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가나.
1948년, 2월 28일.
가나, 영국 식민 경찰은 비무장 군인들에게 행렬에 발포해서는 가나인 3명은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다. 영국군 일원으로 참전했던 군인들은 생활비 상승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총독에게 제출하고자 했다. 뒤로는 아프리카인 6명은 체포됐고, 재판도 없이 국외 추방됐다. 항의로부터, 가나 곳곳에서는 폭동도 발발했으며, 진압됐다.
2010년, 2월 18일.
가나 신문, <아크라타임스>에 따르면, 산업·상업 노동조합(ICU)로 조직된 아크라, 성노동자들은 물가 급등에 맞춰서 요금을 인상하고자, 집단적으로 싸웠다고 보도했다.
나미비아.
1971년 12월 13일.
오늘날 나미비아에서 오밤보족 원주민 노동자 6000명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착취적인 강제 계약 노동 제도에 반대하는 파업에 들어가면서 구내 식당 불매 운동을 개시했다. 정부는 백인 학생들과 다른 부족의 흑인 노동자들을 파업 파괴자로 불러들이고, 경찰을 배치하며 폭력 진압에 나섰지만, 파업은 꾸준하게 확산됐다. 1월 3일에 이르러 많은 작업장과 모든 주요한 광산에서 파업을 진행했다. 같은 시점에서도 남아공 전부는 관련 제도를 개혁하는 데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파업은 1월 21일까지 지속했다. 결국 강제 계약 노동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일자리를 선택하고, 이직할 자유, 무상 의료 보험 등 주요한 요구는 관철됐다.
나이지리아.
1995년 11월 10일.
나이지리아의 오고니족 원주민 저술가이자 활동가, 환경 운동가인 켄 사로위와를 비롯한 활동가 8명이 정부로부터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로위와는 석유 회사 로열더치셸이 원주민의 토지를 파괴하는 데 맞서 오고니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비폭력 저항을 조직하는 데 투신했다. 사로위와에 불리한 증언을 한 많은 증인은 훗날 증언을 철회하면서 정부나 셸에서 뇌물을 받고 위증을 했다고 실토했다. 사로위와는 교수형에 처한 9명의 활동가 중 첫 번째로 형이 집행됐다. 5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집행됐다. 다른 희생자들의 이름은 바리보 베라, 새터데이 도비, 노르두 에아워, 대니얼 그부코, 폴 레베라, 펠릭스 누아테, 바리넴 키오벨, 존 크푸인이다. 사로위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주여 제 영혼을 받아 주소서. 그러나 투쟁은 지속될 것입니다.”
모로코.
1984년, 1월 19일.
국제통화기금(IMF)는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서 모로코 공립대학교는 등록금을 받자마자 모로코 북부 리프 지역에서는 항의 시위도 있었다. 노동자, 실업자들도 가담한 학생 시위로는 하산 2세 정권에게 야만적인 탄압에도 직면했다. 하산 2세 국왕은 리프 빈민들을, 야만인, 인간 쓰레기라는 Awbash로 몰아갔다. 시위 진압에 나서던 군대로는 수백 명을 죽이고는 감옥에도 가뒀다.
2016년 10월 28일.
모로코 리프 지역 젊은 생선 장수 무흐친 피크리는 경찰에서 생선을 압수 당하는 과정에서 청소차에 깔려 사망했다.
피크리가 끔찍하게 죽는 모습을 촬영한 목격자들이 이를 온라인에도 올리자 곳곳에서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틀 뒤 그의 장례식에는 수 천 명이 참석했고, 카사블랑카, 마라케시, 라바트에서 시위 행진이 벌어졌다. 이후 몇 달 동안 폭 넓고, 수준 높은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국민들은 리프 지역 항구적인 비상 사태를 중단할 것과, 특히 여성을 위한 교육 개선, 보건 의료 개선, 물가 안정, 토지 개혁 등등의 수 많은 개혁을 요구했다.
모잠비크 공화국.
1966년 9월 6일.
