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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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생각할때면 어김없이 배우 안소니 퀸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찾아보니 안소니 퀸이 영화 '조르바'에서 조르바 역할을 했던 것은 맞지만, 내 자신이 영화 '조르바'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또한 내 기억 속의 안소니 퀸은, 약간 모자란 젤소미나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던 영화 '길'의 난폭하던 잠파노였으며, 노틀담의 꼽추로 분한 추하고 이그러진 모습의 안소니 퀸이었다.

 

 

영화 '조르바'를 본 적도 없으면서, 더구나 조르바라고 기억했던 영화 속의 안소니 퀸은 잠파노거나 꼽추였으면서도 조르바를 떠올릴 때 안소니 퀸의 애닲은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열린책들'의 개정판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닌, 역시 '열린책들'에서 2000년 출판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개정된 책에서는 안소니 퀸의 얼굴 대신 두개의 바위산 사이로 분홍색의 먼 섬을 그린 일러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표지그림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으니, 분홍색 섬을 카잔차키스의 고향이며, 조르바의 무대인 크레타일 것이라고 나혼자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오래전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 그가 왜 자유인이라는 것인지 의미와 내용조차 희미했다면, 이번에 다시 읽는 조르바는 한문장 한문장이 가슴을 울리며 다가왔다. 예를들면, 화자인 '나'가 항구도시 페레에프스의 카페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얼굴은 웃되 가면은 부동, 가면 뒤의 실체...', '그는 사랑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바다,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따위의 문장에서조차도 감동을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바라면서도 만사 무상의 허깨비임을 알지 못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던 조르바는 고스란히 책상물림일 수 밖에 없는 화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인간에게는 영원히 지금 이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 '어째서' '왜'와 같은 질문을 하기전에 현상을 고스란히 제대로 느껴보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했다. 언제 어느때, 어느 장면에서고 끊임없이 머릿속 주판알을 굴리고 있는 나역시 부딪히기 전에 계산하는 것이 현명하는 것이며, 손해보지 않는 것이고,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알고있다. 또는 동정이랍시고 내민 손이 덥썩 잡히고 말았을 때의 무색함을 나름의 합리화로 넘기고 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것인지...

순수시를 비롯한 현학적인 이론들과 현상학의 괴리를 조르바는, 진짜 '삶'을 삶으로써 보여주고 있는데, 화자인 '나'로 하여금 자신이 쫓아온 공동체의 삶을 추종하는 사회주의의 완성, 지적세계의 갈망 따위를 한마디로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 따위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삶의 멘토로 삼았던 인물들 중 하나인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었다고 한다. 조르바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따르라고 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면세계가 끊임없이 소란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세계 또한 그토록 끊임없는 질시와 반목, 다툼이 반복되는 것이니...

그러나 생각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것은 또 그대로 여전히 야만적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야만적이라는 것은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는 나로서는 조르바만을  인생의 멘토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조르바를 떠올릴 때 안소니 퀸이 아닌 '자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몇년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읽을 조르바는 '자유' 외의 또다른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나이 처먹고 이도 몇개 빠진 후라면, 조르바가 말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현명함이 생길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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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다해먹는 세상 - 왜 99%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가
크리스 레만 지음, 김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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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비판과 경멸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부자들이 다해먹는 세상>이라는 표현에 내가 처음 생각한 추세나 운동, 관습이 대체로 반영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연히 시작된 칼럼의 시야를 넓혀 미국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14쪽, 서문 중)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 역시 그랬다. 부자들이 다해먹는 세상이라는 제목 속에 이미 누구나 다 알고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한마디로 쿨하게 폭로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하려던 방법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믿을수 있냐며, 가능한한 최대로 깐족거리고 있지만, 역시 미국의 정치와 경제적상황이고, 따라서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과 사건들로 저자의 비아냥어린 조소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나로서는 머릿속이 최대한으로 꼬이는 경험을 제대로 한 책이다.

그런 중에도 아이패드와 같은 초현대적 기기들을 소유할 수 있는 부류로 분류되기 위해 분투하는 싸구려 영혼들의 가련한 분투기와, 자본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대중을 어리버리한 채로 사로잡기 위한 수단으로서 악용되고 있는 프로 스포츠계의 활약상 등은 국가상황을 초월해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거기에 영광스럽게도 우리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IOC 부위원장이었던 김운용의 이름이 부패한 인물로 떡하니 인쇄되어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였으니, 저자의 맹렬한 사회 비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나에게 제대로 충격이기도 했다.

