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니아.
뉴질랜드.
1845년. 3월 11일.
뉴질랜드(아오테아로아), 플래그스태프 전쟁 가운데, 코로라레카 전투는 일어났다. 마오리족 반란자들은 영국군을 물리치고 도시(러셀)를 장악했다. 전쟁은 이듬해 초 교착상태로 끝났다.
1951년, 2월 13일.
부두 노동자들은 잔업거부를 개시하면서부터 전체 산업 노동자들은 15퍼센트 임금 인상을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라고 요구했을 때, 아오테아로아 역사에서는 최대 노사분쟁도 시작됐다. 앞서 대부분은 영국이 소유한 운송 회사들은 항만 노동자들에게 9퍼센트 임금 인상만을 제안할 뿐이었다. 고용주들은 직장 폐쇄로 대응했으며, 정부는 비상 조치를 발동해서 육군, 해군을 파업 대체인력으로 배치하고는 항만노동자연맹(WWF) 등록을 취소하는 식으로 사측을 지원했다. 전국노동조합 연맹체, 당시노동자연맹(FL), 현 뉴질랜드노동조합협의회)(ZCTU)도 정부를 지지했으며, 야당인 노동당마저, 노동자들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모든 세력들은 반대편으로 가담하는 와중에도, 2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은 부두 노동자들을 지지하면서도, 연대파업에 들어갔으며, 수천 명 노동자들은 대체 인력으로부터 운송하는 상품 취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151일에 걸친 싸움 끝에 노동자들은 패배를 인정했다. 분재 여파로 많은 투사는 블랙리스트에도 올라서 뒤로는 몇 년 간 항만에서 일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1978년, 2월 12일.
아오테아로아(마오리어로 뉴질랜드)에서는 마오리 타이누이 아우히로 부족원, 250명과 연대세력들은 라글란 골프장을 점거해서는 경기 진행을 막았다. 1차 대전 가운데, 정부로부터 몰수한 원주민 묘지에도 세워진 골프장 토지는 원주민, 부족 거주자들을 쫓아내고는 집, 무덤을 파괴해서는 민간 개발업자들에게 판매됐다. 골프클럽 회원, 부족원이던 에바 리커드는 1972년, 시작된 항의 시위에서 핵심 조직자였다. 골프클럽은 골프장을 확장하고자, 더 넓은 묘지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벌어진 시위였다. 점거 현장에서는 타이누이 아우히로, 부족 종교 지도자들은 의식을 열고는 전통적인 환영 춤인 하카(haka)를 췄다. 경찰은 연행했다. 경찰은 리커드를 포함한 총 18명을 무자비하게 연행하고는, 리커드, 손목에는 오랫동안 지워지지도 않는 상처를 남겼다. 테 마타키테 부족, 유명 인사로는 벤 매슈스는 강경 진압에 항의하고자, 의회 앞 잔디밭 방송사 카메라를 모아놓고는 골프를 쳤다. 총리는 리커드에게 전화를 걸어서 골프장 땅을 부족들에게 되팔겠다고 제안했지만, 리커드는 처음부터 정부는 땅값마저 지불한 적도 없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1978년, 5월 25일.
뉴질랜드(아오테아로아) 경찰들은 오클랜드 근처 베스티언 포인트에서 가로챈 땅 반환을 요구하고 토지 점거 농성을 벌이던 마오리족을 공격했다. 오라케이마오리행동위원회(OMAC)는 506일 동안, 땅을 점거했다. 경찰들은 쫓아내고자, 진입해서는 222명을 체포하고는 건물을 철거했다. 그러나 항의 시위를 지속했고, 1988년, 정부는 나티화투아족에게 땅을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
1851년 8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폭력적인 시위가 발발했다. 경찰이 여성복을 입은 선원 마이클 나이트를 체포하려 한 것을 계기로 벌어진 사태였다. 나이트는 현지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신을 연행하려는 경찰관을 때려눕히고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도착한 나이트는 예배를 방해하며 신자들에게 욕을 했고, 결국은 더 많은 경찰이 충돌해 그를 체포했다. 나이트가 구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선원 수백 명이 경찰관과 경찰서를 공격했고, 과정에서 모든 수감자를 풀어줬다.
