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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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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민의 역사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재구성하는 연구서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저자 송호근 교수는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식민주의적 사관의 근대를 벗어나 조선의 자주적 근대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인민'을 통해서 조선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했을까.

사회는 국가라는 이름의 지배 계급과 인민 대중으로 구성된다. 조선의 역사는 군주와 사대부로 구성된 지배 집단의 역사였으며, 그 속의 인민은 통치 권력에 의해, 통치 권력 위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으며, 권력의 정당화를 위한 객체로서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었던 인민이 스스로를 각성하고, 독자적 주체로 나아가는 과정은 시민사회로의 발돋음이며, 그는 바로 조선의 근대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교는 조선사회에서 오랫동안 종교였고, 사회의 조직 원리였으며, 교육과 문화의 핵심 가치였다. 뿐만아니라 근대를 통해 개화되고 진화된 한국 사회에서도 유교의 전통은 여전히 곳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고, 이에 조선의 경제사와 사회사, 정치사, 문화사를 연결해 조선을 총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것은 한국의 현 사회를 해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유방본'을 통치 철학의 명분으로 삼고있음에도 조선의 성리학적 우주관과 조상 숭배를 결부시킨 종교적 의례와, 신분 직역과 부세의무를 강제하는 향촌 지배, 그리고 그러한 지배이념의 도덕과 윤리를 재생산하는 교육을 통해 조선의 인민은 오랫동안 수탈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통치 철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에 그러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하더라도 언문은 인민으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세계관을 습득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주체적으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언문은 유교의 세계관을 벗어나, 신 앞에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에 수많은 인민들이 순교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명시적으로는 유교의 사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지만 천주교 신자가 되는 자체가 유교적 통치 이념의 기반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천주교도 탄압을 자행했다.

언문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인민이 사회적 비판 의식으로 무장하는데 추동력이 된 것이다. 세종대왕이 미련한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표면적인 주장은 결과론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개인의 인식은 언문을 통해 담론이 되고, 확대되어 공론화 되었으며, 공론장에 모인 주체들은 실천 과정을 통해 점차로 시민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근대화의 핵심이며, 이는 조선뿐만이 아닌 세계 모든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출발이다. 즉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민이 아닌 주체로서의 인민,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후 사회적 상상의 인민, 저항하는 인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이 됨으로써 체제와 권력으로 부터 해방이 되었는가. 나는 이 지점에서 그다지 명쾌하게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다. 여전히 권력의 통치 철학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으며, 생각하는 인민은 생각조차도 권력에 조정당하는 지점에까지 이른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십자군 이야기에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자는 그 역사를 되풀이 해야 한다' 라고 했다. 송호근 교수의 '인민의 탄생'을 통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주체로서의 인민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혹은 '다 할 수 있는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인민이 시민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담을 것이라고 예고한 2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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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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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심상용은 책을 시작하며 이 책이 예술 지침서로 또 한권 보태지는 의미에 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썼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지은이의 그런 바램은 몹시도 타당하다 라고 생각된다.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몹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잘못된 작가의 의도를 해설서로 삶고 있는지 정작 작품을 감상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 한다. 작품을 완성한 작가의 의도쯤은 때때로 얼마든지 무시되고, 뿐만 아니라 어떤 힘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대중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조작하고, 또 때로는 작가의 삶 전체를 삭제하거나 덧칠하는 작업을 통해 대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은이는 이 책에서 그 힘의 원천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지은이는 카미유 끌로델과 고흐, 케테 콜비츠, 프리다 칼로의 불후했던 생을 고통의 시대, 상처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고, 권진규와 백남준, 이성자를 이방인으로 규정했으며, 마크 로스코와 앤디 워홀, 바스키야를 시대의 희생물로 분류했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해석하며 읽었다. 고흐와 백남준, 로스코, 워홀을 자본에 의해 상업적으로 유린된 작가들로 해석했으며 끌로델과 프리다, 권진규, 바스키아를 기득권에 의한 희생물로, 그리고 이성자를 조국을 잃은 디아스포라로 이해했다.

