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2월 14일.
뉴욕시 베이글 제빵사들은 파업에 들어가서 도시에 있는 34곳 베이글 빵집 가운데 32곳은 문을 닫았다. 일주일에 120만 개씩 공급되던 베이글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빵집 선반에서 베이글은 동났고, <뉴욕타임즈>는 같은 사태를 두고 ‘베이글 기근’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빵사들은 1월 고용주들과 합의에 도달했지만, 베이글 운반 기사들은 파업을 이어갔다. 쟁의가 시작된 날로부터 7주 뒤, 파업 중 손해 본 임금을 보상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이뤘다.
1954년 9월 15일.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 참전 군인들 에스파냐 내전에 참전한 반파시즘 지원병들이 자신들을 정부 전복 단체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응하고자 전복활동통제위원회(SACB)에 출두했다.
여단 출신 크로퍼드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흑인이자 이 나라에서 온갖 푸대접을 받은 사람으로 저는 파시즘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고, 파시즘 일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에스파냐로 가서 총탄으로 싸울 기회를 얻었고, 그곳으로 가서 총탄으로 싸웠습니다. 총탄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울 기회가 생긴다면 또 다시 총탄으로 싸울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서 프랑코를 해치우고 파시즘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세계 여러 곳으로 파시즘이 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인들, 자유와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백인들도 파시즘 아래서 사는 건 좋지 않지요. 하지만 흑인들은 파시즘 아래서 아예 살 수가 없습니다. 몰살될테니까요. 에스파냐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저는 인간이라는, 한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흑인이라고 해서 혐오의 눈길을 주지 않았고, 흑인이라고 해서 이런저런 것을 거부하지 않았거든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오랫동안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다 보면, 어딘가에서 인간으로 대우 받는다고 느끼는 게 꽤 좋은 일입니다."
1955년, 3월 2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15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클로뎃 콜빈은 백인 승객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요구에도 아랑곳 않고 버텼다. 경찰에 연행된 콜빈은 도시 인종 분리법을 위반한 여러 죄목으로 기소됐다. 흑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민권 운동 사건으로 유명하고, 시범적인 재판을 만들고자 했었지만, 몇몇 지역 활동가들에 따르면 콜빈 피부색은 검고, 노동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문제마저 됐다. 민권 운동가 그웬 패턴은 <가디언> 기자, 게리 연지에게 말했다. 아이에 대한 피부색, 노동 빈민 출신이라는 점은 문제시 했습니다. 부르주아 흑인들도 노동계급 흑인들을 깔봅니다. 그리고 콜빈은 (의제 강간)으로 임신하자, 지도부는 사건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로자 파크스는 교육수준은 높고 기혼에다 피부색까지 밝은 사람마저 체포되자 민권 운동 지도자들은 그제서야, 대표 주자를 내세웠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는 백인 좌석인 만석이니 백인 승객에게 유색인 좌석을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파크스가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했다는 대중적인 신화와는 달리, 그녀는 사실 인종 분리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는 활동가였고, 직접 행동 훈련을 받은 바 있었으며, 백인을 위해 자리를 비우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다른 흑인 여성들을 지원하고자 모금 활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파크스는 나중에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지친 것이라곤 양보하는 일뿐이었다.” 인종차별 반대 단체들은 파크스 사건을 계기로 도시 전역에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조직했다. 운동은 민권 운동에서 핵심적인 투쟁이 됐다.
1955년 12월 5일.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자신이 앉아 있던 유색인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지 4일 뒤,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시작됐다. 인종평등뿐만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는 흑인 여성들의 투쟁 일환으로서도 민권 운동 중대한 순간이었다. 당시 주로 가사 노동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이 도시 버스에서 성추행을 비롯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승차 거부 운동이 폭발하기 전부터 여성 수십 명이 버스 기사 추잡한 성적 욕설과 부적절한 신체 접촉, 성폭력에 불만을 제기했다.
1957년, 1월 31일.
미국 뉴욕시, 유대인 베이글 제빵사, 350명은 파업에 들어갔다. 베이글을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들은 파업 초반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타이어에 구멍을 내고는 트럭을 가로채고, 열쇠를 훔치는 제빵사들을 설득 끝에 파업에도 동참했다. 펙터제과, 노동자, 385명도 파업에 가세했다. 제빵사들은 33일 동안 끈질기게 파업을 벌였으며, 결국 뉴욕 제방업체 34곳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복지 수당을 인상하는 데도 동의했다.
1958년 7월 19일.
캔자스주 위치토에서 미국 민권운동 초창기에 아주 중요한 성공을 거둔 앉아 있기 시위가 시작됐다. 흑인 학생 한 무리가 인종차별에 항의하고자 도컴드러그스토어 백인 전용 간이식당에 입을 다문 채 앉아 있기 시작했다. 영업을 방해해 경제적 타격을 줌으로써 인종차별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경찰과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괴롭힘이 계속되자 학생들은 자위를 위해 몽둥이와 칼, 그리고 총을 챙겼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쓸 필요는 없었다. 23일 뒤, 드러그스토어 소유주는 시위에 굴복하면서 체인점 전체에서 인종 분리를 폐지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처음에 이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시위가 위치토에서 성공을 거두자 같은 전술을 채택했고, 그리하여 수 많은 주의 간이식당에서 인종 분리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
1958년. 1월 18일.
노스캐롤라이주 맥스턴 근처에서, 헤이스 연못 전투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KKK 집회를 무산하게 했다. 지역에 사는 럼비족을 반검둥이 혼혈인 ‘튀기’라고 여긴 KKK는 백인 남성은 다른 인종과 연애하는 데 불만을 품고는 소수이고, 하찮은 지위, 럼비족을 손 쉬운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KKK 단원들은 백인 남성과 연애하던 럼비족 여성 집 앞 잔디밭에서 십자가를 태웠다. 심해진 행동으로, 인종 혼합을 끝장내겠다는 취지로 열린, 1월 18일, 집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KKK는 집회에서 5000명이 참석할거라고 선언했다.
집회 당일, KKK 측에는 구성원 50명, 다른 백인우월주의자로 100명 정도가 모였는데, 맞서 2차 대전 참전군인들을 선두로 샷건, 몽둥이, 돌멩이로 무장한 럼비족 500명도 나타났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총을 쏘며, 공격에 나선 KKK 단원 4명에게, 경상을 입혔다. KKK는 대응하고자 총을 쐈지만 1명도 못 맞췄다. 완패한 KKK는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럼비족은 그들 오디오 장비를 빼앗고는 즉석에서 모닥불을 피워서 KKK 옷가지, 현수막을 태웠다. 도착한 경찰은 잔치를 즐기던 원주민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사건도 벌어진 뒤로 KKK에 대한 대중적 분노, 들꿇었고, 뒷날 지역 KKK 지도자는 폭동을 선동한 죄로부터 2년 징역형을 받았다. 굴욕으로, 지역에서는 KKK 활동은 끝났으며, 럼비조근 해마다 같은 사건을 기념일로 여긴다.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 백인 전용 울워스 간이 식당에 들어간 흑인 대학생 4명이
주문을 거부당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까지 8000여 명은 짐크로 인종차별법에 맞서 앉아 있기 운동을 벌였다.
1960년, 2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앉아 있기 운동인 롤리(Raleigh)에 당도했다. 흑인 학생들은 도시 전역에 있는 백인 전용 간이식당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간이식당들은 문 닫는 걸로 대응했다.
1961년, 5월 4일.
인종 분리 정책을 규탄하는 버스 원정대, 프리덤 라이더스는 미국 남부에서 주간 버스 이동, 인종 분리에도 맞서고자 직접 행동에도 돌입했다. 법적으로는 인종 분리를 금지했는데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분리는 있었고, 경찰은 KKK, 폭력적인 백인 인종주의 폭도들과도 협력해서, 흑인, 흑인을 옹호하는 백인 승차자들을 공격했다. 승차자들은 꾸준하게 싸웠고, 일부로는 자위 수단으로 총을 들었다. 11월, 인종에 따라 분리한 버스 좌석은 사라졌다.
1961년, 6월 8일.
미시시피주, 잭슨에서는 콰메 투레(스토클리 키마이클), 궨덜린 그린, 조앤 멀홀랜드를 비롯한 한 무리, 프리덤 라이더를 체포했다. 투레는 훗날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에 이어, 블랙팬서당 핵심 조직자였다. 투레는 FBI 코인텔프로 표적이 되고는 악성 소문에 휩싸여서, CIA 첩자라는 유언비어마저 퍼졌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에서 추방됐다.
그린(브릿)은 1960년, 메릴랜드에 있던 백인 전용 글렌에코, 놀이공원에 들어가서, 버티다가 체포된 적도 있었다. 그린은 동료들과 함께 미국 나치당 반대 시위자들과 대결하면서부터 여름은 끝날 때까지도 팻말 시위를 지속했다.
체포 당시, 19세이던, 멀홀랜드는 여러 차례, 앉아 있기 민권 운동에도 참가해서는 가족에게 의절당한 상태였다. 1963년, 다른 활동가, 4명, 미시시피를 돌아다니던 가운데, 사살 명령을 받은 KKK로부터 차량에서도 공격받았지만, 가까스로 도망쳤다. 멀홀랜드는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961년 8월 15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먼로에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에 속한 한 집단이 시의원들에게 인종평등을 위한 10개조 강령을 제시했다. 경찰이 공모하는 가운데 대대적인 인종 폭력 사태에 직면한 많은 흑인 줌니은 자위를 위해 무기를 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해병대 출신의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지부장 로버트 F. 윌리엄스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에 맞서 자위에 나설 것을 주창했다. 윌리엄스는 흑인무장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전미총기협회클럽을 만들어 KKK 공격으로부터 흑인 지역사회를 방어했다. FBI는 그에게 허위 유괴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윌리엄스는 결국 부인 메이블과 함께 1961년 쿠바로 도망쳐야 했다. 쿠바에서 그는 미국 남부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급진적인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1965년 부인과 함께 다시 중극으로 거취를 옮겼다. 1969년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체포됐지만, 1975년에 이르러 그에 대한 모든 기소가 기각됐다. 1996년 그가 사망했을 때 전설적인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는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었다. 파크스는 “그의 용기와 자유에 대한 헌신”을 기리며 “그가 한 행동을 역사로 기록해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1961년 11월 30일.
