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덫 걷어차기
딘 칼란 & 제이콥 아펠 지음, 신현규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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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제구호개발기구인 월드비전에 매달 소액의 기부를 하고 있다. 월드비전에서 연결해준 과테말라의 한 어린 소년을 후원하고 있는 것인데, 내 기부금이 소년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인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번도 직접 월드비전을 통해 확인해보진 않았다. 그러다 작년에 월드비전에서 근무하면서 후원금이 어떤 나라,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적은 최민석의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를 읽고 후원금은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기보다는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에 필요한 것들을 설비함으로써 아이가 굶지 않고 생활 할 수 있도록 간접의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테면, 후원금을 모아 학교를 짓는다던가, 마을에 우물을 판다던가 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였다. 그것은 이 책 <빈곤의 덫 걷어차기>의 저자가 말하는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시적인 자선이 아니라 빈곤을 해소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비영리단체 빈곤퇴치혁신기구IPA의 설립자 딘 칼런과 빈곤 퇴치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고 있는 제이크는 이 책의 동 저자이다. 어느부분을 누가 적었는지 정확히 구분하고 있진 않지만, 딘 칼런은 화자인 '나'로써 제이크가 여러 빈곤 국가들을 다니며 직접 경험하고 도움을 준 장면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두 사람은 빈곤퇴치를 위한 7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는데 소액대출인 마이크로 크레딧을 통한 대출보다는 저축을, 그리고 저축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저축 시기 알림서비스와, 더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비료의 선불 판매, 또 장기적인 안목에서 빈곤 탈출에 확실한 도움을 주는 교복지급이라든가 구충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 진정한 교육을 위한 보충수업과, 식수를 정화해 빈곤국에 만연한 전염병을 퇴치할 것, 그리고 저축이나 교육, 비료 사용 등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위한 자기 구속 장치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빈곤퇴치를 위한 아이디어 7가지는 행동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경제적 동물이라는 전통경제학의 비합리성이 빈곤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7가지 아이디어를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60,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을 떠올렸는데 다른점이라면 우리나라는 그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냈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자랑스러웠다는 것보다는, 모든 나라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활성화 되어야만 잘 살 수 있겠 되는 것이냐는 의문이 생겼다. 우리나라는 현재 경제대국의 수준에 진입했지만, 들여다보면 극심한 양극화로 이른바 서민들은 나날이 생계유지를 위한 경쟁에 내몰려 있는 상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는 발문에서 빈곤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이러한 도전정신에 감동 받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감동보다는 빈곤퇴치라는 것이 경제대국의 위치에서는 또다른 시장개발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빈곤퇴치를 위한 우리의 기부나 도움이 정말 도움인 것인지, 그들을 경쟁 속에 내몰고 그로 인한 불행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우리는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고, 빈곤국의 사람들은 밥을 굶지않으며 잘살게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제는 밥을 굶지 않는 우리들은 일말의 동정으로 그들을 위한 기부를 하고, 그 또한 나를 과시하는 욕구 내지는 속죄로 생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잘 삶의 의미가 경제적인 속국이 되어 경쟁 속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며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선량함 만으로는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비료를 사용의 권고보다는 그들의 먹거리를 수출이나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빈곤을 해결하고, 전 세계인이 똑같은 것에서 기쁨을 얻기보다는, 그들 나름의 문화 속에서 그들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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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명품 강의 2 - 인간 본성과 사회적 삶의 새로운 이해 서울대 명품 강의 2
장덕진 외 13인 지음,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기획 / 글항아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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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이어 2011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이루어진 시민교양강좌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이 책은 무엇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강의이기 때문에 이해가 쉬웠다. 그러나 꼭 한국의 작금의 상황만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먼저 인간의 본성과 진화, 그리고 심리를 살펴보는 베이직 작업이 있었고, 그 위에 경제와 사회복지, 개인간의 소통방식, 스포츠, 생태계에 대한 것 까지 아우르는 이 책은 책의 부제처럼 인간 본성과 사회적 삶을 이해하는 강의집이다. 그런가 하면 박태균 교수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정근식 교수의 '태극기, 한국 현대사를 읽는 새로운 코드'는 각각 6.25전쟁과 5.18을 비롯한 민중항쟁을 배경으로 해서 부족한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책은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었는데, 관심이 가는 강의론을 먼저 읽거나 혹은 서문에서 권유한 바대로 분야별로 골라 읽어도 좋았다. 그러나 각각의 강의들은 개별적으로 읽혀질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커다란 줄기로 이해된다.

