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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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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이라는 말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전에는 들었어도 무의미했을 그 말은 한국 국적도 일본 국적도 아닌, 두나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난민'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국민에 속하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조선적'은 한마디로 무국적 상태이다. '조선적'은 해방후, 남이나 북이 국가로서 세워지기 전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외국인으로 분류된 사람들로 현재 일본에는 수만 명 내지 수십만 명의 조선적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것일까. 나면서 부터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국가가 '나'라는 개인을 책임져 준다고 배우고 자라온 나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일본이나 한국, 혹은 남이나 북을 선택하지 않은 '조선적'에게 이것은 자유에 관한 문제로, 강제적인 강요에 의해 선택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라는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간에게 국적은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자의로든 타의로든 전후 일본에 머물게 된 재일조선인들에게 국적의 문제는 그렇게 낭만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의 소수자임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산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과거 반성도 전혀 안하는 군국주의자, 우파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에 가보니 거의 다수가 아주 얌전하고 민주적이고 또 적극적으로 천황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아니라서 예상과 달리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물론 우파도 문제지만 보통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내면화 되어있는 문제, 그 문제야 말로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고, 직면해야 하는 문제지요. 일본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p.427)  
   

 

작년, 일본을 다녀와서 나역시 일본에 대한 느낌이 확 달라짐을 느꼈다. 반듯반듯하고 차분히 잘 정돈된 일본이라는 나라의 외형이 주는 느낌이,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왜놈'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날려주었으며, 한동안은 일본에 살고싶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까지나 과거사를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일은 지겹다라는 생각을 나역시도 무의식 중에 내면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다.  민족적, 국민적 정체성을 축구시합이나 국가간의 운동 경기장에서만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있는 나로써는 어쩌면 지나간 과거사쯤은 모른척 은근슬쩍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역사는 지나간 시간일뿐, 일본이라는 나라에게 내가 직접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던 것은 아니므로 나와는 관계없다는 생각 또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이나 나는 민족에, 국가에, 역사에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엄연히 존재하고 역사 속의 피해자 또한 엄존한다.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폭력과 존엄의 부정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피해자는 침묵하고 우리들은 그 침묵을 방관할 때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참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주변 밖에 보지 못하고, 가능한 한 가까운 장래의 일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한 잔학 행위와 폭력에 대한 상상력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하루하루를 어렵사리 살아내고 있다(p.151).

 
   

 

저자는 베트남 전쟁시 우리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반성도 촉구하고 있다. 한국민 개개인은 베트남 파병의 '죄'를 짓지 않았지만, 한국인으로서 집단 책임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의 일본인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죄'는 없지만, 일본인으로서의 집단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 속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인이라는 집단의 피해자이며, 베트남에 대해서는 집단 책임, 혹은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는 한국인이다. 이는 한번도 내 삶 속에서 생각되어져 본 일이 없는 일로, 내 스스로 한국인이 되길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 져야 하는 집단책임이 조금은 억울하게 까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한국인이길 포기하지 않는한 베트남인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의미가 아닌)은 피할 수 없겠다 싶다.  직접적인 침략의 죄는 범하지 않았으나 국가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거부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그 행위는 '죄'에 가까운 것이 된다는 저장의 주장에 동의한다. 사죄와 보상은 국가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차원이 아닌 피해 당사자인 개인에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같은 조선인일지라도 피해 당사자의 상처와 고통은 나처럼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원한과 분노를 안은 고령의 피해자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진실을 밝히고, 사죄를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시간이 많지 않다.  