쿠바 프로젝트, 일명 몽구스 작전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승인을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공산당을 전복하려는 CIA의 비밀 공작이었다. 따라서 CIA는 철도, 석유, 식량 저장고, 발전소, 제재소 등 쿠바의 여러 표적을 겨냥한 수 차례 테러 공격을 지휘했다. 몽구스 작전은 1962년 말에 공식적으로 종료됐지만, 미국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쿠바 경제에 대한 파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62년 9월 10일.
미시시피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민권 운동가 패니 루 해머 암살을 시도했다. 인종주의자들은 친구 메리 터커와 함께 살고 있는 해머의 집 앞으로 차를 몰면서 총탄 16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그에 앞서 해머는 유권자 등록을 시도했지만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등록을 막고자 고안된 인종 차별적인 심사 때문에 거부당했다. 해머는 “사실상 법률”이 무엇인지 설명하라는 질문에 답하지도 못해 심사에서 떨어졌다.
1963년, 6월 12일.
미시시피 대학교, 인종 차별을 폐지하고자, 활동한 미시시피 출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가, 메드거 와일리 에버스는 바이런 드 라 벡위드 총알을 등에 맞고 숨졌다. 이른 아침 모임을 마친 뒤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진입로로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백인우월주의, 백인시민협의회(WCC) 구성원이었던, 벡위드는 바로 체포했다. 나중에 두 번 재판을 받았다. 주 당국은 미리 불법적으로 심사하고는, 조사한 백인들로만 구성한 배심원단은 평결을 맡았다. 두 번째 재판은 진행하던 가운데, 불쑥 들어온 전 주지사는 에버스 부인 미얼리는 증언하는 동안, 벡위드와 악수를 나눴다. 무죄로 풀려난 벡위드는 오랫동안 KKK집회에도 참석해서는 에버스를 죽인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또한 민주당에서 주지사 후보 지명을 받으려고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미얼리는 수년간 운동을 벌여서, 재심을 이끌어냈고, 1994년, 벡위드는 마침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벡위드는 몇 년 뒤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1964년, 6월 21일.
6월 21일, 밤, 21세 흑인 미장공, 미시시피주, 메리디언 출신 인종평등회 조직자 제임스 체이, 21세 뉴욕 출신 유대계 백인 인류학과 학생 앤드루 굿맨, 24세 뉴욕 출신 유대계 백인 인종평등회 조직자이자 전 사회복지사 마이클 미키 슈워너까지 3명 민권 운동가는 미시시피 KKK 백인기사단, 네쇼바 카운티 보안관실 직원,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 경찰에게 린치를 당했다.
세 사람은 프리덤 서머 운동으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가운데였다.
1965년, 2월 21일.
미국, 민권 운동, 블랙파워 운동에서 중요한 연설가, 활동가, 맬컴 엑스으로 더 유명한,
엘하지 말리크 엘샤바즈는 뉴욕에 운집한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준비하던 가운데, 암살 당했다.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였던, 맬컴 엑스로는 절대적 비폭력 원칙을 비판하면서도, 비폭력을 고수하느라 흑인 해방이 뒤로 미뤄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형태로 된 착취를 반대했다. 살해되기 한 달 전, 면담(인터뷰)에서, 흑인 대 백인 싸움은 근본적인 투쟁이라고 믿었으며, 다음으로, 이제는 가진 자, 못 가진 자에 대한 싸움은 근본적인 투쟁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1965년, 3월 16일.
앨라배마주, 몽고베리에서는 기마경찰은 평화적인 민권 시위에도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과 막대기로 무장한 경찰관들은 600명이 모인 시위대로 돌진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고, 입원자 8명 외에도 다수 부상자도 나왔다. 이튿날 2배로 늘어난 시위대는 거리로 쏟아졌다.
1965년 8월 11일.
로스앤젤레스 경찰관들이 젊은 흑인 운전사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언쟁이 벌어진 끝에 와츠 지역에서 폭동이 벌어져 6일간 이어졌다. 대규모 약탈과 경찰을 겨냥한 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이 항쟁을 계기로 민권 운동의 일부 세력은 평화주의만을 고수하지는 않는 태도로 돌아섰다.
1965년 11월 18일.
성차별주의라는 용어는 아마도 프랭클린앤드마셜칼리지에서 열린 학생 교직원 포럼에서 폴린 M. 리트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리트의 포럼 발표문인 <여성과 대학생>에서 성차별주의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리트는 인종주의와 비교해서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군가 좋은 시를 쓰는 여성이 적기 때문에 여성을 완전하게 배제해도 된다고 내세운다면, 인종주의자 논리와 비슷한 논리를 구사하는 셈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성차별주의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는 둘 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전혀 일어난 적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무관한 요소를 참조해 다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1966년, 1월 3일.
재향군인, 민권 운동가, 새미 연지 주니어(Sammy Yonge Jr.)는 앨라배마에서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연유)로 살해당한 첫 흑인 학생이었다. 같은 해 11월, 살인자는 기소됐지만,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살인자를 무죄방면했다.
1966년, 1월 10일.
미국 미시시피에서, KKK는 혼혈 투표권 활동가 버넌 다머, 집에다 화염병을 투척했다. 가까스로 아이는 구했지만, 본인은 중화상, 연기 흡입으로 이튿날 사망했다. 생전 투표자 등록에 필요한 돈 없는 이들에게, 인두세를 내주겠다고 제안했으며, 덕분에 더 많은 흑인들도 투표할 수 있었다.
1966년, 6월 6일.
반인종주의 활동가, 참전 군인이던, 제임스 메러디스는 인종주의에 항의하고, 흑인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고자, 테니시주, 멤피스에서 미시시피주 잭슨까지 약 322킬로미터(200마일)도 넘는 거리에서 1인 행진을 시작했다. 같은 과정에서도 암살을 노린 한 백인 남성 총에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메러디스 대신해서 행진을 지속했다. 메러디스는 상처는 완쾌하기도 전부터, 다시 행진에도 합류했다. 잭슨에 도착했을 때는 1만 5000여 명은 함께였다. 행진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위를 위해 무장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단체, 방어와정의를위한부제들은 대열을 보호했다.
메러디스는 백인만 다니는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처음 입학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입학에도 항의하고는 폭동을 일으켜서, 자동차를 불태우고, 기물을 파괴하고, 연방 요원들, 군대를 돌멩이, 벽돌, 총으로도 공격까지 했다. 폭력 사태는 잦아든 뒤에도, 많은 백인 학생들은 메러디스를 피하거나, 괴롭혔다. 메러디스는 현재 86세이고, 많은 책을 썼다.
1966년, 6월 22일.
시카고, 푸에르토리코 날 행진은 끝난 뒤로, 한 젊은이는 경찰이 쏜 총에 다리를 맞으면서부터, 이틀 간 디비전스트리트 폭동이라 불리는 대사건도 벌어졌다.
1966년 10월 15일.
보비 실과 휴이 P. 뉴턴이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만나 자위를 위한 블랙팬서당을 만들었다. 블랙팬서당은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1982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초등학생을 위한 무료 아침 식사 제공과 지역 사회 진료소 설립, 무장 시민 순찰대와 경찰 감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단체에 대해 거의 언급되지 않는 사실로는 1970년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여성과 소녀들이었다.
1967년, 1월 17일.
혁명 조직 블랙 팬서당 구성원이던 번치 카터, 존 허긴스는 흑인 민족주의 단체였던 US 기구로부터 한 성원에게 살해 됐다. US기구는 FBI로부터 치명적 분영을 야기하려는 의도로, 계획하고는 코인텔프로 약자로, FBI는 1956-1971년, 웨더맨 등 급진조직, 민권단체, KKK등 미국 내부 저항조직을 조사하고, 무력화하고자 진행한 프로그램 과정에서도 조종한 단체였다.
1967년, 2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성해방 선술집 블랙캣 앞에서, 경찰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경찰에게 지나친 단속, 반문화 청년들을 괴롭히는 행태에도 항의해서 같은 날 밤 도시 곳곳에서는 동시다발로 벌어진 시위였다. 블랙캣은 시위 장소로, 1월 1일, 경찰에 대한 폭력적 단속으로 벌어진 현장에서, 경찰은 블랙캣 손님들을 공격하면서부터 동성끼리 키스를 했다는 이유로 14명을 연행했다. 1966년, 결성된 동성애 단체 프라이드(PRIDE)도 시위를 지지했다. 성해방 권리운동에서 단체명이 프라이드라는 용어로 사용된 첫 사례다.
1967년, 5월 2일.