특히 내가 주의깊게 읽은 것은 4강, 이준구 교수의 '행태경제 이론에서 인간의 체온을 느끼다' 였는데, 한정된 자원으로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킬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경제는 무엇보다 합리적 인간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합리적이지 못한 면이 많고, 이는 행태경제학으로 설명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이기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많은 부분에서 이타적 행동을 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태경제학 이론은 작게는 내가 왜 합리적이지 못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비합리적이고 때때로 이타적인 인간의 행동들이 세상을 그나마 살맛나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준구 교수는 이러한 행태 경제학을 최근 사회문제가 되었던 좌회전 삼색등에 비유해 설명했다.

자신의 출근길을 비유로 현재 대한민국의 생태계에 대한 강의를 펼친 이도원 교수의 '출근길 잠깐의 사유, 풍경과 생태'는 한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것처럼 부드럽게 읽힌 것에 반해 서울의 인공미와 디자인 거리에 대한 천박함을 질타하는 그 내용은 뾰족하고, 예리했다.

 

개개인의 삶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는 나는 사회학에 무척 관심이 많다. 한 인간을 이해하는데에도 사회적 생태적 체계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정치를 하건, 복지를 하건, 혹은 교육을 하건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할 것이며, 그에 꼭 필요한 한문이 사회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공하지 않은 사회과학의 수강과목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이 책은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이었다.

이런 강의집을 읽은 후에 한번씩 드는 생각은 다음번 강의는 책이 아닌 강의실에서 듣고 싶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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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철학법 - 프로이트에서 뒤르켐까지 최고의 인문학자들, 여행의 동행이 되다
김효경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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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서임에도, 여행으로 인해 더더욱 낭만적인 인간이 되었다거나, 깊은 사색을 통해 더 진실한 인간이 되었다거나, 진정한 내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는 둥의 자기만족이 겉으로 들어나지 않아서 좋았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인간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거나, 더 열심히 더 진실되게 생을 마주할 수 있어야겠다는 들어난 다짐이 보이지 않았기에 책을 읽는 동안 부담스럽지 않았다.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여행서들이 알게모르게 살짝 들떠서 얼마간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스스로에게 혹은 독자 앞에서 보란듯이 하곤 하는 수많은 여행서들을 마주하고 난 후의 허탈감이 이 책을 읽고서는 들지 않았다.

로마에 대해 베네치아에 대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떠들지 않았음에도, 실제의 모습보다 몇 배나 화질이 좋은 사진으로 책을 도배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베네치아에, 로마에, 너무나 가고싶어졌다.

 

여행이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져, 여행시 만나게 되는 불결함과, 고됨과, 불편함이 가리워진채 개인들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 되어 누구나가 여행을 로망하게 되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몇번의 여행 경험으로 나 역시 동감하고 있던 터였다. 여행은 그저 일상을 탈출 했다는, 여기만 아니면 된다라는 삶에의 불만족을 당분간 보류해주는 보관소와 같은 것이다. 떠나는 그곳이 어디건 여기만 아니면 된다라는 조금은 허무주의적이며, 또 조금은 부조리하기도 한 로망이 바로 여행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여행에 대한 나의 개인적 생각과 지은이의 솔직한 고백이 맞물려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나는 자주 기뻤다. 다만, 지은이가 당대의 철학가들, 프로이트·베이컨·뒤르캠·마르크스 등을 만나 대화하며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방식은 몹시 생경스러워서 낯간지러운 느낌이였다. 나 자신의 상상력의 부재, 뻔뻔함의 부족으로 인한 불폄함일 수 있었겠다고 치부하면서 지은이의 경력을 자꾸만 다시 들여다 보았다. 사회학을 전공했고 독서 카툰을 연재했다고 하니, 지은이에게는 이론과 창의력이 공존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지은이의 이런 기획까지도 미디어를 통한 계획적인 포획일 수 있겠으나, 거북스럽지는 않았다.

 

또, 이 책은 여행서임과 동시에 가벼운 철학, 혹은 사회학 입문서로 보아도 좋겠다.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그렇다고 철학서적을 심도있게 읽은 적도 없는 보통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도시와 역사에 관한 철학과 사회와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에 관해 연구한 사회학에 더 한층 호기심이 깊어지는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 <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 따위의 책들을 탐내게 되었다.