서경식은 명백히 조선인이지만 그의 언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는 그와 타인을 이어준다. 모국어가 모어가 되지 못했기에 그는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또, 그는 한국적을 취득한 자신을 '반난민'으로 규정한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참정권이 없는 한국적 제일조선인이란 정확히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때문에, 일본적이거나, 한국적이거나, 혹은 조선적이거나 모두 '난민'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재일조선인들은 모국과 현 거주국으로 부터 동시에 받는 부당한 대우를 오늘도 감내하고 있다. 과거, 피식민국이나 식민국의 보통의 사람들은 지겨운 과거사를 회피하거나, 자기중심의 정서나 사고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내면화하면서 이들에게 굴욕과 부당함을 강요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피해자인 그들이 받는 몫을 조국이 대신해 주지 않는다면, 진정 조국이라 할 수 있을까(여기서 '조국'이란 '한국'이라는 국가와 구성원들인 국민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4부에서 최현덕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국가'라는 이름으로 혹은 '민족'이라는 대명제로 구성원들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닌 누구나 받아들여지고 평등한 열린국가를 향한 통일의 꿈에 한표 던진다. 저자는 글쓰는 이로서의 공상, 꿈이라고 했지만 그냥 공상이라고 하고 말기엔 너무나 괜찮은 생각이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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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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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러셀의 '명언집' 이라 이름 할 만한 책이다. 러셀은 수학자이며, 논리가 였으나 무엇보다 철학적사상가로 이름이 높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시 반전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교육과 과학, 역사, 정치학, 종교등의 분야에서 7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의 책이나 연설문 등에서 엑기스라 할 만한 명언들만을 모았다. 러셀의 명언을 모아둔 책이니 저자는 당연히 버트런드 러셀이겠는데, <버트런드 러셀의 베스트>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엮은이는 로버트 E 에그너 교수다. 에그너 교수는 이 책을 '러셀 최고의 재치, 최고의 지혜, 최고의 풍자를 모은 결정판'이라고 소개했다.  

엮은이의 소개에서 보듯이 이 책은 재치와 풍자로 엮은 러셀의 명언집이므로 읽기에는 무척이나 쉽고 가독성 또한 좋다. 왜 그렇지않겠는가. 명언집은 쉽게 읽히고 쉽게 읽힌만큼 쉽게 수긍되고, 긍정하게 되며,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지 않던가. 그러나 딱 거기까지.  

앞 뒤의 맥락 없이 달랑 명언만을 단편적으로 재단해 두었기에 러셀의 철학을 깊이있게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러셀의 다른 책들을 이미 읽었던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러셀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만으로 러셀을 알기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점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서문과 프롤로그 에필로그, 그리고 각장마다 있는 해설자의 '여는 글'이나 '닫는 글'을 통해 친절한 해설을 붙였다. 그런데 나는 이게 외려 사족처럼 느껴지는게 영 꺼림직하다. 러셀의 눈을 통해 내가 보고, 그에따른 해석도 내가 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하는 어설픈 치기가 들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할까.. 출판사 측의 과잉 친절이라고 해야할까.  

러셀의 그 많은 저서는 불구하고 내가 읽은 러셀의 책은 이로써 세권째이지만, 세권의 책에서 내가 만난 러셀은 '논리를 통해 진실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했으며, 평생을 통해 그를 실천한 사상가라는 것이다. 겨우 세 권 읽고 그를 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더 많은 그의 저서들을 읽을 필요가 있으며,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러셀의 다른 책들 중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가를 나 나름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러셀에 이르는 안내서이며, 지름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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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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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 단순히 이책을 철학서적이라고 생각했었던가. 아니 나는, 529쪽이나 되며 '사유'라는 다분히 난해한 제목의 이 책을 읽고 싶기는 했던걸까. 철학서도 문학평론도 음악비평도 미학도 정치학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것을 함유하고 있는 기형과 잡종의 글쓰기라는 서문을 읽으며 생각했다. '아 재미있게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한 번 빠져보자.' 한번 빠져보자, 다짐했지만 쉽지않다.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신변의 잡다한 일상들이 떠오른다. 또는 잠이 쏟아지기도 한다. 세상에나! 

 

작곡가이며 비평가이며 기타리스트인 최정우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엇이며,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다는 놀라운 변신능력과 그 모든것을 종합할 수 있는 그의 종합능력이 부러움과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복잡한 사유 마저도 가능한 사람이라니.. 그러나 솔직히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매력도 느끼질 못하겠다.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른 그 한마디는  

압축할 줄 모르는 자, 뻔뻔하다! 왜? 읽는 이로 하여금 분심이 들게 하므로. 