시대의 불의와 기득권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앞세웠던 고흐는 불행한 삶을 권총 자살로 마감했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미디어를 통해 신화화 되고, 상업적 소비에 적절한 브랜드로 재구성되어 제공되어 진다. 우리는 '고흐'라는 브랜드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상품을 아는 것이다. 육체노동으로 갈라지고 무뎌진 손끝으로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불합리한 문명의 속살을 들추고 싶었던 고흐의 인간적 고뇌는 의도되고 조작된 상품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다. 예술은 과시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에 의해 축적되는 투자물이 된 것이다.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군중위에 군림하는 부르주아 문명을 오물로 간주했으나, 기술의 기적이 초래하는 기계에 의한 인간의 종속화를 예견하지 못하고 작품 활동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거창한 사업으로 재편되어 후원과 예찬을 적극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백남준, 자본사회를 경멸하고 명상적인 작품을 추구했으나 그 자신은 결코 명상적이지 못했고, 끝없이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했으며 갤러리와 은밀한 뒷거래까지 진행하는 자신의 이중성으로 결국 자신의 동맥을 끓을 수 밖에 없었던 로스코, 마릴린 몬노와 코카 콜라로 자본주의의 선봉에 섰지만, 결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워홀은 모두 상업적으로 유린되고 조작된 신화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까미유 끌로델과 프리다 칼로, 권진규, 장미셜 바스키아는 시스템에 의한 기득권자들에게 억압받고 짓눌리며, 때로는 작가적 기량마저도 착취당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하는 생을 살았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상처이며, 그에따른 고통의 결과물이다. 과연 우리들의 그들의 고통을 가감없이 올바로 전달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지은이 심상용은 묻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의도했던 기존의 예술 지침서와는 다른 시각의 해설은 충분히 공감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텔레비전의 유해성을 알리기 위해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기획했던 백남준의 전위적 시각이, 텔레비전만큼이나 세상 읽기를 왜곡하는 틀이 되었다는 지은이의 해설처럼, 이러한 해석 또한 작가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의심의 끈을 놓지않으며 이 책에 대한 감상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쩌면 올바른 작가의 의도란 우리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는 기타 다른 필요에 의한 해석과도 관계없이 오로지 나만의 감각에 의한 작품의 이해만이 '올바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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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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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인 저자가 한 파티에서 변호사이며 동시에 사회운동을 하고있는 한 사람을 만나는데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런던의 빈곤퇴치 집단들에게 법률 지원을 하는 재단에서 일하고 있었던 변호사는 IMF가 하는일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고, 뿐만아니라 돈은 빌렸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주장을 했다. 저자로서는 변호사의 주장이 놀라웠던 것인데, '부채는 반드시 상환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회통념이며, 그만큼 일반적인 생각이다. 나 역시도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부채를 갚지 않는다는 것은 내 몫이 아닌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의 오류에 대해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 첫 작업으로 화폐는 물물교환을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주류 경제이론에 반하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시장은 자본주의와 같은 의미가 아니며, 시장이 재화 창출의 장이기 보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의 장이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얻기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신용과 상호부조이며 그에 합당한 규범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전통적인 '시장' 본래의 의미일뿐더러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시장구조를 회복할 때 '경쟁'은 더이상 생존을 위한 덕목이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단순한 생존 외에도 자식을 돌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평균적인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방면에서 빚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딱히 사치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도 대출을 권하는 사회가 현대의 자본주의이며,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손쉽게 물건을 사들일 수 있는 신용카드와 대출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무작위로 권하여 지고, 부채없는 소박한 삶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사회에서 정작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책임은 고스란히 당사자에게로 돌아간다. 이는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사회통념과 맞물려 채무자는 부도덕하며,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부채를 갚지못하는 채무자, 즉 범죄자를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채무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노예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막을 내렸지만 현대사회는 새로운 채무 노예들을 마구잡이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책을 '부채'에 촛점을 맞춰 읽기 보다는 '시장'에 주안점을 두고 읽었는데, 필요한 것의 충족을 위한 '시장' 본연의 의미를 회복할 때 '인간 경제', '공동체의 의미'가 회복된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과거 부채의 역사는 부를 쥔자들이 빈자를 향해 행하는 갈취와 폭력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의 부채는 현대에도 여전히 사회 절대다수인 빈자들을 향한 자본의 '폭력'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일까에서 출발한 의문은 해소되었는가.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도 여전히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어떤 부채는 채권자의 부당함이 채무자의 도덕적 의무에 가려지고, 도덕적 의무라는 관념은 채권자들이 제시한 시스템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욕망은 곧 끝없는 경쟁을 의미하고, 유한한 행성에서 성장의 엔진은 영원히 가동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논리에의 귀결을 위해 저자는 물물교환 시대로 부터 다양한 시장의 사례와 금전 외에도 다양한 부채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양이 너무 방대하다못해 자못 산만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모든 것이 금전으로 환산되는 부채의 시대를 넘어 서로 호의를 빚질 수 있는 인간관계를 회복하자는 인류 미래를 위한 제안에 이르기까지의 책읽기가 너무도 힘에 겨웠다.