모잠비크 그리스계 혁명가 디미트리 차펜다스가 의회 회기 중 아파르트헤이트 설계자인 남아공 총리 헨드릭 퍼르부르트를 단도로 암살했다. 당시 차펜다스는 의사당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 차펜다스의 행동은 용감하긴 했지만, 암살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들과 그의 가족은 차펜다스와 거리를 뒀다. 경찰 진술에서 그는 살인 동기를 분명히 밝히면서 “남아공 총리가 사라지면 정책이 바뀔 것으로 믿었다”라고 말했다. “인종정책이 너무도 역겨워서 총리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밀어붙여야 했다”는 것이다. 보안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당국은 그를 정신질환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문과 사형 위협에 시달린 차펜다스는 마침내 정신질환을 인정하는 데 동의했다. 이후 그는 정신질환을 이유로 살인죄 무죄 판결을 받고 안전한 정신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살아남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종식을 보았지만, 새로 구성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정부는 그의 석방을 명령하지 않았다. 차펜다스는 1999년 구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세네갈.
1968년, 5월 18일.
세네갈, 정부는 학업 보조금을 삭감하자, 학생들은 전국적인 파업을 벌이면서부터 세네갈, 68년, 5월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경찰 폭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며칠 간 고조했고, 노동자 총파업으로 정점에 이르면서,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시에라리온.
2012년 12월 28일.
시에라리온 군대는 파업 중이던 광부들에게 발포해서 2명이 사망했다. 광부들은 외국인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상여금 미지급과 인종 차별에 항의하고,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총격 직후 경찰서 한 곳은 불에 탔고, 지역 택시 운전사들은 연대 파업을 벌였다.
알제리.
1954년 11월 1일.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알제리 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군은 곳곳에서 대부분이 민간인이 수십만 명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 반란을 극도로 잔인하게 진압했다. 나중에 프랑스 준군사조직들이 전쟁에 가세하며 알제리 민간인을 테러 공격하고 살해했다. 프랑스에서는 경찰이 식민 지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수십 명을 살해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프랑스에 거주하는 무슬림과 알제리인이었지만 프랑스 공산주의자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반식민투쟁은 계속됐고, 알제리는 마침내 1962년 독립을 달성했다.
1956년 8월 10일.
알제리 테러단체 북아프리카프랑스인연합(UFNA)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정보 장교 출신 앙드레 아시아리가 알제의 구시가에 폭탄을 터뜨려 73명이 사망했다. 이 공격은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상대로 벌인 무자비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
2001년, 4월 18일.
알제리, 도시, 카발리, 경찰들은 마시니사라는 젊은이를 살해하고난 뒤로부터 캄캄한 봄(Black Spring)이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봉기를 촉발하도록 했다. 마시니사 주음 뒤로부터 아마지그인(베르베르인)들은 민주 권리, 문화 권리를 요구하고자 항의 시위, 폭동을 알제리 전국 각지에서도 벌어졌다. 경찰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120여 명을 살해했다.
에티오피아.
1935년 10월 3일.
이전에는 아비시니아로 불린 국가이자 식민 열강에도 맞서 독립을 지킨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인 에티오피아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안에게 침공을 당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독가스를 사용했고, 공중폭격을 개시했으며,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로 가두는 등 숱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세계 각지에서도 흑인들은 분노했고, 많은 흑인 남녀는 파시스트 식민 지배자에게 맞서 싸우고자 자원했다.
이집트.
기원전 1157년 10월 13일.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파업은 기원전 1157년 10월 13일로 추정되는 날짜에 일어났다. 이 분쟁은 오늘날 데이르엘메디나라고 불리는 고대 이집트 도시에서 필경사가 쓴 파피루스로부터 설명됐다. 파라오 람세스 3세가 고용한 숙련된 건설 노동자 무리가 식량과 기타 물품으로 받기로 한 급여가 약속한 날로부터 18일이 지났는데도 지급되지 않자 일손을 놓았다. 노동자들은 배가 고프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신전 옆에 모여 앉았다. 관리들이 빵을 조금 주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다음 날 다시 시위를 하면서 테베의 중앙 곡물 창고로 모여 급여 지급을 요구했다. 마침내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받았지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야만 체불 임금을 지급하는 관행은 되풀이됐다.
1952년, 1월 26일.
전날 발생한 영국 점령군은 이집트 경찰 50명 살해에 항의하는 시위대는 유럽인이 소유한 건물 수백 채에 불을 지르고는 물건을 약탈하면서부터 카이로 화재, 검은 토요일 폭동도 일어났다. 같은 사태로는 공항 노동자들은 영국 비행기 4대 작업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06년 12월 7일.
