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레바논.
2004년, 5월 27일.
레바논, 공화국 베이루트 남쪽 교외에 자리한 마을, 알살람에서는 노동 조합 시위를 벌인 가운데 군대는 여성 1명을 포함한, 시위자 6명을 살해하고는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앞서 레바논노동자총연맹(CGTL)은 유가 상승, 높은 생활비에도 항의하고자, 전국 각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언하고는 거리로 나오기를 호소했다. 성난 시위대는 5층짜리 노동부 건물에다 불 질렀고, 군경은 레바논 내전 뒤로부터, 매우 지독하게 벌어진 노동자 시위에서 130여 명을 체포했다. 군대는 알살람, 주거 지역에서는 실탄을 사용하던 바로 같은 순간, 라픽 하라리로부터 이끈 정부는 일주일도 남지 않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베이루트 회담을 위해 방문하던 국제 대표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만주.
1920년 10월 19일.
만주에서 무정부주의 장군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주축으로 하는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어 일본 제국군 1개 사단을 쓸어버렸다.
말레이시아.
1948년 12월 12일.
영국군이 영제국 식민지 말라야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 일환으로 무장하지 않은 마을 사람 24명을 학살했다. 바탕칼리 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살인자 가운데 누구도 어떤 혐의로도 기소되지는 않았다.
방글라데시.
2013년, 4월 25일.
라나플라자 빌딩은 붕괴해서는 의류 노동자, 천여 명을 사망한 다음 날,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 수십만 명은 사건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고속도로에다 방어벽(바리케이드)를 치고는 경찰과도 싸웠고, 공장, 상점, 의류 기업인 연맹 본부를 습격했다.
많은 언론들은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상황을 값싼 옷을 구입하는 노동계급 소비자 탓으로 돌렸다. 인건비, 공장 안전 관리비로는 소비자들과는 별 관련도 없었다. 세계로는 저개발 지역 인건비들은 대체로 옷 한 벌 값, 1-3%에 불과하며, 방글라데스 모든 공장을 서구 기준에다 맞추더라도, 옷 한 벌 값에 추가하는 비용은 10%도 채 되지도 않기 때문읻. 단지 고용주들 이윤에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베트남.
1943년 8월 14일.
베트남 혁명가 응우옌안닌은 프랑스 식민 정권에 맞서는 노동계급과 농민 반란을 부추긴 죄로 투옥 중 사망했다. 프랑스 당국은 앞서 4차례 그를 투옥했지만, 마지막 5년 징역형과 10년 유배형은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23일.
사이공 코뮌은 영국 지휘의 구르카 부대로부터 지원 받는 프랑스군과 일본군이 도시로 진입하는 데 대응해 베트민과는 별개로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탄생했다. 가난한 교외 지역으로 집결한 반란군은 베어낸 나무와 뒤집은 자동차와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급조했다. 이들은 식민지 경찰과 관리를 총살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랜 인종 차별과 학대로 누적된 대중의 원한이 폭발하며 프랑스 민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공식적인 독립 운동체였던 베트민은 직접적인 충돌은 피한 채로 외국 군대에 대한 식량 공급 차단을 지지했다. 하지만 어느 봉기 참가자가 언급한대로, 이는 ‘헛된 희망’이었다. “영국 선반이 항구 접근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5일 르클레르크 장군의 지휘 아래로 프랑스에서도 추가 병력이 도착했고, 다음 주에 이르러 봉기는 패배로 끝났다.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이 미국 함정을 공격했다는 첩보를 받은 미국이 피어스애로 작전으로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했다. 해당 보고는 후에 거짓임이 밝혀졌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 폭탄 수억 개를 투하해서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다. 불발탄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해마다 끊이지 않고 사망자와 불구자가 발생한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 남부 민족해방선(NLF)는 베트남 설날에 맞춰,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개시했다. 미국,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다. 구정 대공세는 북베트남군, 민족해방전선에서는 대규모 사상자로 나타나면서부터 전술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전쟁은 거의 끝났으며, 미국 승리는 눈 앞에 있다는 선전은 거짓임을 미국 국민들에게도 보여줬다. 그리하여, 반식민세력에 대한 정치적 성공을 안겨줬으며, 미국, 인도차이나 개입에 대해 미국을 포함한 국민 대중들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1970년, 3월 14일.
베트남 주둔 미군은 사용할 네이팜탄 수천 톤을 운반하던, SS 컬럼비아이글호 수병, 앨빈 글랫카우스키, 클라이드 매케이는 전쟁을 항의하고자 반란을 일으키고, 배를 장악했다. 곧 네이팜탄을 사용 못하도록 당시 중립국이던 캄보디아로 배를 몰고 갔다. 캄보디아 정부는 둘 요구를 받아들이고는 망명을 허락하면서 반란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불과 이틀 뒤로 캄보디아에서는 군사 쿠데타는 일어나 친미 정부는 들어섰다.
글랫카우스키, 메케이를 구금했으며, 배는 미군에게 반환됐다. 감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매케이는 농촌에서 활동하는 캄보디아 급진적 무장단체, 크메르루주라는 게릴라로 합류했지만 나중에 게릴라들에게 살해됐다. 글랫카우스키는 미국으로 인도되어 10년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72년 9월 8일.
베트남 전쟁 당시 USS 콘스털레이션호 흑인 수병 60명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 이발소에 모였다. 이들은 해군에 만연한 인종 차별에 대해 각자 경험을 나눴다. 흑인 수병들은 진급에서 탈락하고 저임금 직책에 묶였으며, 백인 수병보다 가혹한 규율에 시달렸다. 뒤로 흑인 수병들은 블랙 프랙션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이발소에 모인 날로부터 56일 뒤 미 해군 역사상 최초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972년 10월 12일.
베트남 전쟁 와중에 USS 키티호크호에서 들끓던 인종 갈등이 폭동으로 폭발했다. 흑인 수병들을 차별한 사건이 계기가 된 폭동은 많은 흑인 수병이 빗자루, 렌치, 쇠파이프 등을 이용해서 즉석에서 만든 무기로 무장하고 함선 기물을 파괴하고 백인 수병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개됐다. 싸움은 이른 아침까지 계속됐는데, 결국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 장교 벤 클라우드가 설득에 나서면서부터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클라우드는 해산을 명령했지만 흑인 수병들은 그를 비하하면서 명령을 묵살했다. 6주 뒤, 흑인 수병 27명이 체포되어 기소된 반면 백인 수병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반란 소식이 퍼져나가자 함대의 다른 곳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스리랑카.