 

나는 매사에 어떠한 일의 발생원인을 찾을때 외부귀인보다는 내부귀인을 하는 편이다. 그것은 내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외부환경은 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이니 되도록이면 나를 조작해보자 하는 조금은 약아빠진 생각에서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수없이 '내 탓이오'를 외쳐보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내 탓, 책 속으로 빠지는 대신 망상에 빠지는 것도 내 탓, 결국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는 것도 내 탓.... 

 

언어나 악보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된다. 최정우는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사유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하고 말았다. 최정우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어떠한 약속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 책의 의미를 전달받지 못했던 것일까. 자책은 끝없이 이어지고, 자다가 남의 다리 긁듯이 책을 훑고 지나가다. 슬프도다!  여기에서 나는 그만 이 책을 포기하고 만다. 블랙홀처럼 끝도 시작도 모르겠는 말들의 잔치 속에 안녕을 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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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입장에서는 많은 압축을 한 책인데, 그것이 "분심"을 일으켰다니 매우 송구스런 마음인데요. "포기"에는 어떤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유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소중한 만남이 될 수도 있었을 순간들이 제 길을 찾지 못한 듯하여 제 스스로 큰 아쉬움이 듭니다. 아무튼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설하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하나의 사유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그 복잡함이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어떤 '복잡함'과 상동적이고 상응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하나의 생각. 우리는 어쩌면 오히려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게 맞아떨어지는 사유에 대해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필연적으로 우리는 복잡한 상황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추상화하고 단순화하지만, 또한 그러한 추상화와 단순화를 통해서 어떤 식의 '편의'를 얻기도 하지만, 우리가 진정 의심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진리'로서 제시하는(혹은 강요하는) 안온하고 진부한 단순함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슬픈 포기'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고, 또한 거기에 큰 아쉬움을 덧붙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더불어 관심 가져주시고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의딸 2011-05-04 08:38   좋아요 0 | URL
헉!헉! 람혼님의 댓글을 보고 나온 소리 입니다. 처음의 '헉'은 제대로 책을 읽지도 못했으면서 한, 이따위 불평에 배푸신 친절을 보고 나온 소리구요, 두번째 '헉'소리는 단순하고 명쾌한 것들을만을 선호해온 내 취향에 또한번 의심을 갖는 의미에서 나온 소리구요. 그렇지만 부끄러워 하거나 죄송해 하지는 않으렵니다. '하나의 책이 항상 모두를 위한 책은 될 수 없다'는 람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단수가 되지 못함에는 여전한 슬픔을 느끼며, 저 또한 감사드립니다.

람혼 2011-05-04 11:08   좋아요 0 | URL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해주시고 활용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과 바람에서 남긴 글이었는데, 소중한 답변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부끄러워 하시거나 죄송해 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제 책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비의딸님이 진솔하게 남겨주신 글이야말로 제게 '독'이 되고 또한 '약'이 되는 말씀인데요. 단지 Mea culpa를 외치는 마음이 아니라 좀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제게도 제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계기를 제공해주셨습니다. 저야말로 책에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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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에 저자 박해천은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구해가는 여정을 담고있다"고 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화자가 시선, 아파트, 강남1세대, 그리고 꽃무늬로 각각 나뉜다. 픽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나, 시선의 관점에서 보는 이야기와 아파트가 혹은 꽃무늬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은 텍스트로 약간의 혼동을 주었으나, '픽션'이라고만 볼 수 없는 사실성을 담고 있다. 책은 겉표지나 제목으로 볼 때, 읽기 쉽지 않겠다는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외견을 하고 있지만 일단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자, 그 재미는 소설 못지않았다. 무엇보다도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를 용산의 맨션에서 보내고, 80년대 중반에 강남에 입성하여 아파트 생활만이 지상낙원이며 게딱지 같은 판자촌은 감히 내 생활에 끼어들 수 없는 낯선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성장한 나로서는 더더욱 이 책에 애착이 간다. 책에는 대한민국의 주거문화의 변화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주거문화의 변화는 조국의 근대화와 현대화 과정을 담고 있으며, 그 과정은 고스란히 나의 성장 과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바 중산층으로 성장하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마땅히 욕망해야 할 것만 욕망해 왔다고 여겼지만, 최근의 나는 내 욕망과 내 성분에 대해 강한 의심을 하고 있다.