이집트 엘마할라엘쿠르바에 있는 미스르방직방적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3000명이 상여금이 지급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작업장을 박차고 나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가로질러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남성들은 어디 있나. 여성들은 여기 있다.”, 파업에 합류하라고 남성들을 자극하는 구호였다. 인근 광장에서 노동자 수천 명이 모이는 동안, 70명은 공장에 남아서 기계를 점거한 채 생산이 재개되는 것을 막았다. 노동자들은 전투 경찰의 해산 시도에 저항하면서 점거를 게속했다. 4일 째에 접어들자 정부는 패배를 인정하면서 상여금을 지급하고, 민영화하지는 않겠다고 약속을 얻어냈다. 파업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연쇄 파업이 벌어졌다.
2007년, 4월 21일.
이집트, 만수라 에스파냐 섬유 공장에서, 여성들 대부분은 의류 노동자였고, 150명은 정리 해고, 임금 체불에도 항의하고자 공장을 점거했다. 경영진들은 점거를 중단하고자 많은 술책들을 동원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성매매 혐의를 날조하겠다고 위협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점거를 하면서도, 외박을 하면서 남편이 아닌 남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영진, 노동 조합, 둘 다 맞서면서부터 2개월 간 점거를 지속했고, 정리 해고, 임금 체불, 모두에 대해 양보를 얻어냈다.
2007년 9월 29일.
이집트 가즐엘마할라의 섬유 노동자 수 만 명이 일주일 간 이어진 살쾡이 파업에서 요구안 대부분을 과널하며 승리했다. 경영진은 기본급 7% 인상, 추가 상여금, 파업 기간에 대한 임금 지급, 파업 참가자 괴롭힘 금지, 이사장과 보좌진 탄핵 등에 합의했다.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혁명에서 시작됐다. 여러 청년단체는 경찰에 대한 강제 진압에도 항의하고자, 이집트 경찰의 날을 개시일로 잡았다. 계속된 항쟁에서도 수백만 명 시위대는 거리로도 쏟아져 나왔으며,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를 무너뜨렸다.
2012년, 2월 1일.
이집트에서 포트사이드 경기장 학살사건도 발생했다. 다수는 돌과 칼로 무장한 알마스리 축구팀 팬들이 알아흘리 팬들을 공격하면서 수십 명은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경찰은 공격을 보고도, 수수방관했으며, 도망치고자 출구를 열어달라고 했음에도 거부했다. 사람들은 2011년 혁명에도 참가했으며 당시 집권 중이었던 최고군사평의회에 반대했던 아흘리 팬클럽 울트라스 아흘라위를 겨냥한 보복이었다. 뒤로는 경찰관 9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도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기소됐다.
케냐.
1947년, 1월 13일.
당시 영제국 일부였던 케냐 몸바사, 노동자 1만 5000명은 흑인, 비흑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격차 비롯한 여러 불만을 제기했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철도 노동자, 항만 노동자, 가내 하인, 호텔 노동자 등 여러 직종에서 노동자는 파업에 나섰다. 정부는 파업은 불법이라고 선언했지만, 전체 노동자, 4분의 3은 참여했으며, 도시는 마비 상태에도 빠졌다. 파업은 12일 동안이나 지속했으며, 심사위원회로부터 구성해서는 20-40퍼센트로 이르는 임금 인상과 함께 잔업 수당, 유급 휴가, 주거 수당 등 수 많은 개선도 이뤄졌다.
1947년 8월 22일.
케냐 나쿠루에서 인종차별적인 신분증 제도에 항의하는 파업과 노동계급의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아프리카노동자연맹(AWF) 지도자 체게 키바치아가 영국 식민 경찰에게 체포됐다. 영국 식민 경찰은 5일 뒤 노동조합 지도자 마칸 싱도 체포했다. 한편 아프리카노동자연맹 위원장이자 독립운동 지도자인 조모 케냐타는 영국 노동당 정부 및 노동조합회의와 협력하면서 전문가 제임스 패트릭을 데려왔다. 말 잘 듣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정부를 돕기 위해서였다.