1856년, 4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석공들은 하루 최대 8시간 노동을 요구하고는 파업에도 돌입했다. 평일 10시간, 토요일 8시간으로는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했다. 석공들은 건설 현장에서 멜버른 대학교, 올드 쿼드랭클이라는 건물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8시간 노동, 8시간 여가, 8시간 휴식을 요구하는 현수막(플래카드)를 앞세웠다. 노동자들은 탄탄한 조직력 덕분에 도시 공공 사업장에서도 일하는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 없이도 금세 목표를 이뤘다. 노동자들은 5월 12일, 성령 강림절 월요일, 19개 직종, 700명, 가까이나 모인 가운데 행진을 하고는 승리를 축하했다.
1878년, 6월 25일.
멜라네시아, 원주민 전사들은 라포아 지역에서, 프랑스 식민 경찰 4명과 대부분 유럽인 정착민들을 죽이면서, 뉴칼레도니아, 카나크족 반란을 시작했다. 공격을 고조하고, 확산하자, 프랑스군은 반란을 진압하고자, 공세적으로 움직였다. 프랑스군은 같은 해, 12월까지 카나크족 인구 5%를 살해하고 많은 족장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는 여러 부족들을 다른 섬들로 추방하게 함으로부터,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 사업은 20년 동안이나 거의 중단했다.
파리 코뮌 추방자, 수천 명과 함께, 뉴칼레도니아에도 수감됐던, 무정부주의 루이즈 미셸은 봉기를 지지한 몇 안 된 백인 가운데 하나였다. 미셀은 1871년, 파리 봉기로부터 챙긴 소중한 붉은 목도리를 멜라네시아, 두 투사에게 줬다.
1916년 10월 28일.
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징병제를 도입하는 데 대한 국민 투표가 51% 대 49%의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다. 노동 조합 지도자 출신인 노동당 총리 빌리 휴스는 징병제를 도입하고자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국민 투표 부결 책임을 세계산업노동연맹으로 돌렸다. 세계산업노동연맹은 징집과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맹령하게 펼쳤다. 휴스는 이 단체를 불법화하고, 조합원과 활동가 다수를 체포 투옥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듬해 진행된 2차 국민 투표에서 징집안은 훨씬 큰 표차로 또 다시 부결됐다.
1926년, 6월 1일.
오스트레일리아, 윈덤, 경찰 순대는 백인 남성을 살해한 원주민을 찾으러 나섰다.
살해된 백인 남성은 원주민을 폭행하고는 채찍으로 때리던 이였다.
순찰대는 6월 19일 복귀했는데, 11명에서 300명,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 포리스트강 학살이라 불린다. 왕립 위원회는 학살도 벌어진 걸 확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경찰관은 아무도 없었다.
1928년 12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판사 라이어널 오스카 루킨은 목재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하하고, 주당 노동 시간을 44시간에서 48시간으로 늘려야 한다고 판결했다. 1월 3일, 목재 노동자들은 추가된 4시간 작업을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4주 뒤, 고용주들은 뉴사우스웨일스에 있는 70개 제재소에서 노동자 수천 명을 상대로 직장 폐쇄를 단행하며 노동자들의 작업 거부에 보복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대응했고, 9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고용주들은 노동자 부인들이 남편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호소하고자 노력했다. 산업평화협회(IPA)는 간담회를 준비하며 여성들이 자리에 참석해서 “파업 때문에 무력한 아이들에게 잔인한 짓을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항의하기를” 호소했다. 그러나 간담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연대여 영원하라>를 목청껏 부르면서 발언자들의 목소리를 압도했다. 한 젊은 여성은 의자 위로 올라서서 외친 끝에 간담회는 서둘러 끝이 났다. “우리는 남편들의 파업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파업은 패배로 끝이 났다. 노동장 정부가 당선되면 걸정은 취소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작업 복귀한 뒤에도 쟁의 중 해고된 파업 참가자 대다수는 복직되지는 않았다.