부자들이 다 해먹는 세상에서 교육 또한 다르지 않다. 자본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고이는 것이다.  교육은 경제적 차별의 동력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자본이 흐르지 않도록 막는 제방 역할 역시 수행하고 있다. 이또한 '리틀 아메리카'로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결국, 세계는 국가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 대 빈자로 분류되고 있다라고 봐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들의 세계에는 역시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맞지 않을까. 아니 국가가 이미 부자들이 취할 수 있는 이익에 부합하는 유용한 수단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돈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돈은 사랑만큼 중요합니다. 돈은 닫힌 문을 열어줍니다. 돈을 존경할 필요가 있어요.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어들인 설치 미술가, 데미언 허스트. 104쪽

헉! 소리가 나도록 천박한 논리임에도, 최소한의 교양을 갖은 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임에도 특별히 반발할 만한 말이 없다. 가히 놀라운 통찰이랄 수 있을 정도다. 돈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고, 도덕적 가치를 가리고, 결국 스스로의 양심을 가린다. 정확히 부자들이 다해먹는 세상인 것이다.

 

에세이별로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큰 맥락에서 돈이면 다되는 세상이고, 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안되는 세상이라는 것쯤은 이해했다. 또한, 이 책이 빈자들의 말초신경을 최대한 자극해 보자는 의도로 씌여진 것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다만, 나에게는 자양강장제와 같은 효과보다는 돈의 힘 앞에 무력해지는 경험을 또한번 하게 한 책이다. 그야말로 신분상승을 꿈꾸면서 공정을 이야기하는 가련한 열망을 가진, 싸구려 영혼이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밀가루와 같은 책이었다.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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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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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지은 윤상욱은 프롤로그에서 묻는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통해 연상하는 색은 무슨색인가, 또는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책을 읽기전 먼저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검은색과 사파리여행, 그리고 나와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처럼 보이는 원주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유니세프에서 제작한 원조를 바라는 굶주리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땅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며, 한때는 로미오보다 더 로미오같았던 디카프리오가 애늙이처럼 등장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딱 그지점, 우리가 흔흔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의 땅이며 감성적으로 동정해야할 땅이다.

더이상의 아프리카는 알아야 할 이유도, 알고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아프리카의 굶주림과 독재정치가 서구와 무관하지 않으며, 때문에 유니세프와 함께 내한하는 서양의 음악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인도적이고, 인류애적인 서구식 원조는 드러나는 표면과는 다르게 과거에는 침략자였으며, 현재 정치적으로는 독재자들과의 뒷거래를 통해 아프리카 내전을 충동질하고, 지원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무심결에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어떠한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이 책을 읽고싶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아프리카 원조는 결국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현재 세네갈 주재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이 책을 썼다. 때문에 누구보다 아프리카의 사정을 잘 알고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잘못된 원조방법을 까발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FTA와 WTO에 관계했던 그의 경력을 읽으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세계무역기구와 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일했던 사람이라면 다국적 기업의 개도국에 관한 횡포에 무감각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우려는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은이는 먼저 아프리카의 정체성부터 차근히 설명해주고 있다. 사하라 이북 지방, 즉 북아프리카를 엄밀히 말해 아프리카로 볼 수 없는 이유를 지은이는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는데, 북아프리카는 서아시아의 이슬람국들과 맥을 같이 하며, 아프리카 땅이라기 보다는 이슬람의 땅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또한 북아프리카인들은 이미 고대시대부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사고팔았다. 아프리카의 불행은 '아프리카인의 노예화'와 함께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시대부터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며, 성경 조차도 이를 위해 악용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인간이 아니거나, 혹은 성경에 기록된 죄인들임으로 사고팔며, 그들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부려질 수 있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곳은 지구상에 남아있지 않지만, 독립과 함께 아프리카는 자원의 보고이며,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이렇게 소비되고, 소비될 자원과 시장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아프리카에는 존중되어야 할 인권은 부재하며, 대신 착취가 지금도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착취는 외부인들에 의해서만 자행되는 아니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국민과 나라가 존재한다고 여긴다. 때문에 독재자와 아프리카를 통해 얻게될 수익만을 생각하는 다국적 기업이나 국가가 만났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프리카의 국민들이 입고 있는 상황이다.