자본주의는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은 자본주의를 대신해 새로운 상상을 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역사의 행위자로서, 금융의 힘에 의해 우리 모두가 약탈자이며 동시에 채무자로 내몰리는 현실을 극복하자는 취지의 이 책이 좀더 대중적으로 좀더 요약되어 쓰여져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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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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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터넷 서점이건 서평을 남길라치면 별의 갯수를 체크하게 되어있다. 리뷰를 읽고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취지겠는데, 나 역시도 책을 구입할 때 리뷰어들이 체크한 별의 갯수를 참고로 하곤 한다. 그중에 가장 맘에 든 책은 별 다섯개로 표시된다. 호텔도 그렇지않은가. 시설좋고, 서비스 좋아 가장 좋은 호텔로 분류되는 호텔을 오성급이라고 분류하듯이 말이다.

리뷰어 물만두 홍윤, 그의 삶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이 책은 별 다섯개로는 모자랐다. 특별히 훌륭한 책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글이 쫀득하게 맛깔져서도 아니다. 그가 시한부 삶을 살다 떠난 사람이라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이 책이 별 다섯개로는 도저히 모자라는 책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만두'라는 북블로거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막 세상과 작별하고 난 후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서였다. 인터넷 서점이라는 한 공간을 이용했지만 그녀의 생전에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서로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 달랐기도 했지만, 나는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다는 등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부고를 접하고는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 한켠이 아련했었다. 같은 취미를 갖었고, 같은 공간을 사용했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 외에도 죽음이 주는 쓸쓸함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물만두 홍윤의 <별다섯 인생>의 출판 소식은 더더욱 반가웠고,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 이제부터 많이 울게 될 것이라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랬기에 2004년에 쓴 자신이 진행성 근육병을 앓고있는, 그래서 앉는 동작조차도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중증의 환자라는 고백의 프롤로그 '만두의 진실 또는 고백'을 읽고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전혀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방울도 눈물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가장 오래 남을 인물이 만두일 것이라는 '질긴 만두' 타령을 보고 나자, 나도 모르게 그럴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이렇게 유쾌한 가족이 있을까 싶었다. 명랑 시트콤이 따로 없다. 그녀의 병은 가족에겐 이미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고통이나 아픔 따위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명랑 시트콤 사이사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눈물이 묻어났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일상을 적어내려간 행간 사이사이 그녀의 절규가 배어있었다. 역시 나는 울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다. 언니를 보내는 동생 만순의 글은 특히나 가슴 찡했다.

그녀가 떠나고 1년이 지난 지금 그의 가족들은 평온을 되찾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렇지 않은듯 그렇게 웃던 가족들이 이제는 제발 소리내어 울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슬프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겠기에 울때 울어야 한다. 울지않으면, 가슴에 맺힌 큰 멍울이 살아있는 삶을 잠식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고, 리뷰 쓰기를 사랑했던 그는 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의 예언대로 북블로그 사에 길이 남을 역사가 되었다.

 

'물만두'의 소소한 일상을 읽기로 선택한 당신은 제발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비루한 자신의 삶을 위로할 방패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말처럼 누구나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지만, 저런 삶보다는 이런 삶이 났다는 섯부르고 천박한 판단은 하지 말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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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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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 부를때 가끔 한번씩 생각하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진숙 씨..

오늘이 단식 17일째인지 18일째인지 날짜조차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이지만 생각날때마다 인터넷을 뒤져본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탈이 났을까. 이건 뭐 걱정인지 불안인지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심이지만, 못내 불안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무심할까 오십줄의 그녀는 차디찬 길바닥에서 곡기를 끊고 움푹패인 목울대를 드러내고 누워있는데... 그녀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녀가 쓴 몇 편의 글을 찾아 읽었다.