1971년, 4월 5일.
스리랑카(실론) 투사들은 경찰서 곳곳을 습격하면서 공산주의 봉기를 시작했다. 반란자들은 대부분 인민해방전선(JVP)은 조직한 젊은이들이었다. 앞서 공산당, 랑카사회주의당(LSSP), 러시아 볼셰비키인 레온 트로츠키, 사사을 지지하는 정당을 포함한 연합 전선, 정부를 지지했다.
연합 전선은 당선하자, 여러 국제 좌파는 반제국주의 승리로 여기고는 많은 환호를 보냈다.
인맨해방전선은 처음에는 몇몇 도시, 농촌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뒤로는 희한한 연합도 등장해서는 봉기를 진압하고자 나섰다.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을 비롯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이집트, 인도,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중국, 소련, 유고슬라비아까지도 실론 정부군에 대한
지지, 병력, 무기를 제공했다. 6월, 반란을 진압했다. 과정에서, 1000-5000명은 사망했다.
인민해방전선, 공산당, 라아사회주의당은 공산주의를 자처했다. 모두 여러 형태, 민족주의를 신봉했고, 소수 민족이던 타밀족을 상대로, 인종주의, 종족 청소를 자행한 싱할라족 다수도 조직했다. 특히 인민해방전선은 더욱 공공ㅇ연하고, 악독하게 타밀족을 차별했다. 2000년대 초,
타밀족 반군, 정부에 대한 평화 교섭에도 반대하는 주요한 세력으로도 부상하고 치명적인 내전마저 길어지도록 했다.
아제르바이잔.
1904년 12월 26일.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금속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임금 인상, 일요일 휴무 등 수 많은 요구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걸핏하면 시위가 벌어져 군경과 충돌하면서 5일 만에 핵심 산업인 석유를 비롯한 도시 대다수 기업은 문을 닫았다. 지난해 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달리, 이번에는 노동자들은 1월 12일까지 버텼고, 결국 러시아 제국 역사상 최초 단체 협약을 체결했다. 특히 노동자들은 하루 9시간 노동, 매달 사흘 휴무, 임금 인상,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 개선 등을 확보했다.
이란.
1953년 8월 19일.
영국과 미국 정부를 대신해 CIA가 조직한 쿠데타로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축출됐다.
모사데크 정부는 실업수당, 산재 보상금, 농촌 강제 노동 폐지 등 수 많은 사회 개혁을 도입한 바 있었다. 모사데크가 농촌주택 건설, 공중목욕탕, 페스트 관리 등 예산을 마련하고자 영국이 소유한 유전을 국유화할 계획을 세우자 영국 비밀정보부 M16는 CIA에게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1978년 10월 31일.
이란 석유 노동자 3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결국 이란 혁명 초기 여러 행동 가운데 하나였다. 석유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 및 여성 운동 일반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종교 근본주의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추종자들로부터 짓밟혔다.
1986년 11월 6일.
이란 콘트라 사건에서 미국이 이란에게 무기를 판매한 대금으로 니카라과의 우파 준군사조직을 지원한 사건이 처음으로 폭로됐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런 추측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건의 진실은 미국이 좌파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우파 콘트라 반군 암살대에게 불법적으로 무기와 지원을 제공했다. 이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 여론도 높아지자 의회는 결국 예산을 삭감했으나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을 거치는 방법을 이용해서 엄밀하게 따지자면 적국이던 이란에게 계속해서 무기를 판매했다. CIA는 자금을 다시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했다.
이스라엘.
1959년 7월 9일.
이스라엘 도시 하이파에서 경찰이 미즈라히 유대인 이민자 야코프 엘카리프에게 발포해 부상을 입히면서 와디살리브 폭동이 촉발됐다. 원래 부유한 팔레스타인인 동네였던 와디살리브는
1949년 이스랑레 정부에 의해 초토화됐고, 이에 따라 절대다수였던 아랍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들이 버려진 주택으로 옮겨져 빽빽하게 모여 살았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그곳은 임시주거지이며 조만간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권력층은 미즈라히 유대인을 얕잡아 보면서 무시했고, 가난과 높은 수준의 범죄율 속에 살도록 방치했다. 엘카리프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진 7월 10일, 수년간 들끓던 분노가 폭발했다. 지역 주민들은 경찰서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경찰과 충돌하면서부터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상점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티베리아스를 비롯해 북아프리카계 주민이 많이 사는 다른 도시들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시위 조직자 중 한 사람인 다비드 벤하루시가 투옥됐다.
1976년, 3월 30일.
이스라엘 정부는 갈릴리 지방에다 유대인 정착촌, 군사시설을 짓고자 아랍인으로부터 소유한 토지를 대대적으로 몰수했다. 반대하는 총파업, 대규모 시위로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했다. 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도 대대적인 연대 파업도 일어났다. 군경, 시위대 충돌도 확산해서 경찰과 군은 총을 쏘았고, 비무장 시위자, 6명은 맞고, 100여 명은 부상당하고는 수백 명을 체포했다. 탄압에 맞선 시위, 분노로 팔레스타인, 아랍인에 대한 연대 의식을 촉발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권리는 더 거대한 운동에도 불 붙였다. 이스라엘 당국은 토지 몰수에 대한 계획으로부터 갈릴리에서 아랍인 인구를 92%에서 72%로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지역 대규모 토지 몰수로는 1980년대 대부분 중단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는 3월 30일을 땅에 대한 날로 기념하고, 시위와 총파업을 벌인다.
2003년 9월 24일.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 27명이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암살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조종사들은 같은 작전이 “불법적이고 부도덕하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해친다”고 말했다.
2011년 7월 14일.
이스라엘 대도시 텔아비브에서 도저히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던 다프니 리프가 도시 중심부에다 천막을 세우면서 이스라엘 천막 항의운동이 시작됐다. 24시간 만에 수십 명이 그의 천막 옆에 또 다른 천막을 쳤고, 뒤로 2주간 주택가격과 높은 생활비,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운동이 전개됐다. 일부 아랍인 지역에서도 항의 천막이 등장했지만, 큰 틀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로 유대인 중심 시위운동이었다. 하지만 운동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에 기세가 꺾였고, 사람들은 좌파와 연관되는 걸 필하려고 애를 썼다. 한 활동가는 좌파는 반역자와 거의 동의어라고 말했고, 시위운동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정부를 소리 높여 지지했다.