1929년, 1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 포트애들레이드에서는 파업하는 가운데, 노동 조합 소속 부두 노동자 600명은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는 대체인력들로 된 파업파괴자들을 가득 태운 증기선, 마리바호를 습격했다. 파업 파괴자, 경찰에 맞선 노동조합 소속 부두 노동자들은 돌을 던져서, 파업파괴자 약 3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파업 파괴자는 리볼버를 꺼내서 군중에게 사격했지만, 경찰은 체포하지도 않았다. 해당 사건으로부터 노도 조건, 노동 조합 조직화를 둘러싼 기나긴 분쟁 일부였다.
1930년 8월 26일.
오스트레일리아 포트애들레이드 파업파괴자 부두 노동자들이 여성 시위대를 포함한 지역 주민들에게 습격당했다. 노사분쟁이 장기간 이어지는 가운데 파업파괴자들이 기차역을 나서다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받았다. 강에 뛰어들어 배로 헤엄쳐가서 탈출한 한 사람은 경찰에 구조된 한편, 프린세스 부두로 몰린 다른 무리는 기마경찰 보호를 받았다. 또한 여성들이 일터를 나서는 파업파괴자들을 공격하려 달려들자 그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기차역으로 도망쳤다.
1966년 8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웨이브힐 목장에서 일하는 원주민 노동자 200명이 백인 노동자와 동등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자그마치 9년 간 파업을 이어갔고, 임금 쟁의로 시작된 사태는 목장주 영국 귀족 새뮤얼 베스티가 토지를 돌려줘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됐다. 노동자들은 결국 토지 일부를 돌려받는 데 성공했다.
1971년, 6월 17일.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건설 노동자들은 헌터스힐 교외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빈터인 켈리스부시에 호화 주택을 건설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 그린밴(그린벨트, 자연 보전 지역에서 건설 노동을 거부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전부터 지역 여성들은 공원을 지키는 운동을 벌였다. 경영진은 파업 대체 인력을 활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건설 노동자, 주민들은 승리했고, 켈리스부시는 오늘날까지, 공원으로도 남았다. 촉발된 그린밴 물결은 4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는 유해한 개발 사업들을 막아냈다.
1973년, 6월 13일.
오스트레일리아, 브로드메도스 자리한 포드 공장 노동자, 수천 명은 파업에 들어가서,
공장을 때려 부수고, 경찰 공격을 물리치고, 노동조합은 파업을 승인하도록 강제했다. 노동자 대부분은 이주민들이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복으로 생산을 말레이시아로 이전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파업은 지속했고, 지역 사회에서도 탄탄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스 정교회는 파업 기금을 기부했고, 의사들도 파업자 가족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웠고, 유리업자들은
폭동 와중에 깨진 유리창 교체 작업마저 거부했다. 10주 뒤로, 포드는 굴복하면서부터, 여성 채용, 노동자 채용 증대, 생산 속도 감소, 화장실 휴식 횟수 증가, 임금 인상 등 많은 요구안에 합의했다.
1985년 10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전역에서 시작된 간호사들의 준법 작업 운동을 경영진이 분쇄하려 하자 결국 전면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간호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의 개선을 요구했다. 부분적인 승리로 끝난 쟁의는 훨씬 큰 투쟁인 1986년 간호사 파업이 승리하는 토대가 됐다.
1986년 10월 31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간호사 5000명이 작업을 중단하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다음 날부터 임금 삭감에 항의하는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기로 의결했다. 파업 규모는 계속 커졌고, 12월 19일에 이르러, 정부는 결국 굴복했다.
통가.
2005년 7월 22일.
통가 왕국 공무원들이 60%에서 90%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으로 사실상 정부가 마비되고 다른 많은 공공 부문 직원들까지 파업에 가세하면서 통가 역사상 왕정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됐다. 파업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얻어냈고 정부가 자체적으로 개혁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피지 공화국.
1959년 12월 7일.
피지 공화국의 석유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도소매인방노동조합(WRWGU)이 벌인 파업은 피지인과 인도인을 주축으로 여러 종족 집단의 노동자들이 단합한 첫 번째 파업으로 유명하다.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에 대항해서 손 잡은 영국 식민 정부와 피지의 전통적인 추장들 모두를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