소총, 샷건으로 무장한 블랙팬서 당원 한 무리는 자신들을 겨냥한 총기 규제 법안에 항의했다. 캘리포니아주 의사당으로 행진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 폭력, 괴롭힘에도 맞서고자 블랙팬서 당은 라디오 장치를 이용해서 경찰 호출을 도청하고는 법률 서적을 가지고,
체포 현장으로 나타났다. 몇몇은 샷건을 합법적으로, 공공연하게 휴대한 채로 당원들은 나타나서, 체포된 사람들에게 헌법 권리를 조언해줬다. 당국은 경찰에 맞선 자위 행동을 저지하고자, 공공 장소에서 장전한 총기를 휴대하기를 금지하는 언론에서는 팬서 법안이라고 불린, 멀퍼드 법안을 도입했다. 전미총기협회로는 공화당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은 법안 서명을 지지했다.
1967년, 6월 20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는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알리는 미국 전쟁을 확고하게 반대한 인물이었다. 루이빌에서는 이른바 흑인(니그로)들에게 개 같은 대접을 받던데, 도대체 왜 군복을 입고는 고향에서는 1만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서, 베트남 황인들에게 폭탄, 총탄을 퍼부어야만 하는가.
전쟁에 대한 저항은 고조되는 분위기를 잠재우고자, 법원은 알리에게, 5년 징역형, 벌금 1만 달러라는 최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반전 운동은 지속했다.
흑인 민족주의 종교·정치 단체, 이슬람네이션은 알리와 거리를 뒀지만, 이집트에서는 가이아나, 런던, 가나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지지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4년 뒤, 대법원은 알리에 대한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알리는 행동을 전혀 후회하지는 않았다.
1967년 7월 23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경찰이 이른 아침 저소득층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에 자리한 술집을 급습한 뒤, 미국 역사상 손 꼽히는 규모의 항쟁이 일어났다. 흑인과 백인 주민들은 거리에서 경찰과 싸우고 물건을 약탈하는 한편, 저격수들이 창문을 통해 경찰에게 무차별한 사격을 가했다. 폭력 사태는 40여 명, 연행자 7000여명, 건물 2000여 채 이상의 파괴라는 결과를 낳았다.
1968년, 2월 8일.
볼링장, 인종 분리에도 항의하는 블랙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학생들에게 경찰은 발포했으며, 3명은 사망하고, 27명은 부상을 입는 오렌지버그 학살도 벌어졌다. 켄트 주립대학교에서도 백인 학생들도 사망한 1970년, 5월 5일, 사건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다.
1968년, 5월 2일.
디트로이트, 햄트래믹,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4000명은 생산선 속도 증대에 항의하고자 일손을 놓았다. 파업 노동자 일부로는 길 건너편 술집에 모여 흑인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다지혁명노동조합운동(DRUM)을 결성했다. 두 달 뒤로부터 첫 번째 살쾡이 파업을 조직했다. DRUM은 다른 공자에서 활동하는 비슷한 모임들에도 영감을 줬고, 모임들 뒤로는 혁명흑인노동자연맹(LRBW)을 결성했다.
1968년 7월 8일.
흑인 노동자들이 새롭게 만든 단체인 다지혁명적노동조합운동이 전미자동차노조 산하 노동조합이 수용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자 디트로이트 다지 자동차공장에서 피케팅을 벌이며 수천 명의 출근을 막았다.
1968년 8월 28일.
시카고 흑인 버스 운전사들이 인종차별적인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살쾡이 파업에 돌입했다. 운전사 80%가 흑인이었음에도 백인으로만 구성된 노동조합 지도부는 흑인 노동자들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업에 대응하여 투입된 백인 대체 인력은 부유층 동네에서 계속 버스를 운행했다.
1968년 9월 25일.
시애틀 시의회가 공화당 시장 제임스 브레이먼의 지령에 따라 블랙팬서당의 자위 순찰을 막고자 총기 규제 법안을 도입했다. 백인들에게 공격과 위협을 당하는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무장한 블랙팬서 당원들이 레이니어비치고등학교에 나타나자 시의원들은 경악했다. 시 당국은 “타인을 위협하고자, 위험한 무기”를 소지하기를 금지하는 비상조치를 통과시켰다.
1968년, 3월 1일.
이스트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우드로윌슨고등학교에서 멕시코계 학생들은 학생 연극을 취소한 데 항의하는 파업에도 들어갔다. 며칠 뒤로부터 3월 6일, 동맹파업도 시작해서는 7개가 넘는 고등학교에서 약 1만 5000명, 학생들도 참가했다. 학생들은 라틴계 교사를 늘리고, 멕시코계 미국인 역사를 포함한 교과서로 변경하라고 했다. 멕시코계 학생들은 수업에서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하지도 못했으며, 진로상담사, 교사들은 대학 진학을 말리는 일도 잦았다. 1967년 한 고등학교에서는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 자퇴율은 57.5%로 이르렀다. 경찰과 학교 행정관리들은 학교 문을 봉쇄했으며, 평화적으로만 시위하는 학생들을 연행했고, 파업을 중단하게 하고자 했지만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에 이어서 3월 11일 학생들은 로스앤젤레스 교육위원회와 특별 면담을 갖고는 수십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교육위원회는 요구사항 절대 다수에 동의한다면서도 예산은 부족해서 전부 들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파업은 멕시코계 노동계급 청소년들을 한데 모으고 급진화하도록 도움은 줬다.
1968년, 4월 4일.
민권 운동가, 사회주의, 비폭력 주창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던 가운데 암살당했다. 파업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파업 물결 일환이었다. 몇 년 전부터 킹 사고는 점점 급진화했고, 인종 차별 반대 외로도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미국이 벌인 제국주의 행동,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킹은 모든 인종 노동계급, 빈민을 단합하고자 빈민 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킹은 제도권 인물들로부터 널리 칭송받지만, 당시로는 대다수 미국 백인들뿐만 아니라, 부유층, 권력자들에게도 증오 대상이었다. 부정적인 언론 보도마저 부추기는 가운데, 미국인 22%만이 대중 교통 인종 분리를 폐지하는 운동이던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s)에도 찬성했고, 63%는 킹을 반대했다.
FBI, 미국 정보 책임자, 윌리엄 설리번은 킹을 공산주의, 흑인, 국가 안보, 관점에서 볼 때, 미국에서 매우 위험한 흑인이라고 평가했고, 훗날 킹을 자살로 내몰고자 익명으로 협박 편지도 보냈다. 킹은 암살당하자 많은 사람들은 평화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렸고, 미국 전역에서도 폭동을 벌였다. 남북 전쟁 뒤로부터 사회적 요소로는 매우 큰 폭발이라는 한 사례였다.
1968년, 4월 6일.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암살당했다. 불과 이틀 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경찰은 17세, 블랙팬서당원이던 리틀 보비 허턴을 살해했다. 허턴은 블랙 팬서당 최초 신입 당원이었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뒤 곧장 항복했다. 총을 내려 놓고는 셔츠를 벗어 맨가슴을 드러낸 채 두 손을 든 상태로 숨어 있던 지하실에서 나왔다. 항복할 때는 옷 벗고 하라는 조언을 동지에게도 들었는데, 경황은 없어서 깜빡하고는 바지를 벗지는 못한 채였다. 경찰은 최소한 10차례나 사격을 가해서 죽였다. 6일 뒤, 1000명도 넘는 사람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했고, 배우 말런 브랜도는 추도 연설도 했다. 사망을 계기로부터 블랙 팬서 당도 급격하게 성장했다.
1969년, 6월 28일.
한밤 중, 스톤월 항쟁을 시작했다. 뉴욕 경찰청은 게이 술집을 폐쇄하는 정책 일환으로,
빈곤층, 노동계급 성소수자 단골들도 많은 스톤윌 인을 불시에 단속했다. 그러나 뉴욕 역사상 처음으로, 군중들은 순순히 체포하기를 거부하고는 경찰 주변으로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술집 안에 있떤 젠더비순응자, 트렌스 여성, 레즈비언들은 경찰에게 지나친 몸수색을 저항했다. 바같에서는 한 부치 레즈비언은 체포에도 저항하고는 경찰에 맞서 싸우면서 뭔가 하고자 모인 군중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몇몇 증인, 당사자 설명에 따르면, 같은 이름으로는 스토르메 드라르브리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레즈비언들 수호자로 알려진 혼혈 레즈비언, 드랙퍼포머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같은 날, 밤 체포된 레즈비언에 대한 경찰 유일한 기록으로는 매릴린 파울러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들을 반박했다.
상당수 흑인, 라틴계, 백인 성소수자 지지자, 행인들도 포함된 군중들은 뒤로부터 경찰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부터, 6일 동안 항쟁을 벌였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로는 마샤 P. 존슨, 존 오브라이언, 인기 포크 음악가, 데이브 밴 롱크 등도 있다.
항쟁 뒤로는 오브라이언, 마사 셸리를 비롯한 참가자들, 성해방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설립한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은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서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이듬해 6월 28일,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스톤월 항쟁, 1주년 기념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는
프라이드 연례 축제로 되어 세계 곳곳에서도 이어졌다.
1969년, 1월 22일.
디트로이트에서 자리한 엘던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동자들은 불만사항을 내걸고는 전미자동차노조(UAW)를 향해 행진했다. 앞선 노동자들은 엘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ELRUM)을 결성하고는 다음 날 파업을 선언하면서부터 노동자, 3분의 2는 공장에 들어가고자 막았다. 회사는 수십 명 투사를 해고했으며, 징계로 보복했다. 그러나 엘던혁명적노동조합운동은 다시 조직을 재건했다.
1969년, 2월 28일.