인도.
1877년 10월 20일.
인도 방갈로르에서 구호를 기다리는 굶주린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일러스트레이티드런던뉴스>에 실렸다. 1873년에서 1874년 기근이 닥쳤을 때, 영국인 총독 리처드 템플은 신속한 구호 활동을 조직했고, 사망자가 거의 또는 전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국 관리들은 템플이 지나치게 많은 예산을 썼다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따라서 1876년 또 다시 기근이 발생했을 때 템플은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인도인들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수십만 톤의 식량이 잉글랜드로 수출됐고, 충분한 구호는 제공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학자들은 약 550만 명이 사망한 1876년의 기근을 대학살로 규정한다.
1889년 8월 14일.
웨스트인디아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다른 이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면서 런던 부두 대파업이 시작됐다. 2주 만에 13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부두 노동자 부인들은 파업을 지속하고자 집세 지불 중단 행동을 조직했다. 유대인 재단사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 또한 각자 요구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오스트레일리아 부두 노동자들은 영국 동지들을 지원하고자 성금을 내놓았고, 4주 뒤 고용주들이 굴복하며 노동자들 요구를 거의 전부 수용했다. 남성 노동자들은 지난해 브라이언트앤드메이에서 일하는 ‘성냥팔이 소녀들’ 파업에 힘을 얻어 행동에 나섰다. 부두 노동자 같은 미조직 임시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을 이루어 승리한 쟁의는 영국 노동계급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 암리차르에서는 영국군, 시크교도 순례자들은 대부분이던 군중에게 발포해서 1000여 명을 사망하게 하고는 훨씬 많은 부상자를 생기도록 한 잘리안왈라바그 학살도 벌어졌다. 희생자들 가운데로는 순례자만이 아니라, 무슬림, 힌두교도 많았다. 대부분 우마(牛馬) 시장을 찾는 농민, 거래업자, 상인들이었다. 매우 어린 희생자로는 태어난지 6주에 불과한 아기였다.
학살 사건으로는 12월까지 영국에도 보고하지 않고는, 아무런 범죄 혐의로 기소하지도 않았다. 사건은 분노로까지 널리 확산하고는 비협조 운동으로도 일어났다.
1927년, 3월 20일.
인도, 마하드에서는 콜라바 지역 하층계급 회의를 여는 동안 간디도 주창했던 비폭력 저항 운동, 마하드 샤타그라하 운동도 벌어졌다. 불가촉천민(달리트), 사회개혁가였던, B. R. 암베드카르로 이끈 2500명, 달리트 행렬은 공공 급수조를 향해 마하드 주요 거리를 행진하면서 다른 지역 사회 구성원들같이 급수조를 이용할 권리를 주장했다.
법적으로는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공공 편의시설을 이용할 권리는 있었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급수조에서도 물을 받아 마신 뒤로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같은 시위에 대응하고자 카스트로 속한 힌두교도 무리는 회의를 끝나고 나오는 달리트들을 급습했다. 폭도는 달리트들을 구타하고는,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저장해놓은 곡식마저 뒤엎었다. 많은 달리트는 무슬림으로 사는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힌두교, 최상 카스트이던 브라만들은 오염된 호수를 정화해야 한다면, 소똥, 오줌, 우유, 커드(응고한 우유), 기(정제 버터)를 섞은 액체 수십 통을 쏟아부었다.
직접 행동은 4년에 걸친 조직화 노력으로는 정점이었다. 파업을 벌이고는, 달리트 참전군인들은 달리트,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등 많은 노력도 기울였다. 같은 해, 12월, 1만 명, 달리트는 2차 마하드 사탸그라하에도 참석했다. 인도는 1955년, 헌법으로부터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음에도, 뿌리 깊은 차별은 여전히 이어진다.
1929년, 4월 8일.
사회주의, 식민 지배에도 반대하는 인도 혁명가 바가트 싱은 동지였던 바투케슈와르 더트와 델리 중앙 의회에다 폭탄 2개를 던지고는 혁명 만세를 외치고, 두 가지 탄압 번압을 통과한 데 대한 항의하는 전단을 뿌렸다. 의회 바닥에 흩어진 전단은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을 듣게 하려면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는 문구였다. 부상자 발생을 막고자 사람 없는 곳으로 폭탄을 던졌지만, 종신형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1931년, 3월 23일.
영국, 식민 당국은 파키스탄 펀자브주에서 인도,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바가트 싱, 수크데브 타파르, 시바람 라즈구루를 처형했다. 1928년, 식민 지배에 대한 반대 시위를 하는 가운데 경찰은 랄라 라즈파트 라이를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영국인 고위 경찰관을 암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는 수감하는 가운데였다. 영국, 식민 지배에도 반대한 사람들은 협소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영국, 인도 자본가들에게 두루 맞서는 노동계급 혁명도 옹호했다. 셋 다, 22-23살 청년들이었다.
세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로 모한다스 간디는 인도 총독에게 감형을 호소하면서도, 엄청나게 운집한 군중을 향해 당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므로, 석방을 요구하는 행동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처형되자 간디는 격분한 군중과도 맞닥뜨렸다. 사람들은 사형집행이 끝났다는 흑기를 흔들고는 구호를 외쳤다. 간디는 돌아가라. 간디주의를 타도하자. 간디 휴전으로 바가트 싱은 교수대로 끌려갔다. 바가트 싱 만세. 처형 뒤로 바가트 싱은 국민적 영웅이었다.
1940년, 3월 13일.
인도 혁명가, 우담 싱은 런더 한 회의 석상에서 전 펀자브주 부총독 마이클 오드와이어를 암살했다. 1919년, 오드와이어는 평화 시위에도 군대를 파견했으며, 1800명을 살해하고는 1200명에게 부상을 입힌 질리안왈라바 학살(암리차르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오드와이어는 학살에 대해 올바른 대처였다고 말했다. 싱은 구금된 동안, 이름을 람 모하마드 싱 아자드로 바꿨다. 앞 세 단어는 펀자브 3대 종교,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를 반영했으며, 마지막 아자드는 자유라는 뜻이다. 싱은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정에서 싱은 그는 죽어 마땅했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범인이고, 민족 정신을 짓밟으려고 했기 때문에 짓밟았다고도 했다. 꼬박 21년 동안 복수를 고대했다. 복수를 했으니 기쁘다고 말했다.