탁상원조, 눈먼 원조로 불리는 무조건적인 '원조'나, 공기업의 민영화와 공공 부문과 고용을 감축하고 구조조정을 강제해 반서민 원조 또는 빈곤 확대 원조라는 비아냥을 듣는 신자유주의적 조건부 원조는  무능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생명을 연장하고 그들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기여하며, 아프리카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병들게 한다. 독재들은 공공재에 투자하기 보다는 원조금을 착복해 자신들의 배불리기에 급급하고, 일반 시민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프리카 정부를 배제한 민간 부문의 원조가 보다 효율적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무척 설득력이 있다.

최근에는 중국 주도의 중상주의가 아프리카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는데 민주주의와 인권, 거버넌스를 중시하는 서구인들은 중국의 행위가 독재자를 돕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행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서구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가르치려하는 서구식 원조에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아프리카가 먼저 먹고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자존심이나 자긍심 따위는 자립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원조중독증은 자립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로서 할례라던가, 성의식, 인권문제 등 아프리카 고유의 습속과 문화를 재단할 것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고 대신 교육과 문화적 인프라에 초점을 둔 원조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반발하는 힘을 키우지만,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되면 강요하지 않아도 변화는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국은 '전족'을 외부의 힘으로 없앤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중국인들 스스로 깨뜨렸다.

 

변화는 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아프리카인들이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라고 믿으며, 그러한 변화를 위해 아프리카 외부인 서구나 중국,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원조는 무엇보다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 원조의 중점을 두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국의 혹은 자사의 이익만을 앞세운 표면적인 원조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을 우리와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방법의 원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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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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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카프카 평전>과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를 동시에 읽게 되었다. 오랜시간 지하철을 이용하는 나는, <카프카 평전>이 휴대가 불가할 정도로 양이 많아 집에서만 읽을 수 있었는데, 때문에 휴대용 책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카프카와 마르크스는 모두 디아스포라적 유대인이었고(정확히 카프카와 마르크스는 디아스포라는 아니다. 두사람 다 유대인관습에 대해 무심했고, 시온주의를 표방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의 경우 자신이 유대인 것에 어떤 모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아스포라적의 의미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난, 이주한 유대인으로서 의미이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해에 카프카가 태어났다. 저돌적인 마르크스의 계급에 대한 세기말적 투쟁은 예민한 카프카에 의해 권력과 욕망의 제도화된 메커니즘 속에서 물화되고 소외된 존재에 대한 고뇌, 즉 20세기 실존문학으로 이어졌다. 해서 전혀 관계 없을 듯한 두 사람의 시대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어린시절 좌절이나 억압을 경험하지 않고 성장했다면,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폭력 속에서 성장했으며 확대사회에서는 프라하의 독일계 유대인으로 사회적 경멸과 억압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다. 카프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항상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능력에 관대한 직장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독일계유대인을 경멸하는 자신의 고향 프라하를 떠나, 글만 쓰는 자유로운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다. 그러나 그러한 카프카의 소망은 폐결핵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1년 전 도라 디아만트를 만남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도 잠시, 병이 깊어짐에 따라 카프카의 독립은 6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부모가 있는 프라하로 되돌아가야 했으며, 결국 카프카는 '죽음'으로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카프카는 평생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했으며 자신을 무능력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확대 해석했다. 결혼을 인간의 가장 행복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자신은 병약하고 비사회적이며 우울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다. 때문에 카프카는 세번의 약혼과 세번의 파혼을 경험했으며, 네번째에는 같은 유대문인이었던 에른스트 폴락의 아내를 사랑한다. 이 사랑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카프카의 무의식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여인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그 도전을 늘 스스로 철회함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결혼함으로 아버지와 동등해지길 원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을 거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결혼으로 그토록 좌절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마르크스와 카프카 두사람의 어린 시절을 한꺼번에 봄으로써, 역시 한 개인을 이루는 것은 타고난 성정이기도 하겠으나, 그가 나고 자란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비롯한 사회적 환경이라는 것을 두 사람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카프카는 자신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불안과 심약함, 한정된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소외를 아버지의 자기 본위적인 교육 외에도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아닌 유모의 손에 자라야 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깊이 생각해 볼 때 나에 대한 교육이 많은 방향에서 나에게 해를 끼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7쪽) 이 말을 바꾸면, 부모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잊지 않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오늘날까지 실존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카프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에게 엥겔스가 있었다면, 카프카에게는 막스 브로트가 있었다. 일생동안 뿐만 아니라 카프카 사후까지도 우정을 포기하지 않은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대학시절 독서 모임에서 만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문학의 대변자이며 후원자였고, 카프카 평전을 기술하기도 했다. 지은이 이주동은 막스 브로트가 마지막까지 신의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두번에 걸친 유서에서 몇몇 작품을 제외한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줄 것을 강조했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것이 맞다면, 카프카의 유언은 지켜져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그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이주동은 보고 있지만, 나는 살짝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혹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를 들어 어떤 실익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이는 나의 몹시 개인적인 생각으로, 실존적 고민이라 해두자.

