같이 잘 살게 되었는가. 이웃을 생각하며 서로의 몫을 나누고, 환경을 돌볼 줄 알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같이 잘 살수 있는 공정한 세상을 원했는데 지금 이시점의 현실은 갈수록 양극화로 치닫고 일 할수록 가난해지고 있는 실태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발전이란 결국, 세계화라는 그럴싸한 미망에 덮인 획일주의 내지는 전체주의의 다른 모습일 뿐인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발전'의 개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성장과 발전을 경제와 동일시 하면서 전지구적 자멸은 시작되었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발전의 숨은 의지는 세계의 서구화로, 서양의 물질만능주의를 받아들여 다양성을 줄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풍요를 누리며, 같은 꿈을 꾸는 발전 담론은 결국 모두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 산업화 공업화의 열매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기에는 지구라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너도나도 공정하게 펑펑 쓰다가는 인류가 공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먼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서양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을 남반구로 잡고 있는데 남반구의 모든 나라들이 서양을 흉내낸 공업화를 발전의 모델로 삼고  공정한 발전을 꿈꾸는 한 지구에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정하고 공평한 발전은  정의와도 직결되는 문제로 식민지 시대를 떨치고 일어난 저발전 국가들로서는 공정한 발전을 이루고 싶은 상대적 정의 또한 발전 담론 속에 담고 있다. 그러나 전지구의 경제적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새로 공업국의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 인도 등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저발전 국가들이 빠르게 공업화를 이루고 있는 이때, 지구 곳곳에서는 이상기후를 보이고 있고 자원은 고갈 위기에 처해 있으며 많은 종의 동식물들은 멸종되었거나 멸종 될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대로의 발전은 인류의 전멸까지도 불러 올 것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세계화와 지구촌화는 세계 전역을 국경없는 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마천루와 쇼핑몰은 발전의 공용 이미지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것은 바꿔 생각하면 '답게'를 버리고 '처럼', 혹은 '같이'를 말하는 것으로 서양처럼, 서양과 같이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공정'이라 불릴만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의미의 식민화, 즉 상상력과 미래와 꿈의 식민화이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이 정치적 식민지, 경제적 식민지였다면 전후부터 지금까지 남반구에는 경제적, 정신적 신민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답게'를 버리고 '처럼'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냉혹한 현실이다. 또한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빛과 그늘은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차이를 늘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출발선이 다른 경쟁의 이야기는 경제 성장을 발전으로 보는 여기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미 따라갈 수 없는 시작점을 지나온 북반구와 남반구는 경쟁이 아닌 자립, 모방이 아닌 존중의 길에서 만나야 한다. 그것이 한정된 지구에서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다함께 잘사는' 세상은 생산과 소비를 줄이고 자원을 적게 쓰며 생태계와 양립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의 인류 생존을 위한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인구, 빈곤, 국가, 진보, 생활수준, 과학 등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서양이 스스로 낮출 생각은 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수탈의 대상이 되어왔던 저발전국 혹은 후발전국으로 불리는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에게 해보니까 좋지 않더라는 식의 훈계가 바로 불공정이 아니고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인류의 공존으로 발전만이 성장이며, 성장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한결같이 주창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정치인들과, 소비만능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지속가능'을 꿈꾸는 우리 모두가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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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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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그때의 베스트셀러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서점에서 알랭 드 보통의 신간을 발견할 때마다 책내는게 그다지도 쉬워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도통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 신문의 한 귀퉁이 책소개란에서 <불안>을 발견했다. 500자가 될까한 짧은 서평에서 '비교가 부르는 불안'에 대한 글을 읽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살고 있는 지금의 내 삶이 부쩍 불안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고 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말장난같은 사랑 타령만 하는 만만한 에세이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남보다 못한 내가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해진다는 '불안'에 대한 그의 생각이 조금은 그럴듯도 하게 들렸으니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많은 작가를 인용했다. 강준만 교수가 그렇듯이. 아마도 그의 많은 다른 책들도 <불안>과 같은 형식의 인용이 많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인용이라는 것도 박식과 함께 적절히 적용하는 재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능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안을 해소하는 해법 중 '보헤미안'을 가장 흥미있게 읽었는데, 나 자신이 보헤미안이 되고싶은 희망을 은연중에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남들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의 가치를 측정할 때 일상적인 '불안'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긴 할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문득,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벗어난 내 자신은 부끄러움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이젠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보다는 깨뜨려야 할 때인데, 나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있었던가. 에세이스트 김현진의 말처럼 책읽기를 멈출때 그때가 바로 내자신이 무너지는 때이고, 튀어볼 용기를 잃을 때이며, 내 자신이 더이상 내 자신일 수 없을 때가 아닐까 한다. 