1943년 8월 22일.
잡지 <스테이츠먼>이 2차대전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 벵골 기근이 벌어졌을 때 굶어 죽은 사람들 사진을 게재했다. 앞서 벵골 총독은 여러 지역에서 쌀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걸 막고자 쌀을 옮기거나 폐기하기를 명령했고, 또한 현지인들로부터 배 4만 6000척을 몰수하며 어업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당국은 이미 식량 부족 상황인 농촌지역에서 식량을 빼내 우선권이 있는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 부유층이나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전쟁 산업 종사자와 공무원 등에게 식량을 우선 배분한 것이다. 홍수로 농경지가 훼손되자 식량 공급이 위험에 빠졌다. 하지마 윈스턴 처칠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경고를 접수하고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근이 시작됐는데도 구호를 제공하기는커녕 식민지가 자체 재정 비축분이나 선박을 사용해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도 금지하고 수천 톤의 쌀을 계속 유럽으로 수출했다. 한편 대영제국에 속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초과 식량은 쌓아두기만 했다. 대다수 사학자들이 전적인 인재로 여기는 기근으로 총 200만 명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다. 인도는 이전에 가령 1873년에서 1874년에 이번 기근보다 한층 더 식량 공급이 감소된 적이 있었지만
대규모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었다. 백인우월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현지 주민들의 곤경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어쨌든 벵골인들의 기아는 튼튼한 그리스인들의 기아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고, 기근 사태 와중에도 자랑스럽게 외쳤다. “나는 인도인들이 싫다. 그들은 짐승 같은 종교를 믿는 짐승 같은 족속이다.”
1946년, 2월 18일.
봄베이(뭄바이) 항에서는 해군 병사들은 식사,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왕립 인도 해군 반란 사건도 시작됐다. 반란으로는 군함 66척, 해안 시설에 복무하는 해병, 1만 명도 가담하면서부터 삽시간에 인도 전역으로도 확산됐으며, 폭 넓은 폭동, 봄베이 1일 총파업, 왕립인도공군, 지역 경찰 소규모 반란 등도 동시에 벌어졌다. 영국군, 영국 해군 전함도 총출동해서는 반란 진압에도 나섰다. 반란을 일으켰던 선박들은 적기, 인도국민회의(INC) 깃발, 무슬림 연맹 깃발까지 3가지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2곳은 공식적으로 항쟁을 비난했으며, 파업자들은 굴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뒤로, 당국은 반란자들을 체포해서는 군사재판에다 넘겼으며, 결과적으로는 해병, 476명을 쫓아냈다. 불명예 제대한 해병들은 독립 뒤로도, 인도, 파키스탄 해군에도 복귀하지는 못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인도 독립운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서사는 모한다스 간디가 이끈 평화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무척 다르다.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 권력이 철수하기 전까지 수십 년에 걸쳐 군대의 반란, 봉기, 암살, 폭탄 공격 등 종종 영국의 점령에 맞선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영국은 인도에서 손을 뗐으나 이 나라를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무슬림이 다수인 파키스탄 두 국가로 분할했다. 영국인 관리 중 하나가 비밀리에 자의적으로 지도상에 그린 국경선 때문에 패닉과 혼란이 생겨났다. 그 결과로 충돌이 일어나 1600만 명이 고향을 떠나고, 2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최대 10만 명의 여성이 납치 또는 강간을, 혹은 둘 다를 당했다.
1972년, 5월 29일.
인도, 마하라슈트라에서 카스트 차별에 맞서 싸우고자, 미국 블랙팬서 당을 본보기로 삼은 단체 달리트 팬서 당을 결성했다. 억눌린 사람을 뜻하는 달리트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하층계급에 해당한다. 사회주의를 주창한 달리트 팬서 당은 1970년대-1980년대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77년, 6월 30일.
인도, 파리다비드에서 경찰 탄압에 항의하는 폭동, 대규모 파업도 벌어졌다. 파리디바드, 주요 회사 가운데 한 곳에서 유지 보수 책임자로 일하던 하르남 싱은 경찰 구금 가운데, 사망하자 공장 노동자, 수천 명은 항의 뜻으로, 연장을 내려놓으면서, 지역 산업은 마비했다. 파리디바드 곳곳에서 폭력 사태는 벌어졌고, 수도로 향하던 차량들은 돌멩이 세례를 받고는 약탈당한 뒤 불태워졌다. 동료 노동자들에 따르면, 싱은 공장장, 경사, 회사 고위 임원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공장 구내에서 경찰에게 고문당해 사망했다.
1977년 9월 7일.
인도 모한나가르에 자리한 공작기계공장에서 노동자와 회사 측 깡패들 사이에서 폭력적 충돌이 벌어졌다. 공장 앞에서 불공정한 임금 삭감에 항의하던 공장 노동자들을 무장한 경비원들이 공격했다. 지역 노동자들과 행인들이 시위에 합세했고, 경비원들의 발포로부터 군중 또한 폭력으로 대응하며 공장을 불태우고 총을 쏜 두 명을 살해했다. 인근 공장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연대하며 살쾡이 파업을 벌였고, 다음 날 항의 시위 인원은 2만 명에 이르렀다.
1977년 10월 26일.
인도 칸푸르에 있는 스와데시면직공장 노동자 8000명이 경영진을 가둔 채 공장을 에워쌌다. 몇 주째 임금이 체불된 데 항의하는 행동이었다. 노동 조합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자들을 구타했다. 뒤이어 가스통과 산성 용액이 담긴 병을 공장 지붕 위에다 쌓아놓고는 전부 폭파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54시간 포위 끝에 노동자들은 체불 임금을 받아냈다.
1984년 12월 2일.
인도 보팔에 있는 유니언카바이드 화학 공장에서 유독 가스가 유출되어 500만 명이 피해를 입는 세계 최악의 산업 재해가 발생했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거나, 눈 멀고, 장애가 생겼다. 낡아 빠진 공장에서는 아무런 보건·안전 설비마저 없었다. 책임자이던 최고 경영자 워런 앤더슨은 처벌받지 않았고, 유니언카바이드는 인도 정부에다 지급한 보상금 4억 7000만 달러 가운데 극히 일부만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전달됐다. 평균 500달러 정도의 액수였다. 가스에 노출된 사람들은 지금도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이들이 출산한 신생아의 기형, 암, 만성 질환 발생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1991년 9월 28일.