 

 

 

이 책의 지은이는 반갑게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번역에 대한 무리없이 쉽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또한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와는 달리 카프카 개인사에 촛점이 맞춰진 것도 내가 바라는 평전의 모양이여서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와 억압에 억눌림으로 평생을 질식할 지경으로 살아온 카프카의 인간적 비애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내 무의식 속에도 권위에 대한 부당함이 공기처럼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이주동은 이 책을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서 살아가려고 했던 카프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의 일상적인 삶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때문에 카프카 문학 속의 장면과, 편지와 일기가 세세하게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기록으로 책이 무척이나 방대했다. 그러나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카프카가 느끼는 억압과 권위에 대한 반발심에 깊이 공감할 수 있어 무척 재미있었다. 또한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의미가 자유와 해방이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실존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혼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소송>과 <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불현듯 카프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느낀 불안, 고독, 소외, 외에도 그가 꿈꾼 행복, 작지만 따뜻한 인간적인 것에 대해 한없이 가슴이 저려오는 경험을 하였다. 이어서 읽고 싶은 책은, 인간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한 불행한 원숭이의 인간화를 그린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아버지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교육이 낳은 자신의 불안과 심약함에 대해 토로한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와, 추운 겨울에 한 톨의 석탄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쓴 고통 체감기 <양동이를 탄 사나이> 이다.

 

 

그가 원하는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은 문방구와 램프를 갖고 밀폐된 지하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창작은 깊은 잠, 곧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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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포포 기다려
심승현 지음 / 홍익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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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포포는 '추억'입니다. 잊고 사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 삶을 얼마나 살찌우는지 알려주는.

파페포포는 '사랑'입니다. 마음속 누군가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행복의 시작임을 말해주는.

파페포포는 '격려'입니다.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손짓하는 오랜 친구 같은.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읽은 파페포포는 '눈물'이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잔잔하게 아려왔다.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도 내가 그리웠을까 궁금해졌다.

 

 

파페포포 시리즈는 올해로 열살이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첫 출판을 시작으로 그간 네권의 파페포포를 탄생시켰고, 이 책은 다섯번째 파페와 포포의 이야기이다. <메모리즈>와 <투게더>, <안단테>는 <기다려>와 같이 홍익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나머지 한 권 <레인보우>는 2009년 예담에서 출판되었다. 이전에 파페포포를 읽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째서 중간에 출판사를 바꾸었던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기다려>로 단번에 파페와 포포의 팬이 되고 말았다.

 

 

다섯번째 이야기 <기다려>는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찾지 못하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기디려'라고 말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행복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고. 행복을 손에 쥘 수 있는데도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지 잘 알기에 -프롤로그 중.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행복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돌적으로 찾아나서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내가 아는 행복은 항상 함께하지만, 느끼지 못할 뿐 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순간에 행복하다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런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도, 건강한 것도, 웃을 수 있는 것도 모두 행복이라고. 루소가 말했다. 행복이란 고스란히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파페와 포포를 따라가는 길이 모두 행복에 이르는 길이였다. 행복은 자그마한 화초 '아몬드 페페' 속에서 가만히 빛나고 있었고, 천천히 걷는 느림 속에 녹아 있었다. 행복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개그맨 동우 씨의 '세상을 보는 눈' 속에 담겨있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또한번 생각했다. 파페포포는 '눈물'이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시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에서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그 깊이만큼, 넓이만큼,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고백했다. 예전에 그냥 그런 시가 있었지 라고 지나쳤는데, 파페포포에서 읽는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달랐다. 가슴이 아련해졌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아름답게 여겨졌다. 결혼하면 내 고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야만적인 서양 고유의 풍습이 이토록 아름답게 여겨지기도 처음이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내 존재 자체로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파페와 포포 시리즈를 단번에 지르고 말았다.

아는 사람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쫓기듯 허겁지겁 달려가지만, 우리가 찾는 행복은 늘 마음속에 있다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퇴근길에는 화초가게에 들러 '아몬드 페페'를 사야겠다.

 

길모퉁이만 돌아서면 네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행복이 기다리고 있어(사기치지마)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잖아 더 힘을 내!(네가 서있는 곳 바로 그 자리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행복은 어느곳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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