블랙팬서 당은 워싱턴 주, 올림피아 주, 의사당에서 당국 무장해제 시도를 항의하도록 하는 무장 시위를 벌였다. 비무장 흑인들을 무수하게 살해한 경찰에도 맞서,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으로는 블랙팬서 당, 무장 요원들은 자위 순찰을 했다. 주 의원들은 타인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방식으로부터, 총기 등 무기를 내보이는 행동을 중범죄로 규정한 법안을 통과하도록 한 바 있었다. 공화당 소속 시애틀 시장도 비슷한 법안을 통과하도록 한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의원들은 서둘러(에둘러) 법안을 처리했으며, 블랙팬서 당은 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한 경찰들은 지레 겁 먹거나, 경찰관 수십 명을 진압대로 선발하는 등 한편, 의사당 지붕에다가 기관총까지 설치했다. 차량 4대를 타고 온 블랙팬서 당 시위대는 경찰 요청에 따라서 장전된 총알을 뺐다. 시위대 가운데 1명으로는, 에런 딕슨은 의사당으로 들어가서는 의원들을 대상으로 5분간 발언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문을 막고, 관리들에게 발언을 듣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시위에도 불구하고, 주지사, 댄 에버스는 앞선 법안에다 서명했다.
총기소지권리 옹호단체로도 유명한 전미총기협회는 블랙팬서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며, 다른 단체들 또한 블랙팬서 당, 총기를 압수하려는 공화당에 대한 법적 조치를 지지했다.
1969년 7월 18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블랙팬서당이 백인 반인종주의단체 청년애국자기구 및 푸에르토리코계 급진단체 영로즈의 공동회의를 열었다. 청년애국자기구는 애팔래치아 출신 이주민들이 주축을 이루는 빈민단체였다. 그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처음에는 남부연합기를 내걸었다. 그것이 반란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색인 공동체와 함께 활동하면서 점차 남부연합기가 구제 불능의 백인우월주의 상징임을 깨닫고 그것을 버렸다. 블랙팬서당 지도자 프레드 햄프턴은 경찰에 암살당하기 전까지 청년애국자기구를 비롯한 백인 노동계급 청년들과 연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69년 9월 12일.
뉴욕 시에서는 동성애자해방전선이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의 동성애 혐오 광고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스톤월 항쟁 뒤로 설립된 동성애자해방전선은 성해방 권리 운동에서 질적인 변화가 이뤄졌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이전까지 동성애자 운동이 보여준 온건하고, 동화주의적인 태도와 완전하게 결별하고는 전투적 행동, 동성애자 해방, 억압 받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주창했다.
1969년 11월 20일.
아메리카 원주민 78명이 알카트라즈섬을 점령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교 설립 등 권리 확대를 요구했다. 점령자들은 의회를 만들고, 학교를 세웠고, 자발적으로 모든 업무를 나누면서 주요한 모든 결정을 투표로 처리했다. 이들은 1971년 6월까지 버텼으나 당국은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시위자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행동은 세계 각지에 보도됐고, 아메리카 원주민 운동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1969년 11월 23일.
블랙팬서당 지도자 프레드 햄프턴이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WILPF)이 주최한 일리노이대학교 집회에서 발언했다. 참가자 가운데로는 국제앰네스티 공동 설립자이던 변호사 루이스 쿠트너도 있었다. 햄프턴은 알지 못했지만, FBI 정보원이었던 쿠트너는 FBI 담장자에게 집회에 관해 보고했다. 쿠트너는 햄프턴이 “고함을 지르고 열변을 토했다”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구성원인 닉슨 대통령을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내세웠다. 그러면서 쿠트너는 햄프턴이 연방 법률을 위반했을 수 있기 떄문에 이런 사실을 FBI에게 보고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불과 며칠 뒤 FBI는 겨우 21세인 햄프턴을 살해했다.
1969년 12월 4일.
FBI와 공조한 시카고 경찰은 블랙팬서당 지도자 프레드 햄프턴 아파트를 급습해서 침대에서 자고 있던 그를 살해했다. 그날 저녁 FBI 정보원은 햄프턴에게 접근해서 마약을 먹였고, 이후 요원들에게 햄프턴의 침대 위치를 알려줬다. 햄프턴은 임신 9개월째이던 약혼자 데버라 존슨과 함께 자다가 습격을 당했다. 블랙팬서당 동료 활동가 마크 클라크도 같은 공격으로 살해 당했고, 다른 몇 명은 부상을 입었다. 겨우 21세이던 햄프턴은 유능하고,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조직자로 백인 노동 계급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푸에르토리코인, 아메리카 원주민, 멕시코계, 중국계, 백인 급진주의자 등을 아우르는 ‘무지개 동맹’을 형성하던 중이었다. 햄프턴과 클라크는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가 진행한 코인텔프로 작전의 매우 유명한 희생자로 꼽힌다. 작전은 무엇보다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저항을 단합시킬 수 있는 흑인 메시아의 등장을 가로막고자 하기 위험이었다.
1969년 12월 31일.
드와이트와 칼 암스트롱 형제는 위스콘신주 매디슨 외곽에 있는 공항에서 세스나 쌍발기를 훔쳐 북쪽으로 53마일을 날아가 배저육군탄약공장에다 폭탄 3개를 떨어뜨렸다.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행동이었다. 공장은 형제의 삼촌이 일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곳이기도 했다. 폭탄은 불발에 그쳤지만, 이는 베트남 전쟁이 길어지는 가운데 미국을 뒤흔든 수 많은 폭력적인 반전 행동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 3월 18일.
여성주의 단체 활동가들은 뉴욕시에 있는 <레이디스홈저널> 본사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고위 간부는 전부 남성이었기 때문에 잡지사 여성에 대한 대표성이 부족하고, 홍보(광고)와 기고(칼럼)에서도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편집장은 일부 요구를 수용하고는 활동가들에게 직접 쓰는 기고란 한 꼭지를 맡기기로 하면서, 연좌시위는 끝났다.
1970년, 4월 16일.
디트로이트에 있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 백인 작업 반장은 한 흑인 노동자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흑인 노동자는 회사로도 고발했지만 크라이슬러는 흑인 노동자는 칼을 소지하고 있다면서 정작 해고 조치를 취했다. 백인과 흑인 노동자는 약 1000명은 항의하고는, 파업에도 나서 주말 내내 공장을 폐쇄했고, 경영진들은 한발 물러났다.
1970년, 5월 5일.
미국 대학생 수만 명은 베트남 전쟁에도 항의하고는 전국 학생 파업에도 나서 강의실을 박차고 거리로 나왔다. 학생들은 전날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주 방위군은 핚생 4명을 살해한 데 항의했다.
1970년 7월 14일.
푸에르토리코계 활동가단체인 영로즈가 링컨병원 본관을 점거했다. 뉴욕시 당국이 사우스브롱크스에 사는 푸에르토리코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보건 요구에 무관심하다는 것과 링컨병원의 열악한 의료환경에 항의하고 했다. 영로즈의 링컨병원 점거는 이스트할렘의 공중보건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가 진행한 활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공중보건운동에는 불규칙한 쓰레기 수거에 항의하는 행동인 가비지오펜시브, 빈곤층 아동을 위한 아침식사 제공 프로그램, 진보적 간호사·의료 기술자·의사 등과 협력해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어린이 납중독 테스트와 성인 폐결핵 검진을 진행한 레드오펜시브, 그리고 이를 위해 시가 운영하는 폐결핵 트럭을 탈취하는 행동 등이 있었다.
1970년 8월 6일.
청년국제당, 일명 이피(Yippies) 반문화 급진 청년 300명이 디즈니랜드에 몰려가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며 가부장제 포로가 된 미니마우스를 해방하라고 호소했다. 디즈니랜드 후원사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베트남 전쟁에 자금을 조달한 데 항의했다. 디즈니는 추가 경비 인력과 전투경찰 150명을 동원해 시위에 대응했다. 시위는 마치 연극처럼 꾸며진 총회였다. 청년들은 뗏목을 타고 디즈니랜드 포트월더니스 캠핑장으로 몰려가고, 대놓고 대마초를 피우고, 미국 메인스트리트 테마 거리에서 지그재그로 행진하고, 뱅크오브아메리카 지점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도발적인 행동을 벌였다. 결국 몇 명이 연행되고 나머지는 공원에서 쫓겨났다.
1970년 10월 13일.
26세 흑인 공산주의자 엔젤라 데이비스가 뉴욕시에서 FBI에게 체포됐다. 데이비스는 8월의 탈옥 시도와 관련해서 체포 영장이 발부된 뒤 캘리포니아에서 도망친 상태였다. 악명 높은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데이비스를 FBI의 10대 지명 수배 탈주범 명단에 올려놓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체포 소식을 듣고는 “위험한 테러리스트를 체포했다”며 FBI를 축하했다. 결과적으로 데이비스는 모든 혐의를 벗고 무죄 방면됐다.
1970년 10월 27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 공화당 행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일환으로 약물 오남용 예방 통제 종합법을 통과시켰다. 닉슨의 보좌관 존 얼리크먼은 훗날 <하퍼스매거진>에 실린 댄 바움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놨다.
1968년 닉슨 선거 운동과 그 후 닉슨 백악관에는 두 적이 있었습니다. 반전 운동을 벌이는 좌파와 흑인이었죠.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우리는 반전 운동이나, 흑인을 불법화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지만, 대중으로 하여금 히피를 마리화나나, 흑인을 헤로인과 연결 짓게 하고는 두 가지를 중범죄로 만들면서 그 집단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지요. 우리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자택을 급습하고, 집회를 해산하고, 매일 저녁 뉴스로부터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우리가 마약에 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1970년 11월 2일.