인도 빌라이의 저명한 노동 운동 조직가 샨카르 구하 니요기가 한밤 중에 자다가 암살 당했다. 시멘트 공장 노동자와 도급 석탄 광부들을 조직하고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ᄒᆞᆫ 의료 보험 및 문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발 벗고 나선 니요기는 이윤이 줄어든 많은 지역 자본가들의 분노를 산 인물이었다. 살인범은 청부 총잡이 팔탄 말라였다. 1997년 말라와 더불어 자본가 몇 명이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2005년 대법원이 자본가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뒤집으면서 인도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1997년, 1월 16일.
인도 노동 조합 지도자였던, 두타 사만트는 암살 당했다. 사만트는 1982년, 뭄방이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섬유 노동 파업 핵심 조직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두타 사만트는 지하 범죄조직으로부터 청부 살인자로 추정된 총잡이 4명으로부터 총탄 17발을 맞았다.
1998년, 1월 11일.
인도 한 마을에서 사는 주민 2만 4000여명은 나르마다강 댐 건설 예정지를 점거했다 댐 건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고, 32만 명은 이주하는 사태를 막아냈다.
인도네시아.
1963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수천 명 군중이 영국 대사관을 부태우면서 이틀 전 있었던 말레이시아 연방 창설에 항의했다. 시위대는 또한 영국 대사 관저를 습격하고 영국 차량을 불살랐다.
일본.
1908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는 천황 정부는 사회주의 운동을 분쇄하고자, 처음 행동에도 나선 적기 사건도 벌어졌다. 유명한 무정부주의, 야마구치 고켄은 감옥에서도 석방되자, 군중들은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 구호로도 장식된 적기를 흔들고는 공산주의 노래를 부르면서 맞이했다. 경찰들은 폭력 진압으로부터 시위를 해산하고는, 저명한 활동가 14명을 검거했다. 나중에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5월 20일.
목재 노동자, 미야시타 다키치 방을 수색하던 경찰은 폭탄 제조 물질을 발견한 뒤로부터 천황 암살 공모했다는 혐의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일본 대역 사건도 벌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관련한 사람은 소수였다. 여론 조작용 재판에서도, 24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1911년 1월 25일.
일본, 무정부 여성주의자 간노 스카코는 천황 암살 음모에 가담한 죄로 처형당했다. 스카코는 일본 역사에서는 대역죄로 처형당한 유일한 여성이다. 14세에 성폭행을 당하고는 급진주의자가 됐으며,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이자, 일본 최초 여성 언론인이었으며, 여러 글을 남긴 작가였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도운 소피야 페롭스카야에게 영감을 받았다.
스카코는 5-6명, 공모자들과 암살을 음모한 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무고한 아나키스트 24명은 사형을 선고받자 격분했다. 스카코는 감옥에서 쓴 일기에서도, 자신도 사형 받을 각오가 됐으며, 동료 피고인들에 대해서 목숨을 건지기를 바랬다. 자존감을 유지하고자,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한다는 놀랍도록 편안한 생각에 휩싸였다고 적었다. 마지막 일기에서는 동료 피고인 12명에 대한 형 집행은 취소됐으며, 죽음을 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1918년 7월 23일.
일본에서 높은 물가에 항의하는 쌀 폭동이 시작됐다. 규모와 범위, 폭력성으로 볼 때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항쟁이었다. 이 항쟁은 결국 데라우치 마사타케 수상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1921년 7월 12일.
이탈리아 비테르보에서 이틀 전 파시스트들에게 살해당한 무고한 농부 톰마소 페시 장례식이 진행됐다. 이탈리아 최초 전투적 반파시스트 단체인 아르디티델포폴로 대열이 총검과 지팡이로 무장한 채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사건으로 아르디티델포폴로는 최초로 로마 바깥에서 행동으로 나섰고, 3일 동안 파시스트들이 비테르보에 진입하는 것을 막아냈다.
1923년 9월 16일.
노동 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연애 주창자인 이토 노에와 연인 오스기 사카에가 일본 도쿄에서 경찰에게 체포됐다. 경찰은 간토 대지진으로 일어난 화재를 급진주의자 소행으로 돌리면서 많은 두사를 살해했다. 이토와 오스기는 감방에서 몰매를 맞고 목 졸려 살해된 뒤로 우물에다 던져졌다.
1923년 12월 27일.
일본 혁명가 난바 다이스케는 국가로부터 살해 당한 동지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복수를 위해 황태자 암사릉ㄹ 시도했다. 암살에 실패한 난바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 뒤 처형됐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이 조만간 항복하기를 알면서도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민간인 수만 명이 사망했다. 수 많은 고위 군 인사들은 일본을 물리치고자 원자 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없다고 확언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국은 동구권 연합국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 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은 당시 최소한만 체면을 구긴 채로 항복할 길을 찾고 있었다. 끔찍한 폭탄을 털어뜨릴 필요가 없었다.” 전 합참의장 윌리엄 D. 레이히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 야만적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한 건 일본과의 전쟁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패배할 항복할 준비가 됐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그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암흑 시대의 야만인들과 똑같은 윤리 기준을 받아들인 셈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여자와 아읻르을 죽여가면서까지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미국전략폭력조사단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도, 소련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본토 침공을 계획하거나 구상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다고” 결론지었다.
1945년 9월 12일.
일본이 전쟁에 패배한 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토지 개혁, 지대 통제, 주요 산업 국유화, 인권 보장화, 보통 선거권, 남녀평등, 아동 노동 금지,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등 노동권을 포함한 27개조 강령을 뒀다. 민족 자결을 약속한 미 군정 당국은 이러한 개혁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남쪽에서 공화국을 폐지하고 군사 독재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제주도 인구 약 10%를 포함해 독재에 반대하는 수천 명을 학살했다.
1948년 7월 13일.
일본에서 우생보호법이 제정됐다. 사회당이 제출한 법안은 임시중단과 일정한 유형 피임을 합법화했지만, 주요 조항은 이른바 열등아 출산을 막고자 장애인 불임술을 크게 확대했다. 뒤로 반세기 동안 여성과 소녀 일부는 불과 9세였다. 대부분 1만 7000여 명이 강제 불임술을 받았다. 그 밖에도 8000명이 동의 아래에서 불임술을 받았는데, 동의에는 당국 강요가 개입됐다.