지은이는 여행이라는 경험의 실체와, 여행이라는 매커니즘을 조작하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을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지은이의 이런 고백은 여행이 주는 실체적 고됨 앞에 되지도 않는 사색과 성찰을 여행의 목적이라고 포장하여, 자기 자신조차도 기만하는 그런 작업이 아니였기에 내 마음에 쏘옥 들었음을 나 또한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17세기에서 19세기에 유럽의 명문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그랜드 투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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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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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대변되는 루소는 나에게 교육서 <에밀>로 친숙한 이름이다. 반면 흄에 대해서 내가 알고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때문에 이 책을 받아들고, 크게 달가워 할 일도 설렐일도 없었으며, 그랬기에 책을 열기까지 작은 망설임이 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무감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웠다. 책을 읽기 전 느꼈던 망설임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끝나가는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으로 바뀌었고, 읽는 중간 자주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살롱에서의 은밀한 스캔들'이라는 뉘앙스가 주는 호기심과 스캔들을 쫓는 대중의 천박함을 동시에 달랠 수 있었으며, 음식과 술, 재담, 음악, 화려한 매너, 정치적 비난 등을 무한히 공유했던 18세기 비공식 통신망이었던 '살롱' 문화를 들여다 보는 지적인 쾌감까지 누릴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흄에게 루소의 망명을 부탁하는 부풀레 부인이기도 했다가,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흠모를 받았던 레스피나스이기도 했다. 나는 18세기 화려한 살롱을 이끄는 지적인 아름다움이 충만한 마담이고 싶었다.

 

책을 읽기 전, 표지 그림의 두남자 중 하얗고 뚱뚱하며 벌어진 입을 하고 약간은 바보같은 표정을 지은 이가 '루소'일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상상은 빗나갔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 때문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은 사유재산으로 시작되었다는 그의 주장을 자유롭고 평화로운 목가적 상태로만 귀결해서 생각했던 나의 소박함 때문이었다. 또한 직접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기도 할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높았던 루소를, 나는 부드럽고 자애롭게 상상했던 것이다. 의심많고, 외부와의 교류보다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몰두했으며, 하녀 르바쇠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다섯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보낼 정도로 냉소적이었던 루소를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였다.

인류는 과거에 비해 더 자유롭거나 평등하지 않고, 더 진실하지도 않으며, 더 의존적이고 외로우며,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아졌다고 했던 루소의 주장은 바로 루소 자신을 표현한 것이며, 그러한 꼬장한 성격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다소 선정적으로 보이는 책의 표지는 루소의 손에 놀아나는 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은 것일까? 같은 맥락에서 책의 제목, '루소의 개'가 의미하는 것은 루소가 영국으로 망명을 준비하기 전에 죽은 애견 '튀르크''도, 그 뒤 망명생활 중 죽기 전까지 루소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던 '쉴탕'도 아닌 '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반면 흄은 위대한 철학자이며, 문인이며, 예술가, 식물학자, 자연주의자이며, 조국 제네바와 프랑스로 부터 도망자인 '루소'를 전적으로 도와 망명시키고, 망명 후의 생활까지 보살피기로 맹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는 루소에 대한 정체 불명의 시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흄은 루소의 드러나지 않은 괴팍함에 비해, 겉으로 드러난 위대함을 시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도망자 주제에 고마움을 모르는 루소의 거만함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오히려 감사와 추앙을 받아야 할 사람은 흄 자신임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다고 보았을때, 프로이센의 왕을 사칭한 월폴의 편지는 흄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된다.

의존은 악의 근원이며, 자유란 곧 타자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는 상태라고 역설하면서, 사실은 흄 자신에게 의존해서 망명의 삶을 지탱하는 루소가 흄에게는 몹시 가소로웠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온 시대와, 고국의 기존 종교를 공격하고, 미신과 가톨릭을 싫어했던 종교관 외에는 성격과 취향, 철학과 세계관과 문학적 표현 방법 등 모든 것이 상반되었던 두 거장은 기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버트런트 러셀은 '루소는 미치광이였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흄은 제정신이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라고 했다.