배우이자, 미군 베트남전 참전 반대 운동 지지자인 제인 폰다는 캐나다에서 열린 전쟁에반대하는베트남전참전군인모임(VVAW)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클리블랜드 공항에서 체포되어 마약 밀수 혐의로 기소됐다. 이튿날 폰다는 경찰관에게 발길질한 혐의로도 기소됐는데, 이때 도발적으로 주먹을 치켜들고 찍은 머그숏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2건의 기소 모두 가짜였고, 마약은 비타민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기각됐다. 폰다는 잣니의 미국 반전 운동 지지
활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자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기소였다고 확신했다. 폰다는 VVAW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군대 엿 먹어라(FTA)’ 투어의 주요한 조직자이자, 참가자이기도 했다. 투어는 미군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미군위문협회(USO) 순회공연의 대안으로 조직된 반전 운동 맥락의 오락 행사였다.
1970년 11월 3일.
전미농장노동조합 캘리포니아 지역 사무소에서 폭탄이 터졌다. 전미농장노조 라틴계와 필리핀계 여성 노동자가 주축이던 트럭 운송 노조 팀스터 노동조합과 관할 영역 분쟁을 벌이면서 몇 주째 파업을 벌였다.
1970년 11월 10일.
푸에르토리코계 활동가 단체 영로즈의 급진주의자들이 뉴욕시 사우스브롱크스에 있는 링컨병원을 장악했다. 사무직 노동자, 간호사, 의사 등이 포함된 600여 명이 간호사 주거동을 점거하는 데 가세해 뉴욕시 병원들에게 만연한 노골적인 인명 경시를 규탄했다.
1971년 9월 13일.
9월 9일 시작된 에티카 교도소 봉기가 진압됐다. 지독한 환경에서 괴로워하던 수감자들이 인종을 가로질러 단결해 교도소를 장악하고는 처우 개선을 요구한 봉기였다. 당국과 대화는 결렬되며 좌절한 수감자들이 결코 해를 끼치지는 않은 인질들을 위협하자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경찰에 교도소 탈환을 명령했다. 뉴욕 주 경찰은 교도소에 최루탄을 발사하고,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2분 간 쉬지 않고 총격을 가했다. 경찰이 사용한 총기 가운데로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금지된 탄약을 장전한 개인용 화기와 산탄총도 있었다. 많은 인질과 수감자가 부상을 입었고, 경찰이 교도소를 탈환하기까지 수감자 29명과 인질 9명이 사망했다. 경찰 기동대는 학살에 환호하며 백인 권력을 연호했다. 하지만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쟁 물결은 미국 전역 교도소를 휩쓸었다.
1971년 10월 10일.
오전 11시, 미 육군 제1기병사단 12기병연대 1대대 브라보 중대 병사들이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북베트남과 비공식적인 휴전을 선포했다. 병사 6명이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기를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킨 직후 이뤄졌다. 6명의 병사들은 군사 재판으로 회부될 예정이었으나, 반란자들을 지지하는 청원서가 돌아 중대원의 3분의 2가 서명했다. 한 언론인이 프랑스 어론에 청원서를 유출했고, 이에 군사 재판을 취소한 군은 브라보 중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는 델타 중대로 교체했다. 며칠 뒤 델타 중대 병사 20명이 출동을 거부했다. 군은 중대와 중대가 지원하고 있던 포병 중대를 철수시키고는 진지를 포기했다.
1972년, 3월 4일.
로즈타운, 제너럴모터스 자동차공장 노동자 수천 명은 여러 불만사항을 내걸고는 파업에 들어갔다. 비공식적으로는 사보타주, 무단결근도 만연한 상태에서 파업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으로 빠른 생산라인을 늦추고자 가끔 일부러 지정된 업무를 끝내지는 않았다. 공장장은 클리블랜드 주요 일간지, <플레인딜러>에도 불만을 토로했다. 엔진 본체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40명은 자기가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넘긴 사례도 있었다. 다른 노동자들은 좌석 커버를 난도질하고, 마르지 않은 페인트를 글고, 금속 부품을 구부렸다. 경영진은 노동자, 1200명을 징계하고, 징계하고자 700명 가까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노동자들은 22일 동안 생산라인을 장악하고는 정리해고, 징계 조치를 대부분 취소하게 하는 등 양보하도록 얻어냈다. 경영진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는 작업 속도, 작업량에 대해 양보하지는 않았지만, 전미자동차노조는 완벽한 승리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 노동자는 푸념에서 조합원들에 대한 정서를 볼 수 있다. 파업 전 노동조합 지부는 한계를 넘어 빠른 속도로 작업하는 데 문제의식은 있었다. 그런데 일하지 않는 걸 두려워한다. 노조, 회사는 모든 걸 타결했다. 분쟁에서 일부 급진적 노동자들에게도 교훈을 남겼다. 노동조합 지도부 쟁의를 맡기기보다는 파업 노동자들은 직접 처리하는 게 중요하다.
1972년 7월 25일.
미국 정부가 터스키기에서 진행된 매독 실험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매독을 치료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정부는 매독에 걸린 앨라배마주의 가난한 흑인 농업 노동자들을 치료하지 않은 채로 40년 동안 끔찍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여성과 아동이 매독에 감염됐다. 정부는 언론의 폭로 뒤로 사실을 인정했다. 대중적 분노가 치솟자 연방 정부는 의학 실험에서 피시험자를 보호하는 규제를 도입했다.
1972년 10월 11일.
멕시코계 여성 활동가들이 시애틀의 폐교인 비컨힐 초등학교를 점거하고 모든인종을위한센터를 세웠다. 멕시코와 라틴계 여성 시민권을 위한 조직인 이 단체는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72년 10월 11일.
워싱턴D.C 구치소 수감자 약 50명이 건물 한 곳을 장악하고, 교도관 12명을 인질로 잡은 다음, 수용 조건 개선과 과밀 수용 완화를 요구했다.
1973년, 2월 27일.
무장한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들은 부족 부패, 연방 정부로부터, 과거 원주민들과 체결한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데 항의했으며, 사우스코타주 운디드니를 점거했다. 1890년, 미군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장소를 선택하고는, 71일 간 끈질기게 버티면서, 정부군과도 잦은 총격전을 벌였으며, 사상자 또한 나타났다. 진압되기는 했지만, 점거를 계기로는 아메리카 원주민 운동을 지지하는 움직임도 크게 일어났다. 말런 브랜도는 최우수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오스카상 시상식 참석을 거부하면서, 아파치족 배우엿던 사신 리틀페더를 대신 보내서 수상하도록 했다. 시상식 무대에서 발언했다는 이유로 체포 위협을 받은 리틀페더는 무대 뒤에 모인 기자들에게 운디드니 학살에 대해 연설했다.
1973년, 6월 10일.
뉴욕, 대도시권, 공동 묘지 3곳에서 벌어진 무덤 파는 노동자들 파업은 44곳 묘지로 확대했다. 6월 21일, 법원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은 무시해버렸다. 파업을 벌이던 묘지노동자·녹지관리인조합(CWGA), 365지부, 지부장은 뒤로 법원 모독 유죄 판결로부터 징역형, 벌금형도 받았다. 27일간 파업이 이어진 끝에, 유대교, 로마가톨릭교회, 비교파 묘지 고용주들은 공동으로 노동자들 요구 대부분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노동자들 요구로는 향후 3년간 주당, 12달러 임금 연상, 고용주는 비용을 지원하는 연금 가입 등이었다. 쟁의 기간 가운데로는, 일부 망자 친척, 친구들 주검을 매장했지만, 최소한 1400구 시신을 매장하지 못한 채로 쌓여 있었다.
1973년 8월 13일.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서 흑인 독립 운동가 5명이 연속 8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록펠러 후손이 소유한 파운틴밸리 골프장에서 미국인 관광객 8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식민 당국은 흑인 수 십 명을 일제 검거한 뒤 자백을 받아내겠따며 그중 5명을 잔혹하게 고문했다. 재판 이후 배심원단은 외부와 접촉을 차단당했지만, 배심원 9명은 심의 중 FBI가 자신과 가족을 심문할 수 있다며 위협했다고 증언했다. 록펠러 가문의 개인 변호사와 해당 골프장 변호사로 일한 적이 있었던 판사는 미결정 심리 선언을 겨부하면서 배심원들에게 유죄평결을 강요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인 중 한 명인 이슈마엘 라비트는 후에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비행기를 납치해 쿠바로 달아났다. 쿠바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머지않안 풀려났다.
1973년 12월 28일.
스카이랩4 우주 정거장에서 몇몇 사학자들이 우주 공간 최초 파업이라고 일컫는 사태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작업 일정에 시달리자 제리 카 지휘관은 지상통제소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지구상에서라면 84일 동안 연속으로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여기 우주 공간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지요.” 비행사 윌리엄 포그는 우주에 관해 숙고하면서 “별들과 저 아래에 있는 지구, 우리 자신을 공부할 시간”을 좀 더 갖고 싶다고 말했다. 카는 결국 지상 통제소에서 전신을 보내 하소연했다. “우리는 휴식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빽빽한 일정을 조금 줄여야만 합니다. 밥 먹고 곧바로 훈련하고 싶지 않아요. 상황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월 28일, 우주 비행사들은 무전을 끄고 하루를 쉬면서 개인 업무를 처리하고, 나름 속도로 실험을 진행했다. 24시간 뒤 지상 통제사들도 타협에 동의했고, 우주 정거장 활동의 마지막 6주 분위기는 한결 밝았다.
1974년 11월 13일.
플루토늄 공장 노동자이자, 석유화학원자력노동조합 활동가이던 캐런 실크우드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벌어지는 보건 안전 위반사항에 관한 증거를 한 다발 가지고 <뉴욕타임즈> 기자를 만나러 가던 도중 의문의 교통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증거 다발은 발견되지 않았고, 차량은 정면 충돌 사고였음에도 뒤쪽이 부서진 채 페인트 자국이 묻어났다. 실크우드 지지자들은 다른 차량이 뒤에서 들이받은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실크우드와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플루토늄에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였는데, 회사 측에서는 실크우드는 회사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스스로 한 일이라고 내세웠다. 유가족은 회사를 고소하고, 140만 달러에 이르는 보상금을 받았다.