피해자 대다수는 정신건강 문제를 앓거나 유전적인 지적 장애 같은 진단을 받은 이들이었다.
유전으로 추정되는 질병 때문에 거의 6만 명이 되는 여성이 임신중단수슬을 받았다. 우생보호법은 1996년에야 폐지됐고, 2019년에 이르러 피해 생존자들은 보잘것없은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최근에는 우생학이 극우파와 연관되지만, 과거에는 좌파인사들도 우생학을 지지했다.
1960년, 6월 15일.
도쿄 의사당, 앞에서 시위는 벌어진 가운데, 22세 대학생 간바 미치코는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 간바는 일본에 미군은 영구 주둔하게 될 미일안보조약에 대한 반대로 매일같이 벌어진 시위에도 참가한 수십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67년 10월 8일.
일본 하네다 공항 근처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에서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경찰에게 살해되고 6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앞서 베트남 전쟁에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다리 위에서 전투 경찰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고는 경찰 승합차 한 대와 물대포차 한 대를 탈취했다. 시위대가 물대포차를 공항으로 몰고 가던 중 교토 대학교 학생 1 명이 죽었다는 외침이 들렸다. 주검을 수습하는 동안 잠시 싸움이 멈췄고, 경찰이 최루탄과 곤봉, 물대포를 사용해서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위자들이 경찰에게 밀려 다리 밑 강으로 떨어졌다. 이 싸움과 경찰의 진압은 일본 학생 운동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면서부터 전투가 고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68년 11월 22일.
도쿄 대학교 학생들이 지난 10월부터 동맹 파업을 벌이며 점거한 야스다 강당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의과대 학생의 무급인턴제를 비롯한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친 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벌어진 시위였다.
1968년 12월 29일.
10월부터 계속된 학생 파업과 점거 물결 때문에 난장판이 된 도쿄 대학교는 결국 1969년 이학 시험을 취소했다. 파업을 벌이는 학생들은 무급 인턴제 및 교직원과 경찰 협력을 둘러싸고는 계속되는 충돌에서 파업에 반대하는 공산당 소속 학생들과 전투 경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1970년 10월 21일.
도쿄에서 일본 최초 여성 해방 시위가 벌어지면서 일본 여성 운동이 첫 발을 뗐다. 여성들은 먹는 피임약 합법화를 요구하고, 임신 중단 금지에 반대했다. 일미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여성 학생 운동가들은 마침내 여성으로 요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때까지 활동가들은 안보조약 반대투쟁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자 침묵을 지켰다. 성해방과 자유 연애 또한 같은 시기로 폭발했고, 수 많은 여성은 피임약이 없어서 임신중단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피임약은 1999년에야 합법화됐다.
1970년 12월 20일.
미군의 계속되는 점령에 항의하던 일본 오키나와 주민 5000명은 해가 떨어진 뒤로 미군 헌병 수백 명과 충돌하면서부터 고자 폭동이 일어났다. 주민들은 미군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차를 불태우고, 가네다 공군 기지의 건물 몇 채를 파손했다.
1971년 7월 15일.
일본에서 중국 공산주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사상을 신봉한다고 자처하는 좌파단체 연합적군이 껼성됐다. 1년 만에 조직원 29명 중 14명이 혁명 의지가 약하다는 이유로 내부에서 숙청됐다.
연합적군이라는 일므에 의도치 않은 모순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1972년, 6월 11일.
일본, 도쿄 여성들은 의사당 앞에 모여서 우생보호법 수정안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
법안이 통과하면, 수천 명 여성, 장애인들은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
1978년, 3월 26일.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 개항 4일 전, 공항 건설에도 분노한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관제탑을
파손해서는 거의 두 달간 개항을 미뤘다.
중국.
1927년, 2월 19일.
중국, 상하이에서도 총파업은 일어났다. 총파업으로부터 우체국, 전체 면직공장, 필수 서비스는 멈췄지만 격렬한 거리 투쟁, 유혈 진압, 뒤로부터 파업은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패배로 무너지지는 않았으며, 다음 달에도 다시 일어섰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 국민당은 공산주의, 노동자, 학생 수천 명을 살해하거나, 실종하도록 하면서부터 상하이 학살을 개시했다. 앞서 중국 공산당, 소련뿐만 아니라, 일부 무정부주의도 군벌, 외국 제국주의 열강에도 맞서 힘을 합치면서부터 중국을 통일하고는 근대화하고자 했다. 뒤로는 12개월 동안 국민당은 반공 숙청에도 나서면서부터 30만 명도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
학살에도 불구하고, 소수 중국 무정부주의들은 국민당과 계속 동맹하고는 다른 사람들도 끌어들이고자 했다. 화린을 비롯한 대다수 활동가들은 거부했고, 국민당과도 동맹한 투사들은 무정부주의 행세를 그만둬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1989년, 4월 15일.
중국 공산당, 개혁 지도자, 후야오방은 사망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테안먼 광장에서는 노동자 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 노동자 항의 시위 물결로도 촉발했고, 몇 주 뒤로는 군대도 나서서 진압해야 할 정도로 커졌다. 항쟁은 자유로운 자본주의 민주주주의를 요구한 학생 운동으로 서구에서는 소개했었지만, 실제로는 한층 더 복잡하고, 노동 계급들도 깊숙하게 관계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경찰 탄압으로 직면하자, 많은 노동자들도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한 행동에도 나섰다. 베이징에서는 거리로 몰려나온 노동자들은 계엄령 선포 뒤로부터 진군하는 병사들을 형제같이 대하고는 보호물(바리케이드)을 설치하고는 군대는 도심부로 접근하기를 가로막았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던 학생,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추상적인 용어로 이야기해주거나,
노동자들은 주로 정부로부터 도입한 시장 개혁 때문에 악화된 경제 문제에도 흥미를 뒀다.
노동자들로는 경제 문제를 민주적이지 아니한, 관료제로부터 생겨난 결과라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한 노동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작업장에서 노동자 말은 중요한가, 아니면 지도자 말은 더 중요한가. 나중에도 이야기했지만,
공장에서 공장장은 독재자다. 한 사람 말로만 두루 쓰이기 때문이다. 공장으로부터 국가를 보자면 똑같다. 한 명만 지배하기 때문이다. 정작 바란 건 엄청나지도 않았다. 그저 노동자들도 독립적인 조직을 갖기를 바랬다.
