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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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생각할때면 어김없이 배우 안소니 퀸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찾아보니 안소니 퀸이 영화 '조르바'에서 조르바 역할을 했던 것은 맞지만, 내 자신이 영화 '조르바'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또한 내 기억 속의 안소니 퀸은, 약간 모자란 젤소미나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던 영화 '길'의 난폭하던 잠파노였으며, 노틀담의 꼽추로 분한 추하고 이그러진 모습의 안소니 퀸이었다.

 

 

영화 '조르바'를 본 적도 없으면서, 더구나 조르바라고 기억했던 영화 속의 안소니 퀸은 잠파노거나 꼽추였으면서도 조르바를 떠올릴 때 안소니 퀸의 애닲은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열린책들'의 개정판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닌, 역시 '열린책들'에서 2000년 출판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개정된 책에서는 안소니 퀸의 얼굴 대신 두개의 바위산 사이로 분홍색의 먼 섬을 그린 일러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표지그림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으니, 분홍색 섬을 카잔차키스의 고향이며, 조르바의 무대인 크레타일 것이라고 나혼자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오래전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 그가 왜 자유인이라는 것인지 의미와 내용조차 희미했다면, 이번에 다시 읽는 조르바는 한문장 한문장이 가슴을 울리며 다가왔다. 예를들면, 화자인 '나'가 항구도시 페레에프스의 카페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얼굴은 웃되 가면은 부동, 가면 뒤의 실체...', '그는 사랑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바다,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따위의 문장에서조차도 감동을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바라면서도 만사 무상의 허깨비임을 알지 못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던 조르바는 고스란히 책상물림일 수 밖에 없는 화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인간에게는 영원히 지금 이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 '어째서' '왜'와 같은 질문을 하기전에 현상을 고스란히 제대로 느껴보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했다. 언제 어느때, 어느 장면에서고 끊임없이 머릿속 주판알을 굴리고 있는 나역시 부딪히기 전에 계산하는 것이 현명하는 것이며, 손해보지 않는 것이고,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알고있다. 또는 동정이랍시고 내민 손이 덥썩 잡히고 말았을 때의 무색함을 나름의 합리화로 넘기고 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것인지...

순수시를 비롯한 현학적인 이론들과 현상학의 괴리를 조르바는, 진짜 '삶'을 삶으로써 보여주고 있는데, 화자인 '나'로 하여금 자신이 쫓아온 공동체의 삶을 추종하는 사회주의의 완성, 지적세계의 갈망 따위를 한마디로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 따위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삶의 멘토로 삼았던 인물들 중 하나인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었다고 한다. 조르바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따르라고 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면세계가 끊임없이 소란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세계 또한 그토록 끊임없는 질시와 반목, 다툼이 반복되는 것이니...

그러나 생각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것은 또 그대로 여전히 야만적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야만적이라는 것은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는 나로서는 조르바만을  인생의 멘토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조르바를 떠올릴 때 안소니 퀸이 아닌 '자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몇년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읽을 조르바는 '자유' 외의 또다른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나이 처먹고 이도 몇개 빠진 후라면, 조르바가 말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현명함이 생길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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