 

알랭 드 보통은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는데, 이 책을 쓰면서 그 자신은 어느만큼 공감하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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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0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의 글을 평소에 잘 안 읽는 편인데 저도 이 책만큼은 흥미롭게 읽었어요.
' 불안 ' 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챕터들의 내용 모두 다 좋았어요. 글도 참 잘 썼구요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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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푸코는 내겐 너무 어렵다. 책을 받아든 순간부터 적지않은 무게감으로 짖눌리는 듯 했는데, 역시나 푸코는 내게 너무 추상적이며, 복잡하다. 서평이랍시고 올릴 글 조차도 책에 대한 순서의 소개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벅찬데, 그나마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분석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인상은 지식인 계급이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촘스키의 말은 내게 힘을 준다.  

1971년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다는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은 인간성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 였는데 촘스키는 인간성은 인간 본시의 내재적 특성이라고 본데 반해 푸코는 사회 정치적 조건의 틀을 더 강조했다. 사회자 엘더르스에 의하면 두 사람이 산의 정반대 방향에서 오르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표했다. 촘스키와 옮긴이도 이야기 했듯이 사회는 인간성의 작용만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조건들과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창조와 진보는 인간의 내재적 특성이나 사회적 조건은 모두 중요하고, 어느 것의 작용이 더 크다라고 선택하기는 힘든 일이라 여겨진다.  

실제의 대담 내용을 그대로 엮은 1장은 대담 내용이 난해해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위의 간단한 내용을 파악하기에도 힘에 부쳤는데, 71년의 대담 후 76년 촘스키가 프랑스에서 한 이터뷰 내용을 엮은 2장과 3장을 읽으며 1장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인간은 본시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인간 본성을 믿는 내 개인적인 생각은 아무래도 추상적인 푸코보다는 촘스키 편으로 기울었고, 그에 따라 4장과 5장, 6장으로 이어지는 푸코의 강연은 1장과 마찬가지로 버거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의라는 것이 인간의 계급 제도에서 나온 것이며, 정의는 권력 계급이 내놓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푸코의 주장 또한 영 낯설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역시, 제대로 읽었다 할 수 없는 읽기를 마치며 쓸수 있는 감상은 이정도로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음에 역부족을 느낀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대담 내용을 CD에 담아 책에 포함해 주었다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다. 지적 사유가 부족해 이해하지 못한 책이 대담 장면을 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오늘날의 사회과학과 인간의 정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있게 지켜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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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저도 맨 처음 1장 읽을 때 할 말이 없더라구요.
저의 무지탓에 못 읽는거뿐인데 이런 좋은 책을 가까이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읽는 내내 답답했습니다. ㅎㅎ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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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유명을 달리 한 그 해 2009년 5월 이후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남들처럼만 살고 싶었던 내 조그마한 소망이 벌려 놓았던 지난 내 삶들이 약간은 부끄러워 졌다고 해야 하나. '강남좌파'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꼭 강남에 살지 않더라도 삶의 수준이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못지않지만 생각이 좌파스러운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좌파스럽지만 막상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기 보다는 초연한듯 냉소하며 그냥 안주하고자 하는 나같은 행동이 몹시 좌파스럽지 않은 사람은 뭐라 지칭해야할까. 무늬만 좌파...? 

두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다지 많지 않은 내 몫이 그나마도 없어져 버릴까봐 매사에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억지로 우기면 중산층처럼 보일 수도 있는 내 삶이 산산히 부서져 버릴까봐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문제에서는 군축, 평화공존을 지향하고, 경제에서는 시장만능주의 보다는 패자를 아우를수 있는 정책을 추구하고 양심,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각종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 강화를 지지하는, 또 계급적으로는 부자와 강자보다는 약자와 빈자의 편에 서고싶은(p.26) 좌파, 즉 진보를 포기할 수 없다.  
   