6월 4일, 구태여 군대는 전국 곳곳에서도 진압에 나섰을 때, 베이징, 노동 계급 지구들에서는 폭 넓은 싸움도 벌어졌고, 노동자들은 매우 많이 희생됐다. 탄압으로부터 희생자는 몇 명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정부 공식 발표 수치로는 300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추정하기를 많았다. 희생자 가족들로는 약 200명, 사망자를 확인했다.
2009년 7월 24일.
공장이 민영화된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의 철강 노동자 3만 명이 폭동을 일으키며 최고 경영자를 때려 죽였다. 이후 매각 계획은 취소됐다.
2012년 7월 1일.
중국 쓰촨성 스팡시에서 구리공장 건설에 항의하는 수천 명이 때로 폭력도
불사하지 않는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은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면 환경과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주민 시위대는 정부 건물로 몰려가서 창문과 차량을 부수고 경찰을 공격했다.
정부가 구리공장 건설 중단과 함께 연행한 사람들 대부분을 풀어주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위는 7월 3일에 끝났다.
2013년, 6월 30일.
중국, 광둥성 후이저우에 있던 종지 건축자재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200여 명은 회사 사무실을 포위해서는 중역 5명을 가둔 뒤, 체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고 함께 정리 해고 계획에도 항의했다. 4일 간 이어진, 노동자들 점거 끝에 굴복한 경영진들은 체불 임금 지급, 정리 해고에 대한 철회에도 동의했다.
태국.
1973년 10월 14일.
태국에서 학생 시위와 노동 파업을 비롯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군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자유를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살쾡이 파업 물결이 고조되며 정점에 다다르면서부터 독재 정권이 물러나자 더욱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은 이후 몇 년 간 의회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성과를 얻고자 싸움을 지속했다.
1976년 10월 6일.
태국에서 군경과 극우 왕당파 폭도가 학생 시위대를 공격하면서부터 탐마삿대학교 학살이 벌어졌다. 여러 대학에서 모인 대학생 4000명에서 5000명이 전군사독재자 타놈 키티카촌이 싱가포르에서 복귀하는 데 항의하며 일주일 넘게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해, 그리고 일부 경우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고자 수 년 간 싸운 끝에 태국 지배 계급은 잔인무도하게도 대응하면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갈가리 찢긴 주검 위로 새로운 독재 정권을 세웠다. 시위대 수십 명이 살해됐고, 다수는 나무에 매달린 채로 몽둥이와 의자로 구타를 당했다.
파키스탄.
1968년 11월 7일.
파키스탄 라왈핀디 경찰이 모하메드 아유브 칸의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집회에게 발포해 3명이 사망했다. 탄압은 역풍을 일으켰고, 전국 각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노동 계급 사람들은 버스와 기차를 탈 때 요금을 내지 않았고, 농민 항쟁이 시작됐으며, 산업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듬해 3월에 이르러 정부가 무너진 상태에서 1970년에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됐다.
1972년, 6월 7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체불한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파업 군중에게 경찰은 발포해서,
사망자 3명, 부상자 수십 명은 나왔다. 경찰은 다음 날 장례 행렬도 공격했으며, 노동자들은 도시 전역에서 대규모 파업으로 대응했다. 경찰을 지휘한 인민당은 노동게급, 급진 좌파 지지를 받은 선출된 포퓰리즘 정부였다.
팔레스타인.
1948년, 4월 9일.
시온주의, 준군사조직, 이르군, 레히 소속 전투원 120명은 예루살렘 근처, 팔레스타인 마을이던 데이르야신을 공격했다. 데이르야신 학살 사건도 벌어졌다.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100명, 150여 명은 살해됐다. 일부는 목 잘리고, 내장 꺼내지고, 사지 절단되고, 강간 당했다. 많은 팔레스타인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고, 삭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초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 점령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봉기는 시작됐다. 봉기는 훗날 차 인티파타라고 불리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총파업에 참가하며, 이스라엘 택시에다 요금 지불하기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기관을 보이콧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소요는 1990년대 초까지 지속했다.
필리핀.
1763년 9월 20일.
필리핀 혁명적인 반식민 지도자 가브리엘 실랑이 에스파냐 당국에게 처형됐다. 전주에 실랑은 비간을 포위하고자 했지만 아브라로 후퇴할 수밖에는 없었고, 그곳에서 포로로 잡혔다. 실랑과 독립군 병사들은 비간의 중앙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02년, 2월 2일.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필리핀 최초 노동조합 연맹체로는 필리핀민주노동조합(UOD)를 창설했다. 같은 해 가맹조합은 150개로 돼서 총 2만 명, 조합원을 거느렸다. 노동조합은 마르크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 사상에서 기반한 원칙을 추구했다. 레예스는 에스파냐에서 활동하던 시절 파업을 선동한 죄로 감옥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을 접한 레예스는 필리핀으로 돌아올 때 미하일 바쿠닌,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 책을 여러 권 가져왔다.
1981년, 6월 5일.
필리핀, 노동자들은 바탄 수출자유지대(BEPZ)에서 계엄령을 해제한 뒤로 처음으로 총파업을 벌였다. 정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한 행동에 나섰다. 파업은 6월 7일까지 지속했고, 성과로 만들어진 바탄노동자연합(AMBA)는 뒤로부터, 1983년, 22개 기업에서 31건 파업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1986년, 3월 22일.
필리핀, 미군 기지에서 파업하던 노동자 수천 명은 마닐라 근교에 있는 미국 해군, 공군 기지 출입구를 봉쇄했다. 퇴직금 인상을 요구하고는 방어물(바리케이드)을 친 2만 여명 파업 노동자들은 감시선(피켓라인)을 넘어 진입하려는 미군들과도 충돌하면서부터 여러 곳에서는 폭력 사태도 벌어졌다.
1988년, 3월 29일.
필리핀, 노동자 50만 명은 일괄적인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는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국.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고자, 항의 시위로는 3·1 운동을 시작했다. 6주 동안 전체 인구 인구 10%로 이르는 약 200만 명 조선인은 1500차례 시위에도 참석했다. 일본 경찰과 군대는 무력으로 진압하고는 공개 처형을 비롯해서, 약 7500명을 살해하고는 1만 60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4만 6000여 명을 체포했다. 대조적으로, 일본 당국은 군경 8명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3·1운동 시위는 한국 독립 운동을 자극하도록 한 역할을 했다. 한국은 1949년부터 3월 1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기 때문이다.