1977년, 3월 28일.
애틀랜타에서 대부분 흑인인 청소 노동자 1300여 명은 시급 50% 인상을 요구하고는 파업에 나섰다. 민권 운동, 블랙파워 운동을 등에 업고는 당선된 최초 흑인 시장으로는 파업 지지로부터 노동자들에 대한 기대를 짓밟은 채로 전원 해고했다. 마틴 루터 킹과는 다른, 마틴 루터 킹 시니어를 비롯한 민권 운동, 지도자들도 시장 조치를 지지했다. 유색인 대표자는 반드시 꼭 유색인 노동계급을 꼭 대변하지 않는다는 걸 초기에도 잘 보여준 교훈 준 사건이었다.
1977년 10월 14일.
반동성애운동가 애니타 브라이언트가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 톰 히긴스가 던진 파이에 얼굴을 맞았다. 이미 가수로 유명했던 브라이언트는 우리아이들을구하자라는 동성애 혐오 운동 단체를 이끌면서 프롤리다주 데이드 카운티에서 성해방에 대한 법적 보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는 동성애 반대 입장을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동성애를 저지하고자 십자군 운동을 이끌 것이다.” 파이를 맞은 브라이언트는 눈물을 터뜨리며 기도했다. 브라이언트는 프롤리다 오렌지 주스의 홍보 대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대적인 플로리다 오렌지 주스 불매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성애자 술집들은 스크루드라이버 대신 보드카와 사과 주스를 섞은 애니타 브라이언트를 팔면서 수익금을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다 기부했다. 뒤로 브라이언트는 프롤리다감귤위원회의 홍보 대사 계약이 종료됐고, 결혼 생활도 끝나면서 이혼에 찬성하지 않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배척 당했다. 말년에 이르러 브라이언트는 “서로 자기 방새디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라며 동성애 혐의가 누구러진 모습을 보였다. 1998년 데이드 카운티는 성해방에 대한 법적 보호 조치를 다시 도입했고, 뒤집으려던 기독교 단체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1979년, 2월 10일.
캘리포니아에서 파업을 벌이던 양상추 재배 노동자, 루피노 콘트레라스는 작업반장 손에서 살해된 사건도 일어났다. 대부분은 전미농장노동조합(UFW)에 속한 4300명, 노동자들은 임페리얼밸리 지역에서도 폭력적인 파업에도 들어갔다. 당국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살인자 기소를 거부했다.
1979년, 3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마약·성범죄 단속반 비번 경찰관들을 포함한 15명 정도, 남자 무리는 레즈비언 바에 있던 손님,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총각 파티를 즐기던 남자들은 레즈비언 바, 펙스플레이스에 들어가려다 많이 취했으며, 맥주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자 몇 명은 레즈비언들 따먹자라고 외치면서부터, 문지기 여자를 밀치고는 들어갔고, 술집(바) 주인을 당구채로 구타했다. 경찰을 불렀다고 외치자, 경칠이니까, 마음대로 해주지라고 말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관들은 도착했다. 손님들에게 부상자를 치료하지도, 목격자 진술을 받지도 않았다. 남자들에게 공격받은 한 여자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는 열흘간 병원에도 입원했다.
경찰관 한 명은 공격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징역형은 아니었고, 포함한 경찰관들 가운데 누구도 경찰에서 내쫓기지도 않았다.
성해방 공동체에 대한 분노를 돋았다. 사건 있었던 날로부터 몇 주 뒤로, 동성애자 시의원, 하비 밀크에 대한 살해범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성해방 공동체는 폭발할 수밖에는 없었다.
1979년, 5월 21일.
훗날 화이트나이트 폭동이라고 불린 사건도 일어났다. 하비 밀크를 살해한 범인은 살인죄 유죄 판결을 면하자 샌프란시스코, 성소수자 사람들의 분노도 폭발하면서부터 시작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공직에도 선출한 공개적인 동성애자였다. 밀크는 조지 모스코니 시장과도 나란하게, 전직 경찰관, 댄 화이트 총에 맞아 사망했다. 화이트는 경찰 시절 쓰던 권총으로 두 사람을 암살했다. 많은 샌프란시스코 경찰관은 댄 화이트를 석방하라는 구호도 적힌 티셔츠를 입은 한편, 화이트, 법률 지원금 모금액은 10만 달러에 이르렀다. 훗날 화이트는 미리 살인을 계획했다가 인정했지만, 당시 법정에서는 지금은 유명해진 트위크 초코바 변론을 활용했다. 뒷날 같은 표현은 패스트푸드, 정크푸드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 좋지 않는 식습관 때문에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다는 식으로 방어 논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의미는 확장해서, 의심스러운 방어 논리 일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크 푸드를 자주 먹는 습관 때문에 정신 상태는 좋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댄 화이트는 살인이 아니라 자발적 과실치사, 격정 상태, 도발로부터 저지른 과실치사로 유죄를 받았다.
평결 소식을 들은, 성소수자 사람들을 주축을 이룬 500명, 군중들은 카스트로 거리를 따라 사람들 참여를 호소하고는 시청으로 행진했다. 시청에 도착할 즈음 수천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시청을 습격하고는 유리창을 깨뜨렸다. 경찰이 군중에게 덤벼들어 경찰봉을 휘두르자 사람들은 경찰차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 남성은 차에 불을 지르면서 기자에게 말했다. 내가 트위키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신문에 꼭 써주라고 말했다. 굴욕적인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경찰은 같은 날 밤 한 게이 바를 습격해서 동성애 혐오 욕설을 퍼붓고는 유리창을 깨고는 술 마시는 사람들, 행인을 구타해서 많은 부상자를 생기도록 했다. 날 밝아올 무렵, 경찰관 61명, 시민 100여 명은 병원으로 입원했다. 댄 화이트는 5년 징역형만 받았다. 그리고 석방된 직후, 자살했다.
1979년 7월 20일.
아메리카 원주민이자 정치범 레너드 펠티어가 다른 2명의 수감자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롬폭연방교도소에서 탈옥했다. 그중 한 명인 보비 진 가르시아는 교도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메리칸인디언운동(AIM) 주요 성원이었던 펠티어는 FBI 요원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연속 2회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스탠딩 디어라는 아메리카 원주민 동료 수감자가 교도소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청부 살인자가 있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펠티어가 처음 받은 재판은 불일치하는 증거와 왜곡이 난무했다. 일례로, FBI의 한 탄도학 전문가는 재판에서 2구 시신 근처에서 발견된 탄피가 펠티어의 소총에 쓰이는 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했지만, 총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그의 보고서를 배심원들을 보지 못했다. 펠티어가 범죄현장 근저체 있었다고 말한 증인 3명은 나중에 증언을 취소하면서 FBI가 의자에 자신을 묶어놓고 증언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날조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넬슨 만델라,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유럽의회, 유엔 인권최고대표 같은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펠티어를 지지했다. 펠티어는 탈옥 3일 뒤 다시 수감됐다.
1979년 8월 30일.
스타 영화배우이자 블랙팬서당 지지자인 진 세버그가 FBI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린 끝에 자살했다. 그는 9개월 전 FBI 괴롭힘으로 조산아를 잃는 비극을 겪은 상태였다. 세버그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와 아메리카 원주민 교육 단체, 블랙팬서당 등에 학생들을 위한 무료 아침식사를 비롯한 상당한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급진운동을 겨냥한 FBI 코인텔프로 작전 일환으로 세버그 전화는 도청됐다. 세버그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FBI는 J. 에드거 후버 국장 지시 아래에서 아이 아버지가 남편이 아니라 저명한 블랙팬서당원이라는 가짜뉴스를 조작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가십 칼럼니스트 조이스 헤이버가 처음 보도한 가짜뉴스는 100여 개 신문에 똑같이 실렸고, 이후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기사가 보도되고 몇 주 뒤 세버그는 수면제를 과용했고, 뒤로 조산아를 출산했으나 아이는 이틀 만에 사망했다. 딸 장례식에서 세버그는 기사가 거짓이며 아이 아버지가 남편임을 증명하고자 직접 관을 열어 보이기까지 했다. 세버그 지인들 말에 따르면, 가짜뉴스는 세버그를 걷잡을 수 없이 무너뜨렸고, 결국 자살로까지 몰고 갔다.
1979년 11월 3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그린즈버러 학살이 발생했다. 반KKK 집회에서 공산당원 4명을 포함한 반인종주의자 5명이 KKK와 미국 나치당 구성원들에게 살해됐다. 경찰은 집회 전부터 나치당과 협조하면서 반인종주의 시위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제공했다. 후에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배심원단은 살인자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1980년, 5월 7일.
미국 지지를 받은 한국 군부 독재 정권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광부, 부인들에게 지난 달 시위를 벌인 사람들을 처벌하지는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저버렸다. 정부는 70여 명을 체포해서는 합동수사본부로 넘겼고,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가운데 30명은 나중에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고문당한 사람들 가운데 3명은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이른 나이에도 사망했다.
4월 21일, 광산 노동계급 지역민들은 경찰 무기, 공산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서는 사북읍을 점령, 40%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해방구를 세웠다. 이튿날 무장 경찰 300명도 도착했다. 5000명 시위대는 쫓겨났다. 지역 여성, 가정 주부,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투쟁에도 참가했고, 주민 공동체는 자체적으로 순찰대를 만들었다.