패트릭은 정치적 색채가 없는 순수한 현장조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직종별로 분리하라고 케냐 정부에게 조언했다. 목표 자체가 노동자들의 이익 도모가 아닌 생산성 향상이었다. 키바치아는 10년 간 유배됐고 싱은 인도로 추방됐다.
1950년, 5월 15일.
영제국 일부로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총파업도 벌어졌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다음 달, 파업을 선언할 계획이었다. 노동자들은 먼저 조업을 중단하고는 수감된 지도자 2명에 대한 석방, 최저 임금 대폭 인상, 연간 임금 인상, 주거 보조금 지급, 유급 병가, 연간 14일 유급 휴가, 실업 급여, 택시 운전사를 위한 권리 확대 등 보장을 요구했다. 노동 조합들은 뒤로, 모든 노동자, 동아프리카 지역 전체에도 자유를 달라고 호소했다. 영국 당국은 파업은 불법이라고 선언하고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으로 공격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대체 인력을 붙잡아 머리를 밀었다. 여성들은 물자 보급, 식료품 분배를 조직했다. 1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은 굳게 단합해서는 파업을 벌이는 가운데,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터로 복귀하기를 지시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최저 임금을 소폭 인상하는 데 동의했을 뿐이다. 쟁의 끝난 뒤로, 파업 노동자 수백 명을 해고했다.
1952년 10월 3일.
티카시 봉기 반란자들이 한 백인 유럽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면서부터 첫 번째 희생가가 발생하자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선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가 고조됐다. 영국 언론은 백인 살해를 이유로 내세우며 가난한 케냐인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했고, 같은 과정에서 케냐인 수만 명이 살해되고, 수십만 명이 강제 수용소로 갇혔다. 실제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백인은 32명이었다.
1952년 10월 20일.
케냐 총독 이블린 베어링이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서는 마우마우 봉기를 진압하고자 비상 사태를 선포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영국 당국은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마우마우 지도비로 추정되는 180여 명을 일제 검거했다. 이후 몇 년 간 영국인들은 민간인 수만 명을 학살한다. 영국인들은 또한 마우마우 봉기를 탄압하고자 케냐에 600만 개가 넘는 폭탄을 투하하고, 고문, 강간, 거세 등 대규모 작전을 벌였다.
1953년, 3월 26일.
케냐,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서 싸우는 마우마우 게릴라들은 나이바샤 경찰서를 습격했다.
게릴라들은 경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고는 인접한 구치소, 수감자 173명을 풀어줬다.
대부분 마우마우 성원이었다. 영국군은 봉기를 진압했지만, 그러나 몇 년 뒤로 케냐는 독립을 이뤘다.
1954년, 4월 24일.
케냐, 나이로비, 영국 식민 당국은 도시에서 키쿠 유족을 종족 청소하고자, 앨빈 작전을 개시했다. 키쿠유족으로 주축이던 마우마우 반란에도 비춰볼 때, 영국인들은 나이로비에서 주도한다고 여겨지는 땅과 자유를 위한 운동을 파괴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2주에 걸쳐, 군부대는 도시를 한 구역씩 봉쇄하면서부터 키쿠유족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도 있는 엠부족, 마루족 성원들을 모조리 납치했다. 심문을 거친 부족민들은 마우마우 반란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여부에 따라서도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 전투적 성향은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심문, 고문, 구금을 당한 반면, 마우마우와는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과밀한 지정 거주지로 추방하게 했다.
작전을 끝날 즈음, 유럽인 고용주, 장기 계약을 맺는 소수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도시, 키쿠유족은 거의 전부 사라졌다. 2만 명은 심사 과정으로 보내지고는 3만 명은 거주지로도 쫓겨났다. 납치 당한 사람들은 소지품을 담은 가방 하나만 겨우 챙길 수 있었다. 나머지는 영국군이 마음껏 약탈했다. 야만적인 탄압은 반란을 진정하도록 하기는커녕, 지배에 대한 반발만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생기도록 했다.
1964년, 1월 24일.