1927년, 2월 22일.
일본에서 일하는 조선인 일용직 노동자들, 첫 번째 노동조합으로는 조선자유노동조합도 결성됐다. 조선, 무정부주의자, 문성훈, 이시우, 오성문 등으로 조직했다.
1936년, 2월 21일.
조선, 무정부주의자, 신채호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신채호, 부인은 일본 경찰에도 체포된 적도 있었으며, 신채호는 비밀 조직에도 가입했다는 이유로부터 10년 징역, 노역형을 선고 받았다.
조선에서는 유명한 언론인이었던 신채호는 기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를테면, 신채호는 꼿꼿하게 선 채로 세수를 해서 늘 사방에다 물을 튀겼는데, 일제로부터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1946년 10월 1일.
한국 대구 경찰이 2차 대전 뒤로 미국과 일본의 지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공격해서 3명이 사망하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사람들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부터 경찰관 35명이 사망했다. 가을 봉기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1948년, 4월 3일.
한국, 제주도, 좌익 봉기를 시작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는 한국은 소련, 미국으로부터 남북으로 분단했다. 전쟁도 끝난 뒤로부터 제주도는 자치 상태에 가까웠다. 제주도민들은 미국을 등에 업은 폭력 경찰에게 분노했지만 유엔은 남한에서 치르기로 예정한 총 선거로부터 분단은 굳어진다고 우려했다. 도민들은 경찰서, 우익 준군사조직을 습격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협력한 사람들을 주요한 표적으로 삼았다.
미 군정은 제주도로 군대를 보내고는, 미국을 등 업은 남한 당국은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여성, 어린이를 포함해서는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듬해 봉기를 진압했을 때, 섬 인구, 10%는 사망했고, 마을 70%는 파괴된 상태였다. 미국 지지를 받은 남한, 역대 독재 정부는
제주 항쟁(제주 4.3사건)을 입에 올리기를 금지하고는 어길 시 구타, 고문, 장기 징역형으로 처벌했다.
1960년, 4월 19일.
정부 지지자들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습격한 이튿날, 서울, 고려 대학교, 학생, 수천 명들은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 정권에다 항의하고자 시위를 벌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4월 혁명을 개시했다. 경찰은 군중에다 발포해서는 180명을 살해했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더욱 커졌고, 다음 주, 군대는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났다.
1967년 11월 18일.
베트남 주군 미군에 고용된 한국 노동자들이 형편 없는 식사에 불만을 표출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식탄을 뒤집엎고, 미국인을 공격하고, 미국인 사업 관리자에게 얼마나 형편 없는 음식인지 직접 먹어보라고 강요했다. 미국 민간인 1명이 한국인 3명을 총으로 쐈고, 헌병이 몰려왔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불도저와 트럭으로 반격하면서 트레일러와 건물을 들이받고, 보트를 탈취했다. 파업과 폭동은 4일이 지나서야 진압됐다.
1980년, 5월 18일.
한국, 광주 노동자들은 예비군 무기고, 경찰서를 습격하고는 총을 확보한 뒤로부터 미국 지원을 받는 잔인한 독재자, 전두환에도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정부군은 평화 반정부 시위대에게 발포하고는 여러 사람들은 사망한 뒤로 일어난 봉기였다. 봉기는 유혈 진압으로 끝났으나, 아시아 곳곳에서는 비슷한 항쟁도 연쇄해서 일어나는 계기였고, 같은 과정에서도 수 많은 민주 권리를 얻어냈다.
1987년 8월 17일.
한국 노동자들이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를 비롯한 여러 공장을 점거했다. 울산에서는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과 전투 경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 정권이 노동자들과 사상 최대의 결전을 벌인 사건이었다. 파업이 확산되며 훗날 노도자 대투쟁이라 불리게 된 싸움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노동자 120만 명 정규직 노동자의 3분의 1이 파업에 참여했다. 그해 말까지 3749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2005년 9월 25일.
한국 경기도에서 성노동자들이 민주성노동자연대를 결성하고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집장촌 고용주들과 단체 협약을 체결했다.
홍콩.
1922년, 1월 12일.
운송 회사들은 40퍼센트 임금 인상을 거부하자, 홍콩, 광저우 선원들은 파업에도 나섰다.
선원 노동 조합이 이끈 파업은 순식간에 3만 명이 참여하면서부터 홍콩 일상새활, 식료품 운송에도 일대 혼란도 나타났다. 영국 식민 정부는 파업은 불법이라고 선언했었지만, 52일 만에 1922년, 3월 5일, 진행된 교섭에서 고용주들은 굴복했고, 15-30퍼센트 임금 인상에 동의했다.
1967년, 5월 16일.
홍콩, 조화 공장, 피케팅을 벌인 노동자들, 구경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해서 대중적인 분노를 자아냈다. 경찰에 맞선 항의 시위, 충돌은 도시 전역에서도 발발했다. 식민 지배에 대항하는 운동을 조직하고자, 전체진영투쟁위원회를 창설했고, 이틀간 경험을 공유하고, 행동 계획을 짜고자 126개, 투쟁 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일지일 뒤 살쾡이 파업을 벌였고, 곳곳에서 폭동도 이어졌다. 6월, 총파업도 소집했다. 총파업은 기세는 꺾였지만, 일부 산업에서는 7월 말까지 파업은 이어졌다.
파업 기세는 꺾이면서부터 많은 시위자들은 영국 당국을 겨냥한 폭탄이라는 진짜 폭탄, 가짜 폭탄 모두 공격에만 의지했고, 도시 일상은 혼란에 빠지고는 멈춰 섰다. 훗날 홍콩 폭동이라 불린 사태는 12월까지 지속했고, 영국 당국, 중국 공산당은 비밀 협의를 가진 뒤로, 중단했다. 공산당은 이름만 내세워 식민 지배에는 반대했지만, 실제로는 영국령 홍콩으로부터 국제 시장에도 접근하면서부터 중국 경제는 이득을 봤고, 때문에 영국 철수를 압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위는 끝났지만 여파로, 영국 당국은 홍콩 노동계급 생활을 크게 개선하는 수 많은 개혁을 실행했다. 실업자, 장애인, 노인을 위한 영국식 사회 보장제 도입, 신규 병원, 주택 건설, 일부 성차별적 법률 폐지, 만연한 경찰 부패에 대한 대대적인 근절 등은 대표적인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