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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대변되는 루소는 나에게 교육서 <에밀>로 친숙한 이름이다. 반면 흄에 대해서 내가 알고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때문에 이 책을 받아들고, 크게 달가워 할 일도 설렐일도 없었으며, 그랬기에 책을 열기까지 작은 망설임이 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무감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웠다. 책을 읽기 전 느꼈던 망설임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끝나가는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으로 바뀌었고, 읽는 중간 자주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살롱에서의 은밀한 스캔들'이라는 뉘앙스가 주는 호기심과 스캔들을 쫓는 대중의 천박함을 동시에 달랠 수 있었으며, 음식과 술, 재담, 음악, 화려한 매너, 정치적 비난 등을 무한히 공유했던 18세기 비공식 통신망이었던 '살롱' 문화를 들여다 보는 지적인 쾌감까지 누릴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흄에게 루소의 망명을 부탁하는 부풀레 부인이기도 했다가,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흠모를 받았던 레스피나스이기도 했다. 나는 18세기 화려한 살롱을 이끄는 지적인 아름다움이 충만한 마담이고 싶었다.
책을 읽기 전, 표지 그림의 두남자 중 하얗고 뚱뚱하며 벌어진 입을 하고 약간은 바보같은 표정을 지은 이가 '루소'일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상상은 빗나갔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 때문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은 사유재산으로 시작되었다는 그의 주장을 자유롭고 평화로운 목가적 상태로만 귀결해서 생각했던 나의 소박함 때문이었다. 또한 직접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기도 할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높았던 루소를, 나는 부드럽고 자애롭게 상상했던 것이다. 의심많고, 외부와의 교류보다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몰두했으며, 하녀 르바쇠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다섯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보낼 정도로 냉소적이었던 루소를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였다.
인류는 과거에 비해 더 자유롭거나 평등하지 않고, 더 진실하지도 않으며, 더 의존적이고 외로우며,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아졌다고 했던 루소의 주장은 바로 루소 자신을 표현한 것이며, 그러한 꼬장한 성격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다소 선정적으로 보이는 책의 표지는 루소의 손에 놀아나는 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은 것일까? 같은 맥락에서 책의 제목, '루소의 개'가 의미하는 것은 루소가 영국으로 망명을 준비하기 전에 죽은 애견 '튀르크''도, 그 뒤 망명생활 중 죽기 전까지 루소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던 '쉴탕'도 아닌 '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반면 흄은 위대한 철학자이며, 문인이며, 예술가, 식물학자, 자연주의자이며, 조국 제네바와 프랑스로 부터 도망자인 '루소'를 전적으로 도와 망명시키고, 망명 후의 생활까지 보살피기로 맹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는 루소에 대한 정체 불명의 시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흄은 루소의 드러나지 않은 괴팍함에 비해, 겉으로 드러난 위대함을 시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도망자 주제에 고마움을 모르는 루소의 거만함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오히려 감사와 추앙을 받아야 할 사람은 흄 자신임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다고 보았을때, 프로이센의 왕을 사칭한 월폴의 편지는 흄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된다.
의존은 악의 근원이며, 자유란 곧 타자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는 상태라고 역설하면서, 사실은 흄 자신에게 의존해서 망명의 삶을 지탱하는 루소가 흄에게는 몹시 가소로웠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온 시대와, 고국의 기존 종교를 공격하고, 미신과 가톨릭을 싫어했던 종교관 외에는 성격과 취향, 철학과 세계관과 문학적 표현 방법 등 모든 것이 상반되었던 두 거장은 기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버트런트 러셀은 '루소는 미치광이였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흄은 제정신이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라고 했다.
철학서로도 인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 <루소의 개>는 추리 소설이거나,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논객 진중권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는 최근 SNS를 통해 더더욱 빛을 발하며 곳곳에서 냉소를 뿜고 있는 중이다. 18세기에는 살롱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SNS가 있는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논쟁을 통한 시기와 반목의 역사 또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