4월 24일, 고용주, 당국에서는 노동자들은 무기를 내려놓는 대가로, 임금을 인상하고는 시위대를 처벌하지 않기로 하는 등, 노동자 요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1981년, 4월 27일.
미국, 캐나다 출신 백일우월주의, 9명은 나치 깃발을 달고는 무기를 가득 채운 보트를 타고는 도미니카 연방을 침고하려다가 체포됐다. KKK 단원들 및 뒤로부터 네오나치 접속 경로(웹사이트), 스톰프런트를 개설한 사람을 포함한 인종주의들로는 99%는 유색인 나라들에서, 백인 독재 정부를 세우고는 인종격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하는 남아공과도 무역 할 계획을 꾸몄다. 9명 모두 고작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8월 5일.
항공관제사 1만 1345명이 파업에 돌입한 지 경우 이틀 만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해고됐다. 작업 복귀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지도자 출신 대통령에게 전격 해고됐다. 이때 해고된 노동자들은 평생 동안 연방 정부에 취업하는 게 금지됐고, 금지는 10여 년 뒤 해제됐다. 노동조합은 10월에 법적 절차에 따른 해산됐다. 새로 채용된 관계사들이 충분히 훈련받을 때까지 공군 항공관제사들이 업무를 대신했다.
1982년, 4월 1일.
석유 회사 엑슨(Exxon)은 이산화탄소, 온실 효과에 대한 내부 기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위 경영진들도 회람한 보고서 요약본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40ppm이고, 화석 연료 연소, 삼림 벌채 때문에 수치는 높아지고, 지구 온난화는 진행하고 있다는 확실한 과학적 증거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1995년에 이르면, 지구 온난화는 실제로도 탐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오난화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다다르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부정적인 효과를 완화하려면 화석 연료 연소를 줄여야만 한다고 경고했다. 엑슨, 과학자들은 2100년에 이르면 지구 표면 온도는 산업화 이전 수준보다 3-6도 올라갈거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도 입증했지만, 일찍 1970년대. 엑슨은 많은 화석 연료 회사들은 마찬가지로 자사 생산품은 지구에 파괴적인 기후 변화를 야기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엑슨은 시정을 위한 아무런 행동도 하지는 않았고, 기후변화 회의론을 조작하고자, 허위 정보 운동에는 정작 약 401억 7000만 원(3100만 달러)를 지원했다.
1983년 10월 25일.
미국이 카리브해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표면상 내세운 명분은 미국 국민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함이었다.
1984년 11월 12일.
핵무기 반대 활동가 한 무리는 미주리에서 핵미사일 격납고에 공기드릴로 구멍을 냈다. 11명의 자녀를 둔 헬렌 우드슨을 비롯한 4명이 체포되어 가혹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다. 우드슨은 27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1985년, 5월 13일.
필라델피아, 경찰들은 흑인 해방, 환경주의를 추구하는 단체 무브는 사무실로 쓰던 주택을 자동 소총으로 공격한 뒤로 폭탄을 떨어뜨리고는 성인 5명, 어린이 6명은 사망했다. 뒤로는 흑인들도 거주하는 동네로도 화재는 번지면서부터 주택 61채를 파괴했고, 250명은 집을 잃었다.
500명에 이르는 경찰관들은 여성, 아이들도 많은 무브 저택에만 1만 발도 넘는 사격을 가했고, 다른 경찰관들은 폭발물로 벽에다 구멍을 냈다. 경찰 청장은 뒤로는 FBI로부터 제공한 C4(폭약)FH 즉석에서 폭파 장치를 만들어 주택을 날려버리라고 지시했다. 폭파와 뒤이은 화재에서 2명만 살아남았다. 성인이던, 라모나 아프리카, 13세 마이크 워드였다. 경찰을 아무도 기소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는 폭동, 음모 혐의로 7년 징역형을 받았다. 필라델피아, 최초 흑인 시장으로는 민주당 소속 윌슨 구드 임기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었다.
1986년, 2월 25일.
미국으로부터 지원하던 필리핀에서는 반공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대규모 시위로부터 쫓겨나 국외로 도피했다. 사건은 에드사 혁명(피플파워혁명)이라고 불렀다.
1987년, 3월 24일.
새로 설립된 에이즈 환자 권리를 위한 직접행동 단체, 액트업(ACT UP), 회원 250명은 뉴욕시 월스트리트에서 시위를 벌이며 치료 접근권 확대, 국가적인 에이즈 대응을 요구했다.
시위 참가자, 17명을 연행했다.
1988년 7월 3일.
미 해군이 290명이 탑승한 민간 여객기 이란항공 655편을 격추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에서는 어린이 66명과 두바이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가던 일가족 16명도 있었다.
사고는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일어났다. 수 많은 실수가 연속된 결과였다. USS 빈센스호에서 미사일 발사를 책임진 해군 장교는 최소한 23차례 엉뚱한 버튼을 누르다 결국 미사일을 발사했따. 사고 뒤로 미군은 당시 빈센스호가 이란 공격에 맞서 한 상선을 보호하려고 출동하던 중 민간기공중회랑을 벗어난 지저메서 항공기 한 대가 공격 모드로 상선을 향해 강하했다고 주장했다. 변명은 나중에 모든 측면에서 거짓임이 밝혀졌다. 미군은 또한 상선이 공해상에 있었다고 주장하려 했고, 해군 장교들은 의회에 제출한 지도에서 이란 섬을 지우기까지 했다. 상선은 명백하게 국제버블 위반하면서 이란 해역에 있었다. 미국 언론들은 미 해군 공식 설명을 지지했다. 한 예시로 <뉴욕타임즈>는 민간 여객기 조종사인 모흐센 레자이안과 이란에게 책임을 돌렸다. 격추 사고 뒤로 빈센스호의 장교와 승무원들은 미국에서 환영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웅 대접까지 받았다. 모두 전투행위 휘장을 받았고, 한 사람은 “발사 절차를 신속하고 완벽하게 수행한 영웅적 업적으로 훈장까지 받았다. 함장은 뒤로 ”지휘관 역할을 대단히 탁월하게 수행했다는 이유로“ 공로 훈장을 받았다.
사고 뒤로 인디애나에서는 USS 빈센스호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우고자 모금이 급증했고, 이듬해에 기념물이 완성되어 헌정됐다.
1989년 9월 14일.
에이즈 운동 단체 액트업 회원 7명이 뉴욕증권거래소로 침투해 VIP 발코니에 사슬로 몸을 묶고는 시위를 벌였다. 유일하게 승인된 에이즈 치료제 AZT의 비싼 가격에 항의하고자 했다. 시위 직후 제약사 웰컴은 AZT 가격을 20% 인하했다.
1990년, 2월 20일.
버지니아주 피츠턴 석탄공장에서는 열 달 동안 벌어진 파업, 점거 끝에 광산 노동자들은 승리했다. 연좌 파업, 사보타주, 파업 지지자들, 여성 수천 명 동참으로부터 승리에는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미국, 주류 언론으로는 한 달 동안 이어진 소련 탄광 파업 소식을 끊임없이 보도했지만, 더 오래 계속된 피츠턴 파업은 거의 다루지는 않았다.
1990년, 5월 24일.
혁명 건설 노동자, 환경 운동가, 주디 바리 차에서 폭탄은 터져서, 바리는 중상을 입었고, 동료였던 대릴 처니도 부상을 당했다. 두 사람은 벌목 회사들에 맞서, 캘리포니아에서 오래된 미국 삼나무 숲을 보호하자는 운동을 벌이던 가운데, 부상 전에도 이미 벌목 트럭은 두 사람 탄 차를 깔아뭉갠 적도 있었다.
거의 곧바로 현장에도 도착한 FBI 요원들은 해당 폭발로부터 두 사람을 살해하려는 시도임에 분명했는데, 암살 시도로는 자작극인 사건으로 조작하고자 했다.
바리는 폭탄 공격 뒤에도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1997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몇 년 뒤로, 바리 가족, 처니는 FBI 사건 조작에 대한 시민권 소송에서 승소해서, 배상금 440만 달러를 받았다.
1990년, 6월 1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청소 파견 업체(ISS)에 항의하는 전미서비스노동조합(SEIU), 평화 시위 강운데, 청소 노동자, 지지자 500명을 과잉 진압하면서부터, 센추리시티 전투는 벌어졌다. 사건으로부터 대중적인 분노는 치솟았고, 노동조합을 인정받았고, 매년 6월 15일은 청소 노동자를 위한 정의날로 정해졌다.
1992년 7월 6일.
선구적인 성전환 활동가이자 성노동자인 마샤 P. 존슨 주검은 허드슨강에서 발견됐다. 존슨은 전 지구적인 성해방 운동을 촉발한 스톤월 항장에도 참여했따. 운동현장에서 급진적 조직화를 도모하며 오래 시간을 보낸 인물이었다. 또한 동성애자해방전선과 프라이드 행진으로 발전한 스톤월 항쟁 기념일 시위에 참여했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라틴계 성전환 활동가 실비아 리베라와 함께 거리복장전환행동혁명가들(STAR)을 창설하기도 했다. STAR는 게이, 성별 비순응자, 성전환 청소년에게 주거 등 지원을 제공하는 급진적인 단체였다. 존슨은 뒤로 에이즈 운동에 투신하고 액트업 조직책을 맡았다. 존슨은 생계를 위해 성노동에 종사했고 경찰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에도 시달렸고 100차례 이상 연행됐다. 존슨 주검에는 머리에 큰 손상이 있었는데도 경찰은 자살로 판정했다. 친구들과 동료 활동가들은 존슨이 자살했을 리 없다면서 살해됐다고 뒷받침하는 증거를 부각했다. 2012년 말 뉴욕 경찰은 타살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재개했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결로만 남았다.