케냐, 독립 지도자, 총리로는 조모 케냐타는 병사 반란을 진압하고자, 영국 식민 군대를 불러들였다. 병사들은 낮은 임금, 케냐군에서 영국인 장교들로부터 항의하면서 파업 농성을 벌였다. 미국 구축함 1척도 영국군을 지원하고자, 서둘러 이동했다. 진압 과정에서 아프리카 군인 1명은 사망했으며, 군인, 행인, 각 1명은 부상을 입었다. 같은 주 동아프리카에서는 세 번째로 벌어진 병사 반란이었다.
2017년 9월 11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승차 공유 서비스인 택시파이, 리틀, 몬도라이드 기사들이 전 달부터 수료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 우버 기사들과 합류해서 무기한 파업을 시작했다. 몇 달 전 우버는 기사들의 잇따른 항의 시위와 파업으로 결국 요금을 20% 인상했는데, 이는 일반 택시와 가격 경쟁을 하고자 30% 인하했던 요금을 벌충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우버는 또한 수수료를 20%에서 25%로 인상했다. 기사들은 수수료를 10%로 내리기를 요구했다. 이후 2018년과 2019년에도 파업이 벌어졌고, 기사들은 고용주들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냈다.
콩고.
1960년 9월 14일.
콩고 역사상 민주 선거로 선출된 최초 총리인 사회주의 독립 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에 대항하는 쿠데타가 미국 지원을 받아 벌어졌다. CIA는 처음에 루뭄바를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루뭄부가 사용하던 치약에다 독국물을 넣는 암살 음모도 있었다. 대신 그를 체포해 구타, 고문한 뒤 총살했다. 전 식민 지배국인 벨기에 군인들이 루뭄바 시신을 파내 사지를 전달하고 황산 용액에 담가서 녹인 뒤 남은 뼈를 가루로 만들어 야산에 뿌렸다.
탄자니아.
1948년 8월 20일.
탄자니아에 속하는 잔지바르시티에 있는 아프리카부두회사 소속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영국 식민 당국 위협에 섬에서 일하는 다른 많은 노동자도 파업에 동조했다. 결국 총파업으로 이어지며 도시와 섬에서 경제 활동 대부분이 마비됐다. 파업은 9월 13일까지 계속되어 결국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회사 동의를 이끌어냈다.
1964년, 1월 12일.
인구 다수를 이루는 흑인들은 통치자인 술탄을 끌어내리고, 잔지바르 혁명은 일어났다. 반란으로부터, 인종차별을 일삼던 소수 아랍인, 200년 통치는 영국으로부터 잔지바르 섬을 점령하는 동안에도, 유지되고 강화됐다가 마침내 끝났다. 아랍인, 아시아인을 겨냥한 종족적인 보복도 시작했으며, 근처에서는 영국군도 주둔했는 데, 수백 명, 수천 명은 살해됐다. 영국군은 혹시 모를 좌파 정당, 집권을 염두에 둔 대비 태세를 갖췄다.
1964년, 1월 20일.
1350명 정도로 구성된 탄자니아(탕가니카)에서 한 대대는 2년 전 독립을 쟁취했는 데도 여전히 영국인은 지휘관를 맡았으며, 낮은 임금에 항의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튿날 반란은 다른 대대로도 확산되면서도 반란자들은 유럽인 장교들을 인질로 잡고는 라디오 방송국, 공항, 전시국 등 탄자니아, 다스에스살람에서 주요 시설을 장악하고, 약탈도 벌어졌다.
노동 조합들은 1월 26일, 총파업을 개시할 계획이었지만, 1월 25일,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였던 줄리어스 니에레레 정부는 영국군 반란 진압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날 영국 특공대는 도착해 반란자들을 공격, 군인 3명을 죽이고는 수백 명을 체포했으며, 경찰은 노동 조합 지도자들, 탕가니카노동자 연맹 사무총장을 포함해서, 200명을 체포했다. 니에레레 정부는 노도 연맹을 해산하면서부터 국가로부터 운영하는 노동 조합으로 대체했다. 노동 조합 역할로는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우간다, 케냐에서도 비슷한 요구를 내건 반란도 일어났다.
새로운 반식민 지도자들 역시나 영국군 진압을 도와주고자 요청했다.
튀니지.
2010년 12월 18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분신한 뒤, 거리로 몰려나온 시위대는 결국 독재자 진 엘 아비딘 벤 알리를 몰아내고, 훗날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항쟁을 벌였다.