 조국 교수는 외적 조건상 틀림없는 강남좌파이며, 영남좌파이다. 그래서 샴페인 사회주의자, 리무진 리버럴, 캐비아 좌파라는 비꼼을 다 수긍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 안의 누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다면 누구나 정치적 소신은 갖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리 공동체인 대한민국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진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그는 꿈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깨어있는 지식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패착과 실패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진보가 2012년, 늦어도 2017년 진보 세력이 다시 집권했을 때를 대비한 조국 교수의 플랜은 먼저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 이유를 성찰해보고 사회 경제화의 민주화와 현재 경쟁이 불가능한 교육문제, 남북문제, 세계화와 관련된 문제 등을 차례로 다루며, 특히 노동과 복지 강화, 재벌 개혁, 국방 개혁, 검찰 개혁등은 진보 개혁 정권이 반드시 추진해야 할 것으로 꼽았다.  

대중은 판을 바꿀 준비가 돼어 있다. 냉소, 초연, 안주를 넘어 판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때에 진보 진영에서는 구체적인 무엇을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가 밥 먹여주냐고 묻는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밥을 만들고, 어떠한 방식으로 밥을 나눌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대중의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의 내용과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같은 무늬만 좌파인 용기없는 다수의 숨은 좌파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빛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진보가 밥 먹여준다는 믿음, 진보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줄 것이라는 믿음에 힘을 실어주길 소망한다. 그리고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인 우리는 어느 영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불꽃을 피우자.(p.11)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하기 보다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진보 개혁 진영이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역활을 기꺼이 수행하는 학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국 교수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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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꽃을 피우기 전에는 피우기 위한 확실한 도구가 있어야하듯 대중을 위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한 것이 급선무인거 같아요,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이니,, 어떻게 될지 지켜볼 수 밖에 없네요^^;;
 
<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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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및 기업의 비리, 불법 행위 고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의 창설자 줄리언 어산지가 성폭행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된 후 보석 결정으로 풀려났다. 현재 영국의 한 아파트에 머물고 있는 어산지는 미국 정부의 외교전문 폭로 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위키리크스에 대한 금융거래를 중단했다고 한다.  어산지의 보석을 위해 5만달러를 쾌척한 '허슬러'의 발행인 플랜트는 그를 '영웅'이라고 표현했는데, 최고의 해커이기도 한 어산지의 폭로 행위를 과연 공공선을 위한 의로운 행위로 봐야 할 것인가. 어산지는 내년초 미국의 거대은행 한 곳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겠다면서 은행 한 두개는 쓰러뜨릴 수 있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좋음'과 '옳음'의  불일치성과 '좋음'보다는 '옮음'을 쫓을 것을 주장했던 마이클 샌델은 어산지에 대한 일련의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내심 궁금하다.
 

올 한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인문서적 부문에서 오랜기간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정의에 대한 관심과 불만이 컸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공의 선과 도덕을 강조했다. 존 롤스의 <정의론>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샌델의 독특한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쉽게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책 <왜 도덕인가?>는 전작의 재탕이라는 느낌이 적지않았고 지루함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시민사회를 위해 필요한 덕성인 '도덕'과 '정의'는 꽤 매력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샌델은 공공선을 위해서는 시민의식과 함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다. 자본을 따라가는 생리를 지닌 시장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빈부격차는 불평등을 초래하고 이는 공동의 결속을 방해하며 진정한 민주사회는 요원한 일 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의 선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서로 다른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동선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는 '좋음'보다는 '옮음'을 택하는 것이며 그것이 도덕이다.
 

복지와 자유에 대한 논쟁은 더더욱 치열해지지만 우리 사회는 갈수록 시장중심주의를 추종함에 따라 경쟁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생각할 수 없다. 경쟁과 이기주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모두가 심각한 지경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몹시도 부족한 현실이다. 생각이 습관을, 생각이 행위를 쫓아오지 못한다고 해야할까. 복잡한 이론들은 다 떠나서 샌델의 이 한마디만은 꼭 기억하고 싶다. 요란하게 시민 덕성을 외치며 가르치자는 것이 아닌 다양한 계층과 인종이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시민의식을 함양하자. 그것이 진정한 민주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만능이 아니라 국민이 자신의 욕구에 대해 생각해보고 공동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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