1993년, 6월 26일.
일리노이주, 디케이터에 자리한, 농산가공품 회사, A. E. 스테일리에서 준법 투쟁을 벌이던,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 4000명은 열악한 조건으로 새 노사협약을 강요한 데 반대하고는
거리로도 쏟아져 나왔다. 파업 가운데, 탄광 노동자들, 중서부 전역에서는 생산 지역 전술을 구사하던 무한궤도(캐터필러) 노동자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다음 날, 스테일리는 기존 8시간 교대제에서 12시간 교대제로 전환을 강요하고는, 800명에 육박한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직장을 폐쇄했다. 계기로 벌어진 거대한 투쟁은 전미제지노동조합(UPIU) 지도부 배신으로, 파업 노동자, 과반 수는 노사 협약을 수용하면서부터, 1995년, 12월에야 끝났다. 일부 조합원들은 결과에도 격분하자, 노동조합 지부장, 짐 시널은 회사 경비원, 경찰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무한궤도 노동자들 또한, 1년 5개월 간 파업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전미자동차노조는 패배를 인정하고는 쟁의를 접었다. 디케이터를 비롯한 다른 4개 지역, 브리지스톤 파이어스톤 노동자들 또한 10개월에 걸친 파업은 패배로 끝난 뒤로, 12시간 교대제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1996년, 6월 5일.
텍사스, 국경 지역 단체, 시에라블랑카를구하자(SSB)는 핵 폐기물 처리 시설 반대 운동을 가속화했다. 미국, 멕시코, 여러 환경 단체들도 연대했다. 조지 W. 부시 주지사, 빌 클린턴 대통령, 버몬트 주 출신 버니 샌더스 상원 의원 등 여러 정치인들도 핵 폐기물 처리 시설 설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반대 운동은 2년 넘게 계속했고, 1998년, 10월 22일, 계획안은 공식적으로 보류했다.
1997년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 러스티레이디클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스트립댄서노동조합에 가입하기로 의결했다. 노동자들은 전미서비스노동조합 지부 일원이 되었다. 여성 댄서들은 광범위한 조직화 캠페인에 돌입했고 달리를 오므린 채 춤을 추는 등 방식으로 직접행동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마침내 교대제 보장, 임금 인상, 일방향 거울 제거, 인종차별적 일정 관리 금지, 자의적인 징계와 해고 금지 등을 얻어냈다. 댄서들은 나중에 클럽을 인수해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면서 경영진을 직접 선출했다.
1998년 7월 4일.
절친한 친구이자 인종주의반대행동 동료 회원인 23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킨헤드 린 뉴본과 20세 공군 병사 대니얼 셔스티가 20세 공군 병사 대니얼 셔스티가 라스베이거스 외곽에 있는 사막에서 백인우월주의자 무리에게 살해당했다. 네오나치 한 명은 곧바로 투옥됐고, 다른 이들도 2012년 살인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5년 9월 2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휩쓴 직후, 뉴올리언스 경찰관 데이비드 워런이 비무장 상태로
아기 옷을 집어 들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헨리 글로버를 사살했다.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글로버를 도와주려 했지만 경찰관들은 이를 제지하면서 공격했다. 경찰관 그레골리 맥레이는 민간인 차량에 글로벌 주검을 실어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차를 불태웠다. 맥레이가 차에 불을 지르는 동안 동료 경찰관은 웃으며 지켜봤다. 이후 경찰관 5명이 기소됐다. 워런은 살인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됐으나 항소심에서 승소해 무죄방면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직후 숱하게 벌어진 경찰 인종차별적 살인과 학대들 중 하나였다.
2005년 9월 4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쓴 직후, 뉴올리언스 경찰관 몇 명이 비무장 상태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에게 공격용 총기를 발포한 댄지거 다리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식품점에 가던 길인 바솔로뮤 일가족 중 6명이 사복 차림의 경찰이 쏜 기관총에 맞아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쓰러진 채 짓밟혔다. 피해자 중 일부는 최대 7발까지 총을 맞고 팔다리를 잃었다. 한 남성은 등에다 5발을 맞았고, 또 다른 10대 소녀도 4발을 맞았다. 경찰은 이후 경위를 날조하면서, 용의자 4명이 먼저 총을 쏴 경찰관 1명이 맞았고 따라서 대응 사격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심지어 생존자 중 1명을 체포하고는 경찰관 살인 미수 관련 혐의 8건으로 기소했다. 총격 사건 조사 책임을 맡은 경찰관은 총격자들의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날조하는 데 조력했다. 사건 발생 6년 뒤인 2011년에야 살인자들에 대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2008년 12월 5일.
시카고 리퍼블릭창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상 없는 정리 해고에 맞서 연좌 파업을 개시했다. 파업은 2008년 금융 위기 여파 속에 발생해서 폭 넓은 지지를 받은 첫 번째 노동자 투쟁이었다. 파업은 결국 보상 및 전 직원의 고용 유지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며 끝났다.
2013년 12월 23일.
시티 은행 노동자 레넌 레이 브랑운은 관리자로부터 불리한 업무 평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시스템 구성 파일을 삭제해서 은행 전상망 90%를 다운시켰다. 그는 경영진이 계속 현장 직원을 홀대하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시티 은행은 경찰에 신고했고, 브라운은 21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2016년, 6월 3일.
미국, 연방 판사는 여자 축구선수들에 대한 단체 교섭 합의, 파업 금지 조항이 포항된 시효는 만료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여자 선수들은 임금 차별 문제를 놓고는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였다. 여자 축구팀은 남자 축구팀보다 훨씬 성적이 좋고 입장료 등 벌어들이는 수입도 많았지만, 연봉은 남자 선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2017년 8월 12일.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 테러리스트가 차를 몰고 시위 군중을 향해 돌진해 32세 반인종주의자 헤더 헤이어가 삼아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헤더는 네오나치, KKK 활동가, 그 밖에 백인 민족주의자와 반유대주의자가 집결한 ‘우파여 단결하라’ 집회에 항의하는 수천 명 대열에 있었다. 차를 몰고 돌진해 헤더를 친 인물은 20세 네오나치 제임스 알렉스필즈 주니어였다. 그는 테러에 앞서 ‘우파여 단결하라’ 시위에서 극우단체인 뱅가드아메리카의 로고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샬러츠빌의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파시스트 무리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육 노동자인 디안드레 해리스를 습격해 잔인하게 폭행했다. 해리스는 척추 손상을 비롯해 여러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네오나치 시위대 일부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2018년, 2월 22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전역, 교사 2만 명은 낮은 임금, 열악해진 의료 보험에 항의하고자 살쾡이 파업에 돌입했다. 개별 학교에서, 페이스북 그룹에서도 웨스트버지니아 주 전체 카운티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평교사들은 기존, 노동 조합, 법에 도전하면서부터 파업을 개시했다. 교사들은 55개 카운티 전체에서도 학교 문을 닫았으며, 25만 명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일 뒤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주지사, 구두 합의로부터 파업을 취소하고자 했지만, 교사들은 다시 뭉쳐서 교섭안으로는 입법부를 통과할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결국 3월 6일, 교사를 비롯한 주 공무원들, 임금을 5퍼센트 인상하라는 법안을 통과하게 했다.
사례로는 고무된 켄터키 주, 오클라호마 주, 애리조나 주, 교사들도 같은 해 비슷한 파업을 벌였으며, 이듬해에는 덴버, 오클랜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파업 물결로 이어졌다.
2020년, 4월 29일.
일리노이주, 모리스 패스트푸드점, 아비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직원 수 부족, 개인 보호 장비는 모자라다며, 전 세계적인,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도 위험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데 항의하면서부터 일손을 놓았다. 쟁의로는 펜데믹 상황에서도 건강, 안전을 둘러싸고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수 많은 파업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2020년, 5월 25일.
아프리카계 미국인 경비원, 두 아들 아버지로, 48세 조지 플로이드는 미니애폴리스 경찰관, 데릭 쇼빈에게 살해됐다. 쇼빈은 8분 넘게 플로이드 목을 무릎으로 짓눌렀다. 이전에도 이미 18건 민원은 접수된 상태였던 살인자는 숨 쉴 수 없다는 플로이드, 필사적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말을 무시해서는 사망에 이르도록 했다. 쇼빈은 플로이드는 의식을 잃은 뒤에도, 목을 계속 눌렀다. 구급대는 도착한 뒤에도, 1분 20초 동안이나, 플로이드 목을 계속해서 무릎으로 짓눌렀다. 옆에 서 있던, 동료 경찰관, 3명은 지나가던 행인들은 영상, 사진을 찍으면서, 도움을 호소하는데도 쇼빈을 보호하기만 했다. 경찰, 자경단원들은 브리오나 테일러, 아머드 아버리, 레이샤드 브룩스 등 비무장 흑인을 살해한 사건들도 잇따르자,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다시 등장해서 미국을 휩쓸고는 국제적으로도 확산했다. 2020년, 7월, 미국 곳곳에서는 2500개 크고, 작은 도시에서, 4700여 건 항의 시위도 벌어졌고, 총 700만 명에서, 2600만 명 사람들도 참가했다. 경찰, 주 방위군, 무장한 백인우월주의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적으로 공격하는데도, 미국 역사상 매우 큰 규모로 시위 운동을 진행했다.
운동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순 없지만, 조지 플로이드를 죽인 자들에게, 살인죄 기소는 이뤄졌고, 경찰 예산 감축, 경찰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미니애폴리스 시의회는 경찰청을 해체하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