어쩌면 이렇게 쓴 글마다 가슴 저아래가 뻐드득대면서 아픈 소리를 내는지.... (2010. 1.29일 메모)

 

처음 김진숙을 알게 된 것은 2010년 1월 경향신문에 실린 하종강의 글을 읽고서였다. 하종강에 의하면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은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앞에 홀로 텐트를 치고 앉아 십몇일째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였는데, 나는 불현듯 나타난 그녀의 이야기가 못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터넷 서핑으로 그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찾아낸 그녀의 글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를 읽는 내내 가슴 속에 찬바람 한줄기 윙윙 소리를 내었다. 내가 알던 노동자 전담 인권 변호사 노무현,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애도하던 글이었는데, 참 야속타 싶었다. 어느 쪽이건 내 쪽이 아니라면 다 적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그리고 몇 일 후 그녀는 단식 농성을 중단했다.
다시 김진숙이란 이름이 신문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떠오르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에는 농성장을 크레인 위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85호 크레인을 선택한 것은 2002년 바로 그곳에서 129일 동안 농성하던 김주익이 목을 맨 곳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랬다해도 쉰이 넘은 해고 노동자가 20여일을 단식하며 길바닥에서 한뎃잠을 잤을때도 몰랐던 사람들은 여전히 몰랐고, 혹은 모르는 것처럼 살아갔다. 그러나 모르쇠로 일관되던 한 노동자의 투쟁은 곧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참 많은 사람들이 크레인 위의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즈음 <소금꽃 나무>를 책꽂이에 꽂았다. 꽂아만 놓고 읽지는 않았다.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에 책을 구입했지만, 나는 노동자가 아니였고 노동자의 삶을 알지도 못했고, 알지 못했지만 대충 노동자의 삶이 어떨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그녀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구구절절히 한맺힌 사연일 것이 뻔했으므로.

 

 
트위터를 시작한 것은 어설프게나마 그녀에게 위로의 메세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날린 첫 멘션에 답글이 왔을때 괜히 코가 찡했다. 어설픈 나의 치기가 그녀에게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멘션.. 그녀의 고공투쟁이 헛된일만은 아니니 힘내시라는 요지였는데 "누군가의 목숨은 사위어가고"라는 그녀의 답은 너무나도 쌩하게 찬바람이 불었다. 선의가 선의로 전달되지 못했을때의 민망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후, 다시는 그녀에게 멘션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올리는 글을 읽었고 마음으로만 응원했다. 무사히, 오늘도 무사히, 곧 내려오시라...
309일만에 땅을 밟은 그녀는 아직도 여전히 병원에 있다. 그리고 몇일전 트윗에서 본 그녀는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올해 가장 많이 한 말이 '고맙습니다'이며 누구보다 고마운 그사람은 아직도 갇혀있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꽂아놓기만 했던 그녀의 책 <소금꽃 나무>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다.
중학교 때 일기장에 칼을 그리고 선생한테 얻어맞은 뒤로
일기조차 진실을 은폐한 관제 일기만 썼고
글 쓰는 걸 취미로 삼아 본 적도 없다.
....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을 하고 싶었다.
억울하다고, 이럴수는 없는 거라고, 난 빨갱이가 아니라고....... (책에서)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과거 운동권이였을 어떤이가 트윗을 통해 고공에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목숨을 받쳐야 할 때'라는 글을 보내왔더란다. 그래서 그녀는 답했다고 한다. '너나 죽어'.
노동자가 아니였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몸으로 일을 해야만 먹고살아지는 그런 노동자가 아니였다면, 그녀 아버지의 표현대로 그녀가 높은 공부를 했더라면 그녀는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 자신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처음 읽었던 그녀의 글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 와 똑깥은 강도의 아픔으로 가슴 저 밑바닥의 뼈들이 뻐걱뻐걱 소리를 내고, 끝없이 가슴 속으로 속으로 질척한 물이 흘렀다.
도저히 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없게 처참했던 그녀의 삶을 어설프게 추측했던 내가 너무도 죄스러웠다.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알량한 내 자만심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아니라고 믿었던 노동자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었음을 알게되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표면적인 배움 밑에 깔린 노동에 대한 경시가 몸에 밴 나는 노동자임을 거부했다. 나는 몸을 써서 먹고 산 그런 노동자가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책상에서 펜대를 굴렸으니까. 그러나 이제야 안다. 나는 노동자, 그토록 부끄러운 이름의 노동자 였다. 내 남편도 노동자, 전문직으로 남들보다 편하게 자식들을 키운 내 아비도 자본 앞에 비굴했던 노동자였다.

 

 

오늘자 신문에는 그녀가 크레인 농성으로 업무를 방해한 죄로 부산지검에 의해 불구속 기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해고 노동자 김진숙을 자유롭게 해달라. 그녀의 꿈인 그녀 소유의 단칸방에서 따뜻한 된장찌게가 끓을 수 있게 그녀를 이제 그만 놓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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