 

철학서로도 인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 <루소의 개>는 추리 소설이거나,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논객 진중권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는 최근 SNS를 통해 더더욱 빛을 발하며 곳곳에서 냉소를 뿜고 있는 중이다. 18세기에는 살롱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SNS가 있는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논쟁을 통한 시기와 반목의 역사 또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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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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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럽의 몇몇 국가들 즉, 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몇몇 주류 신문들은 그들의 위기가 무분별한 복지정책에 있다고 논평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저자 토머스 게이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사기다. 관광업과 해운업을 빼고는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는 경제 후진국 그리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경제적 위기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복지정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미국 자본주의의 신용 사기극에 말려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수많은 노동 분쟁과 소송 사례들을 직접 체험한 미국의 현직 노동전문변호사로서 미국의 노동문제와 복지현실에 정통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더 많은 경제적 수익을 위해 더 많은 노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이 책은 학자의 문체가 아닌 한 편의 에세이 같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곳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을 떠올렸으며 뿐만아니라, 순간순간 저자가 빌 브라이슨이라고 착각까지 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문체가 재기발랄 했다.

 

저자는 책의 성격상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노골적인 흠모를 드러내고 있는데, 책의 곳곳에서 자신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며, 더더군다나 유럽에서 살 마음은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 비교적 고소득층에 해당하는 자신이 하는 주장이 현실성이 없거나, 혹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해 견제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가 자못 귀엽기까지 하다.

저자는 자신의 조국 미국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인간적인 성장만을 지향해온, 그러나 이제는 하향길에 접어든 미국식 자본주의에 안녕을 고하고, 대안으로 인간적인 권리를 좀 더 충족할 수 있는 독일식 사회민주주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모델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83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독일이 현재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제조업 강국임과 동시에 환경친화적인 국가이고, 노동자와 경영자가 회사 경영에 동등한 권리를 갖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이며, 전국민이 TV나 인터넷 등 이미지 위주의 매체보다는 신문이나 책 등의 활자를 선호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주입식의 이미지 매체보다는 활자 매체가 생각할꺼리와 토론꺼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독일에도 미국식 자본주의의 매혹은 어김이 없었지만, 독일인들은 자본의 마력 앞에 빠져들 때와, 빠져 나올 때를 제어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그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저자는 공공재의 국유화에 있다고 본다. 독일 기본법 등 유럽 각국의 헌법은 자본주의의 과잉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국가의 목적이 있음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교육·의료·도시 등의 공공재를 무료로 향유 할 수 있다.

 

미국인은 유럽인이 내는 세금의 5분의 4 정도를 세금으로 내지만 되돌려 받기는 유럽 복지국가의 5분의 4에 미치지 못하며, 유럽인은 세금을 낸 것 이상의 복지혜택을 받고 있다.(38쪽)

유럽의 국가는 걷어드리는 높은 세금으로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을 책임지며, 유럽인들은 세금을 내고 남은 돈을 여유롭게 사용하고, 저축도 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의 5분의 4 수준의 세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까지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미국인들이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름 중류층이라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평균 소득의 5분의 1을 은행빚을 갚는데 쓰고, 자식을 소득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게 하기 위한 교육에 투자하며, 과시적인 소비에 몰두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언제나 '해고 불안'에 시달린다. 미국의 노동정책은 표면과 다르게 실제적으로는 경영자 측에 우위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식 사회민주주의의 저력은 '교육'에 있다. 독일의 교육은 '전국민의 대학교육'에 있지 않다. 독일에서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협상 능력을 키우는데 주안점을 두는데 이는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집단행위를 목도할 때마다 그들을 '집단 이기주의자'들로 매도했다. 내가 비뚤어진 시선을 갖았거나, 반대로 당장의 내 불편만을 생각한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 해야하는 행동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을 끝없이 롤모델 삼고 있는 우리나라는 급기야 '의료민영화'까지 코앞에 두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처럼 조만간 우리도 잘린 손가락을 들고 응급실로 달려가봤자, 비용때문에 절단장애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보다는,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배웠지만, 국가의 실체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국가는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데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의무에 충실한 국가인가. 우리나라 헌법에는 자본주의의 과잉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조항이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어하지만, 누구나가 잘 살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누구나 경제적으로 부유하진 않지만, 누구도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거나 생계형 자살을 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 수는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했다. 돈을 많이 벌려고 애 쓸수록 삶의 질은 하락한다. GDP의 수치는 행복지수와는 관계없다. 오히려 GDP가 증가할 수록 부자만 더 부자가 된다. 이것이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 뱉으며 연간 2300 시간을 죽도록 일하고도 해고불안을 겪어야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를 추종하고 있는 우리가 숨가쁘게 달려가기를 멈추고,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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