저자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어떤 의도로 썼는지 나는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방식은 저자가 딱히 유도하지 않아도 읽는 자의 사상, 배경지식, 사유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대한민국의 자칭 타칭 중산층은 어떻게 의식화 되어 왔는가, 조국의 근대화와 현대화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떻게 이바지 해왔는가. 에 포커스를 맞추고 읽었다. 마땅히 욕망해야 할 것을 욕망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방점을 두고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인정받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망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적 결핍에만 촛점을 맞추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한때는 '민중'이었으나, 이제는 '시민'이라는 좀 더 세련된 호칭을 얻게 된 이들은, 현실의 이종 격투기장과는 거리를 유지한 채 인터넷에서 안전하게 쾌락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들은 더 이상 주권자도, 집단 지성의 구성원도 아니었다. 그저 다중의 소비자이거나 익명의 구경꾼에 불과했다(132쪽).  
   


나는 2부의 '팩트'라는 부제로 묶인 여러편의 글들 보다는 1부에 '픽션'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아파트가 아니고서는 편리한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이라면, 아파트를 빼고는 성장과정을 설명할 길이 없는 이라면, 아파트의 세련됨과 비대함만을 꿈꾸고 있는 이라면, 이 책을 강추하고 싶다. 아파트를 욕망하는 주체는 정말 '나'인것인지, 설정된 욕망의 틀 속으로 '나'는 끌려갈 뿐인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그대로 조국 근대화의 모든 것을 담고있다. 더불어 미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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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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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혼자이고 싶어요. "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절대적으로 그렇다. 혼자이고 싶다. 
 

무엇보다 책이 참 예쁘고, 간단하다. 동화책처럼 잘 꾸며져 있다.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니 얼른 읽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펴보지 않고 겉모습만 쭈욱 돌려보았을 때의 느낌이고, 한번 슬쩍 휘리릭 넘겨보기만 해도 '으악' 소리가 절로 난다. 그리고 읽기 시작하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책의 내용이 호감이 가서라기 보다는 한마디로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키보드를 치고 있는 지금 내 무릎 위에는 애견 '씽기'가 앉아있다. 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의 애견과 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살아있다. 아니, 내 무릎에 애견이 없더라도 지금 앉아 있는 이 의자, 그리고 책상 앞에 둘러쳐진 커텐, 책상 틈새...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어딘가에서 숨어 나를 노리고 있을 존재들.... 인정하기 싫지만 내 눈썹에 숨어있을 모낭충!
 

그러나, 침입자는 그들이 아니라 '나'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원래 자연적으로 내가 살기 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이들이고, 나는 그저 잠시 스쳐가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이야기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는 그들. 알고나면 먹을 것이 없고, 알고나면 마음 편히 앉을 곳도 없다. 더더욱 끔찍한 것은 이 책은 절대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 이 책을 읽기 전 그들의 존재를 차라리 몰랐던 때가 편했겠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간밤에 나는 꿈 속에서 여러번 이불과 베개잇을 빨 것을 다짐하며 뒤숭숭한 밤을 보냈으니까.
 

곤충도감? 해충도감?도 아니고, 굳이 이 책을 찾아서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전철에 앉아 읽고 있을 때, 옆자리의 남학생이 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는 말씀은 드릴 수 있겠다. 절대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허풍 수준의 책은 아니지만, 읽거나 말거나는 당신의 선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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